[스토리텔링 2014-구미] 낙동강 물길따라<5> 낙동강 소금배와 수운(水運)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4-07-21   |  발행일 2014-07-21 제13면   |  수정 2021-06-15 17:19
소금 싣고 ‘오르락’ 곡물 싣고 ‘내리락’
해안-내륙 이어주던 문물 소통路의 추억
20140721
산호대교 부근에 있던 비산나루는 구미시 비산동과 양포동 사이의 낙동강을 연결하던 나루였다. 낙동강 뱃길을 이용해 소금배가 들어오면 각처에서 모여든 인파로 성시를 이루었고, 서민들은 나루 주변을 중심으로 생업을 이어갔다. 1985년 배 운항이 중단될 때까지 공단종사자와 학생, 주민들의 주요 교통수단으로 활용됐다. <구미시 비산동주민센터 제공>


◇ 스토리 브리핑

구미는 낙동강 뱃길이 발달해 예로부터 나루가 많았다. 특히 산호대교 부근에 있었던 비산나루는 소금배와 청어배, 육지의 농산물을 실은 배가 정박하던 물류 수송의 중심지였다. 또 갈뫼시장이 있어 소금배가 들어오는 날이면 성황을 이루었고, 주변에 낙서정과 비산향교가 있어 상업과 교통, 교육이 발달했다. 철길 개통과 더불어 점차 쇠퇴했지만, 1985년 배 운항이 중단될 때까지 구미공단 종사자와 학생, 주민들의 주요 교통수단으로 활용됐다. ‘구미 낙동강 물길따라’ 5편은 낙동강 뱃길의 주요 길목이었던 비산나루와 소금배, 그리고 수운(水運)에 대한 이야기이다.




20140721
20140721
비산나루의 옛 풍경. 낙동강 뱃길의 주요 길목이었던 나루는 서민들의 삶과 함께 이어져 왔다. 교통이 발달하면서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지만 기억은 여전히 추억으로 남아있다. 구미시 비산동주민센터 제공

#1. 나루 어귀에 큰 장이 서서 북적대다 

 

갈뫼(비산)시장의 장날에 맞춰 소금배가 올라온다.

부산에서 올라오는 소금배는 삼랑진과 수산, 남지 등을 지나 합천 밤마리(栗旨)와 현풍을 거쳐 대구와 왜관을 차례로 들른 다음 이곳 구미 비산나루에 닿는다. 부산에서 이곳까지는 열흘쯤 걸린다. 이곳에서 장을 보고 물 때가 좋으면 밤에라도 배를 띄워 상주의 낙동진을 거쳐 안동까지도 올라갈 터이지만, 대개는 비산나루에서 하루를 묵게 마련이다. 요즘은 한동안 비가 오지 않아 강물이 조금 줄어 아마도 안동까지 가려면 큰 비가 올 때까지 이곳에 머물지도 모른다.

청어와 각종 어물을 실은 배들도 장날에 맞춰 나루터 부근에 정박한다. 소금을 팔고, 겸사겸사 선산과 칠곡, 의성, 김천 지역에서 쏟아져 나온 나락과 보리, 콩, 팥, 기장, 조 등 곡물과 면화, 광석, 그리고 각종 목기를 사가느라 하루 종일 시끌벅적하리라. 질펀한 사투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지고, 뱃전에서 장터거리로 이어지는 길에는 호객하는 이들도 많으리라. 각 지역에서 장날에 맞춰 몰려온 보부상이 넘쳐나리라. 강변에서 시장에 이르는 길은 주막거리가 형성되리라. 주변에 낙서정(洛西亭)과 비산향교가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소금배를 통해 강 아래위로 이동하기도 하고, 소식을 듣기도 한다. 소금을 나르는 뱃길은 육지의 길 못지않은 생업의 중요한 길인 것이다.

주로 강을 이용했기에 강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소금배가 닿는 곳이 다르다. 바다와 멀리 떨어진 경상도의 북부 산간지역은 낙동강 수로가 각별할 수밖에 없다. 강물의 많고 적음을 두고 어디까지 소금배가 올라올 것이라는 짐작을 하고, 거기에 맞춰서 물산이 몰려들기도 한다. 그리하여 비산나루와 조금 더 상류인 낙동나루에는 언제나 배들이 꽤 정박하고, 그 인근에 장이 선다. 거기서 북부 산간지역 주민들은 소금과 해산물을 사고, 아울러 자신들이 지은 농산물을 내다 팔아 생계를 꾸려가는 것이다.


아침 일찍 시장에 나온 인근에 사는 김 총각은 혹시나 싶어 나루에 나간다. 아직 사람들의 왕래가 드물어 강가에 쪼그려 앉아 소금배를 기다린다. 부산 낙동강 하구에 있는 해안의 한 염좌(鹽座, 소금가마)에 형이 취직한 지 1년이 되었으니, 이번에도 소금배를 타고 형이 올라올 것이다. 김 총각은 이번에 형을 만나면 소금배를 탈 부탁을 해보리라는 궁리를 해왔다. 그러나 웬일인지 날이 밝고 강물빛에 어둠이 가시었는데도 형의 배 소식은 없다. 작은 목선들은 벌써 몇 척 올라와 강가에 밧줄을 맨다. 형이 탄 배는 제법 큰 배다. 어쨌든 오늘이 장날이니 오기는 올 것이다. 한참을 기다리니, 배 대신 사람들의 전갈이 먼저 온다.

“고딧줄꾼이 필요하오.”

“배는 어디에 있소?”

“저기 산모롱이 아래 좌초되어 있소.”

고딧줄꾼이란 좌초된 배를 끌어내는 일꾼을 일컫는 말이다. 갈수기 때는 물이 얕아서 자칫 배가 모래톱에 얹혀 꼼짝을 못하는 수가 있다. 그럴 때 고딧줄꾼이 요긴하게 쓰이는 것이다. 김 총각은 고딧줄을 매겠다고 자청한다. 10여명의 줄꾼을 간신히 모은다. 함께 강을 따라 내려가니 저만치 배가 보인다. 가까이 가니 김 총각의 형이 다른 선원들과 함께 배 밖 모래톱에 서 있는 게 보인다. 둘은 반갑게 손을 잡는다.

“네가 왔네. 집엔 별고 없제?”

“별고 없소. 형은 잘 지냈소?”

“나야 뭐 만날 이렇지.”

줄꾼과 선원들이 합심해서 양쪽에서 줄을 잡고 당긴다. 도사공(都沙工)이 선창을 하니, 줄꾼들이 후렴을 반복한다.

“가자가자 어서 가자.”

“어기여차 어기야.”

“남지들을 찾아간다.”

“어기여차 어기야.”

“언제 갈꼬 저 남지를.”

“어기여차 어기야.”

이윽고 배는 천천히 모래 위를 미끄러져 나온다. 강 복판으로 배를 끌어내자 줄꾼들은 양쪽에서 줄을 잡고 상류 쪽으로 당긴다. 바람을 이용하는 돛을 조정하니 배는 한결 쉽게 상류로 올라 이윽고 비산나루에 닿는다.

배를 강가에 대고 나자 소금의 하역 작업이 바로 시작된다. 거간꾼이 달려들고, 객주의 흥정이 시작되면서 일부 소금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진다. 김 총각은 형을 따라 하역작업을 돕는다. 이런 정도면 오늘 일당은 꽤 챙길 수 있으리라.

이윽고 상당량의 소금 하역작업이 끝나자 김 총각과 형은 시장판의 주막에서 점심을 들고는 필요한 물품을 사들이기 시작한다. 오후에 강가에 앉아 쉴 때 김 총각은 은근히 형에게 소금배를 타고 싶다는 뜻을 내비친다.

“배타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어. 염좌에서 소금을 산출하는 일도 엄청나게 고되지. 가능하면 네가 그 일을 하는 걸 말리고 싶군.”

형은 아예 그만 두라며 손사래를 친다.

“그래도 농사짓는 것보다는 벌이가 낫겠지. 부지런히 해서 돈을 장만하면 농사를 늘려서 돌아오고 싶어.”

동생은 간절히 형의 팔을 붙들고 흔든다. 나루터 아래쪽, 저만치서 또 배가 좌초한 모양이다. 줄꾼들이 양쪽에서 어기여차를 부르면서 밧줄을 당기는 게 보인다.


#2.가장 오래된 소금길이자 조세미의 길

“또 뱃놈의 짓이야?”

시장판의 한 구석에서 거친 욕설이 나온다. 단오날 벌어진 씨름판에 웬 뱃꾼이 나타나더니 파죽지세로 장정들을 눕힌 끝에 덜컥 상으로 걸린 송아지를 낚아채버린 것이다. 심기가 불편하면 ‘뱃놈’ 이라 해돼서 뱃사공과 주민들의 갈등이 늘 있어온 터에, 이 지역의 장정이 차지해야할 송아지까지 타지인에게 빼앗겨버렸으니 주민들의 심사가 뒤틀리지 않을 수 없다.

“그놈의 뱃놈 때문에 아까운 송아지를 놓쳤어.”

결국 옥신각신 끝에 싸움판이 벌어지고 만다.

낙동강이 뱃길로 유명하다보니 뱃사공과 각 지역 주민들의 관계도 미묘할 수밖에 없어 곧잘 벌어지는 일이다.

낙동강은 영남에서 가장 오래된 소금길이자 서울로 올라가는 조세미(租稅米)의 길이기도 했다. 낙동강 하구의 명지와 녹산 등에 있는 염좌에서 생산된 소금과 부산 인근에서 잡아올린 해산물(건어물과 젓갈류)은 일단 구포의 남창(南倉) 나루터에 모였다가 상류로 거슬러 오르면서 각 지역에서 교역되곤 했다.

특히 소금배는 각 지역간 주요 교통수단으로도 중요시됐다. 동해의 해산물이 나귀 등에 실려 내륙으로 들어오는 것 외에는 대부분의 문물이 소금배를 이용하여 운송됐다. 가령 예천의 소금배는 왜관에서 안동까지 왕래하곤 했다. 작은 배는 두세 사람이 탔고, 큰 배는 육칠 명이 탔다. 올라갈 땐 물의 깊이에 따라 밧줄을 어깨에 메고 양안에서 배를 끌기도 했다.

한편 조세미는 배를 이용하여 나르는 것이 편해 즐겨 낙동강이 이용됐다. 고려 때는 낙동강 유역에서 거둔 조세미가 남해와 서해를 이용하여 한강 하구로 해서 마포나루로 운반, 거기서 육로로 개경까지 실어 날랐다. 그러나 서·남해안에 왜구가 설치자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이를 피해 내륙의 수로와 육로를 연결, 충주의 경원창에 이르러 다시 배편으로 수로를 따라 서울로 향했다.

이후 내륙수로가 낙동강 연안의 경우 창원에서 밀양을 거쳐 각 조세미들이 집하한 뒤 배를 이용하여 상류로 거슬러 올라 성주까지 운반된 다음 육로를 이용, 충주까지 가서 다시 한강 수로를 이용했다. 소금배와 주요 집하장은 대구의 사문진, 성주의 동안진, 상주의 회촌진, 용궁의 하풍진(삼강), 안동의 대항진 등이었다.

특히 낙정마을과 낙동마을을 잇는 ‘낙동나루’는 영남 제일의 나루로 꼽혔다. 영남대로를 잇는 주요 나루이자, 소금을 비롯한 각종 물류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소금이나 곡식 등 물자가 가장 많이 유통되는 통로였던 것. 영남 각 지역의 세곡(조세로 바치는 곡식)과 부산에서 올라온 소금 등이 이곳으로 모였다. 소금 실은 배가 올라오면 마을 사람들은 지게에 쌀을 지고 가 소금과 곡식을 소금창고에서 맞바꿨다. 이로 인해 낙동강의 수십 개 나루 가운데 최대의 상권을 형성했다. 영남대로를 잇는 핵심 나루였던 만큼 조선시대에는 5척의 대형 나룻배와 도선군(渡船軍) 등 16명의 군인을 배치했고, 중앙에서 나루 관리자까지 파견했다고 한다.

낙정마을은 특히 주요 교통요지였다. 낙동강 물길을 통해 낙동나루터로 올라온 소금이나 공물(곡식, 특산물)이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역마나 수레가 필요했다. 낙정마을은 바로 역마와 마차 등을 갈아타고, 머무르고, 쉬어가는 역이었다. 가장 번성했던 시절, 낙동역에는 역무담당 관리(역원) 490명, 잡일을 맡은 사람 35명, 노비(머슴) 13명과 큰말 3필, 중말 2필을 포함한 말 13필 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당시 마을에는 역원들이 녹(관리 봉급)으로 받은 논밭을 소작하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쨌든 영남 내륙의 농산물은 낙동강 수운을 이용해 부산지역으로 내려갔고, 부산의 해산물과 부산항으로 수입된 각종 외국 물품이 영남 내륙으로 운반되었다. 쌀과 콩, 목재 등이 주로 내려가는 배에 실렸고, 소금과 무명, 옥양목, 석유, 어류 등이 올라가는 배에 실렸다. 특히 목재로 유명했던 춘양목은 춘양으로 모이는 소나무를 통칭했는데, 뗏목으로 엮여져 낙동강 상류인 봉화에서 띄워져 하류로 내려갔다.

이처럼 수천 년을 내려온 낙동강 뱃길은 그러나 철길 개통과 더불어 쇠퇴했다. 1905년초에 경부선이 개통되고, 그해 말에 마산선이 개통되면서 수운은 서서히 철도 이용으로 기울었다.

글=이하석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 참고문헌 : 구미시지, 박원호의 ‘낙동강 소금배는 어디까지 올랐을까’
공동 기획 : 구미시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