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7만여명 동원돼 쌓은 대구 1호 石城…완공직후 전국 70개 고을서 견학 와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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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22   |  발행일 2014-08-22 제35면   |  수정 2014-08-22
[인문·자연지리 보고서 대구GEO] 대구읍성 300년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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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에 촬영된 망경루와 당시 대구 사람들. 성벽의 원형이 일부 드러난다. <예명해 대구대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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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로와 북성로가 만나는 지점. 망경루가 있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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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읍성 축성비인 영영축성비(오른쪽)와 수성비가 망우공원에 나란히 서 있다. 뒤편의 건물이 영남제일관이다.


◆축성

최초의 대구성은 달성토성(현 달성공원)이다. 두 번째 대구성 역시 토성이었다. 대구읍지에 따르면 이 토성은 대구부사 윤현(尹睍)이 1590년(선조 23) 대구부민과 인근 선산, 군위, 인동 등 3개 읍민을 징집해 쌓아 이듬해 완공했다고 나온다. 인터넷을 포함한 일부 책엔 대구부사 윤방(尹昉)으로 나오나 오류다. 하지만 이 토성은 임진왜란 때 1만8천명의 고니시 유키나가군(軍)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다. 당시 서인이었던 대구부사 윤현은 왜군과 전투 한번 치르지 않고 부민 2천여명과 함께 공산성으로 입보했다. 이 토성은 고성(古城)이란 명칭에 기인해, 현 대구시 북구 고성동(古城洞) 일대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한다.

1736년(영조 12), 대구읍성을 쌓고 난 후 세운 축성비에는 ‘대구부치(府治)의 북쪽에 토성유지(土城遺址)가 있으나, 언제 창축됐는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이 있다. 다만 최초의 평지성이었을 것이라는 추정만 가능하다.

임란 후 대구는 군사·행정의 중심도시로 발전함에 따라 조정에서 성곽건축에 대한 논의가 분분했다. 1736년보다 앞선 1664년(현종 5) 경상감사 이상진은 ‘대구부(大丘府)는 사통오달(四通五達)의 땅으로 비록 평지에 있다 하더라도 대관방으로 만듦에 있어 성을 더욱 공고히 짓고 깊이 뚫는다면 어찌 평지에서라도 적을 막을 수 없겠느냐’는 장계를 올리기도 했으나 조정에 의해 묵살됐다. 이는 당시 읍성 같은 평지성보다 가산산성 등 산성 축성에 더 치중한 정책 때문이었다.

대구읍성의 축성이 결실을 거둔 건 1736년(영조 12)이다. 영조실록 권41, 12년 정월에 ‘좌의정 김재로(전 경상감사 겸 대구부사)가 말하길, 경상감사 민응수가 대구성 축조를 청하였다. 비록 지형이 수성에 어려움은 있으나 어찌 방위를 없이 하겠는가. 조현명(전 경상감사)도 역시 축성을 건의한 바 있어 상(上·영조)이 이를 허락한다’고 나와 있다. 그해 1월8일 채석을 시작해 6월6일에 성이 완공됐다. 11월에 낙성식을 경상감영 내 선화당에서 하고 축성과정을 기록한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를 세웠다. 이 비석은 옛 관덕정터~현 대구백화점(1911)~대구향교~망우공원 영남제일관 앞으로 세 번이나 옮겨졌다.

◆성의 구조

이 성은 대구 최초의 석성(石城)이다. 읍성의 높이, 두께, 둘레는 각각 약 5m(24척)·8m, 2.7㎞(2천124보)였으며 여첩(女牒·성곽의 방어와 효과적인 공격을 위해 만든 성 위의 담)은 955개였다.

읍성의 정문인 남문은 2층 누각형태로 영남제일관(남성로 옛 대남한의원 앞)이란 편액을 걸고 동·서·북쪽에 각각 진동문(鎭東門·동성로 동아백화점 옆 SC제일은행 앞), 달서문(達西門·옛 조흥은행 서성로지점 앞 ), 공북문(拱北門·북성로 옛 조일탕 앞)을 건립했다. 동서에 각각 암문(누각이 없는 성문)도 냈다. 또 성의 수리에 대비해 수성창(修城倉·현 대구시 중구 동성로2가 1~80)도 설치했다. (현재 망우공원에 있는 영남제일관은 복원을 잘 못했다. 원래 누각 2층 문루의 기둥이 6개 5칸이나 현재 4개 3칸으로 돼 있으며 크기도 원래보다 1.5배나 크다) 축성에는 대구부의 잡색군을 포함해 대구·칠곡군의 연호군(煙戶軍), 함경도 6진의 속오군(束伍軍), 산성의 아병(牙兵), 경상도내 승군(僧軍) 등 총 7만8천584명이 투입됐다. 민응수는 석맥이 있는 곳이면 몸소 찾아가 공사를 독려하는 등 축성에 큰 애착을 보였다.

축성공사를 끝낸 민응수는 남문에서 연회를 베풀고 포상을 하는 한편 활쏘기 대회를 열었다. 또 성을 보기 위해 70고을의 사람들이 와서 보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1906년 친일파 박중양 독단으로 한밤중 인부 60명 동원해 허물어

◆보수

민응수가 축성한 후 세월이 지나면서 성이 군데군데 허물어지고 건물은 낡아 볼품이 없었다. 축성 134년 만인 1870년(고종 7) 3월, 경상감사 겸 대구부사였던 김세호는 총 공사비 7만전을 들여 읍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다. 축성보다 시일이 8~9개월 더 걸렸다. 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이유는 서구열강의 침입을 막기 위한 대원군의 대외군사정책 때문이었다. 군량미를 비축하고, 열강과의 전쟁을 대비한 책략이었다.

김세호는 성벽을 더 높게 쌓고 여첩을 개축하는 한편 성 하부도 더 확장했다. 4대 문루도 수리하고, 성문 위에 각각 정해루(동쪽), 주승루(서쪽), 선은루(남쪽), 망경루(북쪽)를 세우고 8개의 포루(砲樓)를 설치했다. 그해 겨울 김세호는 성의 수리과정을 비석에 새겨 수성비(修城碑·현 망우당공원 영영축성비 옆)를 세웠다. 하지만 성벽 해체과정에서 경상감영의 입구였던 관풍루와 함께 망경루만 원형대로 현재의 달성공원으로 옮겨졌다.

◆해체

읍성은 1906년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였던 친일파 박중양에 의해 철거된다. 박중양은 대구읍성 철거보고서에 ‘성이 오래돼 토석(土石) 곳곳이 붕괴되고, 다니는 데 방해만 되니 심히 위험하다. 성벽을 허물어 도로를 내고자 한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실상 철거과정에 일본거류민회의 압력이 거셌다. 대구 거주 일본인들은 성을 철거한 뒤 도로를 개설함으로써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고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성 밖의 땅을 대거 보유했던 일본인들은 성을 허물면서 그들이 거주했던 지역의 지가상승을 유도했다. 대구물어(大邱物語·이야기)를 쓴 일본인 가와이 아사오에 따르면 당시 성 밖의 땅은 평당 2∼3원이었고 성 안은 평당 6∼10원이었으나 성벽 파괴로 도로가 나면서 성 밖의 땅은 10배 이상 뛰었다고 한다.

대구를 상징했던 읍성을 허무는 데 대해서 당시 조정은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중양은 독단으로 그해 10월 인부 60명을 동원해 한밤중에 성벽 수개를 허물었다. 그해 11월 조정은 허가 없이 성을 허문 박중양을 해임하려 했으나 이토 히로부미의 비호로 성사되지 못했다. 이후 박중양은 ‘성문과 망루는 길이에 따라 이용할 것이며, 성곽의 기초를 도로로 닦고 흙으로 만든 토벽은 1907년 3월5일 착수해 3주일 내로 없애고 개인에게 나눠줘 철거하겠다’는 성벽해체보고서를 올린다.

1907년 4월 그는 대구부민을 동원해 동남쪽 성벽도 허물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에는 읍성을 허물고 나온 성돌 한 개에 엽전 1냥을 받고 팔았다는 기사가 나온다. 신문은 또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운 읍성을 대구부민 수만 명을 동원해 허물어 일본인에게 성돌을 팔았다는 것은 대구근대 100년 역사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썼다. 당시 박중양의 전횡을 빗대 ‘중양타령’이란 동요도 불렸다.

‘춘불춘 중양가절 말 말아라. 통곡일세. 통곡일세. 누백년을 존숭했던 대구객사 어데 갔노. 애구(哀邱), 대구 흥~ 전무후무, 비기수단 대구성곽 구 공해(公垓·공공 방어시설)를 일 시간에 팔아먹네. 애구(哀邱), 대구 흥~’

가와이 아사오는 성벽해체에 대해 ‘박중양의 결단이었고 대구발전을 위한 것’이라고 치켜세웠지만 대구부민은 성벽해체에 대해 애석해했다.

일제는 성벽을 허물고 난 자리에 7칸의 도로를 계획했다. 이후 1909년 대구십자도로를 낸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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