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의 寶庫 김천을 이야기 하다 .17] 김천 모티길 - 사명대사길과 직지문화모티길

  • 임훈 박현주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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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28   |  발행일 2014-08-28 제11면   |  수정 2014-11-21
사명대사 호국의 발자취…푸름 짙은 옛길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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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모티길의 한 구간인 사명대사길은 김천 직지사와 인연이 깊은 사명대사를 기리고자 조성됐다. 옛 길을 그대로 두어 편안한 느낌과 함께 사명대사의 족적을 따라가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김천시 대항면의 사명대사길과 직지문화모티길은 사명대사와 직지사와의 인연을 기념하기 위해 명명됐다. 사명대사의 법명은 유정(惟政, 1544~1610)으로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다.

향토사학계는 사명대사가 김천 모티길(사명대사길·직지문화모티길)을 자주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천 직지사 입구에서 사명대사길과 직지문화모티길을 따라 걸으면 괘방령으로 갈 수 있는데, 이곳을 통하면 가장 빨리 기호지방으로 갈 수 있다. 사명대사가 모티길을 걸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주장이다.

사명대사길과 직지문화모티길은 각각 4.3㎞, 4.5㎞ 구간으로 조성돼 있다. 전구간 탐방에는 3시간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옛 오솔길을 그대로 두어 편안한 걷기보다는 사명대사의 족적을 따라간다는 것에 의미를 둔 길이다. ‘스토리의 寶庫 김천을 이야기하다’ 17편은 사명대사의 숨결이 깃든 김천 모티길의 두 구간, 사명대사길과 직지문화모티길에 관한 이야기다.


◆ 사명대사와 직지사와의 인연

직지사를 빼놓고 사명대사길을 논할 수는 없다. 직지사는 사명대사가 출가득도(出家得度)한 사찰이다. 그는 현재의 사명대사길을 통해 대처로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명대사의 속세 고향은 경남 밀양이지만 스님으로서의 출발점이자 고향은 김천 직지사다. 15세 때 직지사에서 출가한 사명대사는, 18세 때 승과에 장원급제 했다. 30세에는 직지사 주지에 오를 정도로 능력이 탁월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적을 물리치는 공을 세운 덕분에 직지사의 중창불사(절을 새로 고쳐 지음)도 다른 사찰보다 빨랐다. 이는 조선 14대 왕 선조(宣祖, 1552~1608)가 사명대사에게 보낸 신뢰 덕분이었다.

13세가 된 임응규(사명대사의 속명)는 학문을 닦기 위해 김천으로 유학을 왔다. 임응규는 부유한 유학자 집안의 자손이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을 정도로 위세 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당시 직지사 아랫마을에는 조선초기의 명재상으로 유명한 황희(黃喜)의 후손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이 살았다. 황여헌은 울산 군수를 하다 유배를 온 인물이었다. 이후 유배가 해제됐지만 김천에 서당을 열고 후학 양성에 주력했다. 마침 임응규의 할아버지가 황여헌의 학문적 깊이를 간파하고 손자를 김천으로 유학보낸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 못가 어린 응규에게 큰 시련이 닥쳐온다. 1년 만에 양친 모두 세상을 버리고 만 것이다.

“부모도 없는 고아가 공부를 해서 무엇하며, 충절을 배워 무엇할 것인가….” 어린 소년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결국 공부를 중단하고 방황을 거듭하던 임응규는 슬픈 마음을 달래고자 직지사를 찾았다. 슬픔에 지친 나머지 직지사 천왕문 앞의 바위 위에서 잠들고 말았다.

같은 시간 직지사 주지 신묵대사는 대웅전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신묵대사는 기도 중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범상치 않은 모습의 황룡을 목격한다. 직지사 천왕문 앞의 바위 위에 누런 용 한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 잠에서 깬 신묵대사는 의아한 생각을 품었지만 ‘그저 꿈이겠거니’라고 생각했다. 신묵대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웅전을 나서는 순간 바위 위에서 잠자고 있는 소년 한 명이 보였다.

“왜 여기서 이렇게 자고 있느냐.” 신묵대사가 소년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부모도 없는 자가 어디서 효행을 행할 것입니까. 저도 머리를 깎고 싶습니다”라고 소년이 답했다.

‘꿈에서 보았던 황룡이 바로 이 아이였구나….’ 신묵대사는 소년과의 만남을 운명적으로 느꼈고, 심상치 않은 인연임을 직감했다.

“부처님이 나에게 용의 모습으로 너를 보여주셨구나. 이제부터 내 제자가 되거라.” 신묵대사는 양반가문의 소년을 제자로 받아들였고, 그 소년은 30세가 되던 해 신묵대사의 뒤를 이어 직지사 주지가 되었다.

출중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사명대사는 늘 편안함을 경계했다. 직지사 주지를 지낸 후 선종의 수사찰인 봉은사 주지에 천거되었지만 이를 거부한다. 사명대사는 묘향산의 서산대사 휴정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에 매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명대사는 스승과 함께 왜군을 무찌르는 공을 세운다. 또한 일본 막부와의 협상을 위해 세 번에 걸쳐 일본을 방문, 3천500여명의 백성을 구해온다. 이후 선조는 사명대사에게 영의정의 관직을 제수하는 파격적 조치를 취했지만, 사명대사는 선조의 명을 받은 지 3일 만에 해인사에서 입적한다. 현재 김천 직지사 사명각에 사명대사가 모셔져 있다. 사명각의 편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 사명대사의 숨결을 느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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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문화모티길은 김천시 대항면 향천리 직지저수지를 돌아나온다. 인근의 마을 이름을 따 기날못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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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모티길의 사명대사길과 직지문화모티길 구간은 직지사에서 괘방령(掛榜嶺)으로 향하는 고갯길을 단장한 것이다. 직지사에서 직지문화모티길의 직지저수지 방향으로 가면 괘방령으로 향할 수 있다. 괘방령은 김천시 대항면과 충북 영동군 매곡면을 잇는 고갯길이다. 걸 ‘괘(掛)’자에 방붙일 ‘방(榜)’자를 썼다. 말 그대로 방을 내건다는 의미다. 예전에는 과거시험 결과를 도성이나 전국의 주요 길목에 붙였다. 그중 한 곳이 괘방령이었다. 괘방령은 경상·충청·전라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기에 많은 이들이 괘방령에서 조정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직지사 아래 직지공영주차장은 사명대사길, 직지문화모티길의 출발점이다. 시내버스 노선이 있어 대중교통 이용이 편리하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가장 먼저 직지문화공원에 도착할 수 있다. 외국 작가들의 조형물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공원도로변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하늘로 뻗어있어 이곳이 천년고찰의 입구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

계속 길을 따라 올라가면 직지사 입구와 매표소가 보인다. 사명대사와의 오랜 인연을 대변하듯 사찰 주변 나무들은 짙은 푸르름을 자랑한다. 직지사 입구 맞은편의 김천세계도자기박물관과 백수문학관도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후 사명대사길은 점점 황악산과 가까워진다. 산허리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계곡물 소리와 섞여 내려온다. 길을 걷는 내내 황악산이 걷는 이를 내려다보는 형국이다. 길 옆에 조성 중인 황악산 하야로비공원까지 완공된다면 탐방객들의 즐거움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황악산 하야로비공원을 지나면 본격적인 사명대사길로 진입한다. 시원한 그늘길 옆으로는 꿩 등의 야생동물을 목격할 수 있다. 사명대사길은 일반 민초의 길을 그대로 보존한 길이다. 이 때문에 마을 뒷산과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지만, 화려한 길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심심할 수도 있다. 길을 따라 계속 걷다보면 시명대사길과 직지문화모티길이 만나는 쉼터에 도착한다. 쉼터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면 사명대사길이 이어진다. 2㎞만 걸으면 직지공영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다. 만약 쉼터에서 곧장 직진한다면 직지문화모티길로 진입할 수 있다. 직지문화모티길은 기날마을을 거쳐 직지저수지를 돌아 직지공영주차장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짧은 코스를 원한다면 사명대사길이 좋지만, 여유롭게 걷길 원한다면 사명대사길과 직지문화모티길을 거쳐 돌아나오는 편이 좋아 보인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김천=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도움말=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공동기획: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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