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 개청 100년, 1914~2014 칠곡 .7] 작은 마을의 커다란 울림 ‘칠곡 3·1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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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29   |  발행일 2014-08-29 제11면   |  수정 2014-11-21
독립선언서 마을 곳곳에 붙자 만세소리 밤까지 잦아들지 않았다

‘왜관개청 100년-1914~2014 칠곡’은 칠곡군의 군청 소재지가 왜관으로 옮겨 개청한 1914년부터 100년 동안, 칠곡의 주요 역사와 인물을 다룬 시리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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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의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12일부터 4월9일까지 칠곡 일대에서 벌어졌다. 인동 진평을 시작으로 약목, 북삼, 석적 등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났고, 1920년대 이후 칠곡 지역에서 전개된 농민운동과 청년운동, 여성운동 등 민족 해방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경북지역 곳곳에서는 매년 3월이면 3·1만세운동을 재현해 그날을 기억하며 그 뜻을 기리고 있다.

◇ 스토리 브리핑

칠곡의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12일부터 4월9일까지 칠곡 일대에서 벌어졌다.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과 대구 등 전국 각처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의 영향으로 일어났다.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 이영식(李永植)·이내성(李乃成)이 대구에서 만세 시위 준비가 한창이던 3월7일에 독립선언서 20장을 가지고 칠곡군 인동면 진평동의 이상백(李相佰)을 찾아와 모의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칠곡의 만세운동은 당시 인동 진평을 시작으로 약목, 북삼, 석적 등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났고, 수많은 주민과 학생이 체포, 기소되어 형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칠곡의 3·1만세운동은 1920년대 이후 칠곡 지역에서 전개된 농민운동과 청년운동, 여성운동 등 민족 해방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 1919년 3월 7일 : 독립선언서 스무 장

바람이 다부졌다. 산맥을 뚫으면서 꾸준하게 근육을 키워온 먹장구름마저 소리 한 번 못 질러보고 그 자리에서 작살이 났다. 그 결에 살을 더 찌우려던 달이 슬금슬금 제 빛을 내렸다. 그렇게 풀 죽은 달을 바람이 등등하게 앞질렀다. 앞으로 가자. 어서 앞으로 가잔 말이다. 그 조용한 소란에 새들이 잠을 설쳤다. 달빛을 밀쳐낸 숲은 어둠이 깊어지면서 오히려 선명해졌다.

“도깨비라도 나타날 것 같아.”

이내성과 이영식의 발치에 덜 여문 봄바람이 밟혔다.

“우리가 도깨비지. 저들이 보기엔 말이야. 안 그런가?”

계성학교 학생이었던 두 사람의 품 안에는 독립선언서가 열 장씩 들어있었다.

당시 대구와 경북의 만세운동은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시작되었다. 첫째는 서울에서 3·1운동을 기획하던 인물들이 독립선언서를 보내온 것이고, 둘째는 서울에서 시위대열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인물들이 선언서와 태극기를 손에 넣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 소식을 전하면서 계기를 만든 경우였다. 대구는 전자, 칠곡은 후자에 속했다.

그렇게 전해진 독립선언서가 다음 날인 3월8일 대구 만세운동에서 낭독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내성과 이영식은 그 선언서를 가지고 칠곡으로 가는 중이었다. 바로 동지 이상백(李相佰)의 집이었다. 그는 칠곡의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이었다. 만세운동은 들불처럼 번져야만 했다.


#2. 1919년 3월11일 : 스무 장이 수백 장으로

불끈, 산봉우리가 솟았다. 깜짝 놀란 하늘이 붉어진 낯으로 허둥거리는 동안 대담해진 산봉우리가 해를 물어 삼켰다. 끄어억. 산봉우리가 트림처럼 무지개를 토했다. 팽개쳐진 충격으로 족족 찢어진 무지개가 아직 남아있는 햇발을 치워가며 제각각 도망을 쳤다.

“벌써 일몰이네. 오늘따라 노을이 유난히 짙군. 어서 서두르세.”

문밖의 동정을 재차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호롱불을 피워 올린 이상백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 답하듯 그의 방 안은 다시금 고요하면서도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종이 위로 붓이 흐르는 소리, 종이에 나무막대기를 붙이는 소리, 글과 색이 섞이는 소리, 들숨과 날숨이 오고 가는 소리.

다시 자리에 앉은 이상백은 임용섭(林龍燮)과 더불어 계속해서 독립선언서를 필사해나갔다. 팔이 저리고 손목이 시큰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이영식(李永植)·이영래(李榮來)·임점석(林點錫) 등은 태극기를 만들었다. 손가락에 물집이 다 잡힐 지경이었다. 그렇게 의기에 찬 부지런한 손놀림이 밤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날 밤, 다음 날인 3월12일에 있을 만세운동에 대한 공지와 함께 독립선언서가 마을 곳곳에 붙었다.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 우리는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는 도다, 남녀노소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활발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어 내게 되도다, 먼 조상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이로다.’


#3. 1919년 3월12일 : 작은 마을의 긴 울림

막 어둠이 내려앉은 마을, 주민들의 발걸음이 쟀다.

“왜놈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부지런히 움직입시다.”

“우리 촌것들이 무얼 알겠는가만 나라 잃은 설움 하나는 아주 잘 알지.”

그렇게 모인 이들이 60여 명. 진평동의 인구 수를 감안하면 꽤 많은 수였다. 그리고 오후 8시30분,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 소리는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 계속되었고, 다음 날인 13일 오후 4시경에도 약 20명의 목소리로 퍼져 나갔다. 이어서 밤 9시에도 약 30명이 만세를 크게 외쳤다. 그리고 3월14일 오전 10시경, 계성학교 학생 김도길(金道吉)이 합류하면서 주민 약 40명이 모인 가운데 만세 시위가 다시 전개되었다.

이 시위로 25명이 체포, 기소되었다. 핵심 인물이었던 이상백은 징역 2년, 이내성은 1년6월, 이영래·임점석·임용섭·박봉술은 1년, 박명언·권영해는 10개월, 나머지는 각기 징역 6개월의 형을 언도받았다.

한편 북삼면 숭오동(현 북삼읍 숭오리)의 고용살이 농민이자 숭오교회 신자인 안도수(安道洙)가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3월11일에 김익주(金益周)의 집에서 약목면 복성교회 신자인 김익시(金益時)를 만났다. 즉, 두 교회가 힘을 합쳐 약목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김익시는 3월12일에 복성동 최진화(崔塡和)의 집에서 박상하(朴相夏)·배일언(裵日彦)·한종호(韓鐘浩) 등과 회합하여 3월13일 약목 장날로 약속하였다. 하지만 일본 경찰에 탐지되는 바람에 체포되어, 안도수·김익시는 징역 6월의 형을 받았다.


#4. 1919년 4월 : 꽃처럼 피어오른 만세소리

경기도 안성에 장미꽃이 피었다. 장미는 여름에 사는 꽃이었다. 경상도 남해에 배꽃이 피었다. 배꽃은 봄에 일어나는 꽃이었다. 강원도 강릉에 동백이 피었다. 동백은 겨울에 견디는 꽃이었다. 온 나라 곳곳이 계절을 거슬러 피어난 꽃들로 어수선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만세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져갔다.

석적면 중리(현 석적읍 중리)의 장지희(張祉熙)·장영창(張永昌)·장도식(張道植) 등은 선산군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개시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마을 사람 22명을 규합하여 4월8일 밤 9시경 뒷산에 올라가 만세를 부른 것이다. 이에 일본 경찰에 21명이 검거되었고 이 중 8명이 기소되어 장지희·장영창은 징역 8월을, 김득룡(金得龍)·장영남(張永南)·장영옥(張永鈺)·장영석(張永錫)·장영희(張永希)는 징역 5월을, 장두박은 태형 90대를 언도받았다.

그즈음, 약목면 평복동에서는 지하수(池夏洙)·권성수(權星洙) 등 마을 청년 12명이 권영국(權寧國)의 집에 모여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이에 4월9일 밤 9시경 마을 동산에서 독립 만세를 높이 외쳤다. 여기서도 5명이 검거되었고, 피신한 지하수 등 6명도 체포되어 각각 형을 언도받았다.

또한 석적면 성곡리(현 석적읍 성곡리)의 장병규·장준식·장영조·장재식 등도 각처 시위 소식을 듣고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하여 약목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날과 같은 4월9일 밤과 10일 밤 양일 간에 걸쳐, 주민 박팔문(朴八文) 등 36명과 같이 만세를 외쳤다. 이 중 21명이 체포되었다.


#5. 1920년대 : 민중 운동 모태가 되다

칠곡의 각 지역에서 연이어 일어난 3·1만세운동은 규모는 작았지만 아주 커다란 울림을 남겼다. 1920년대 이후 칠곡 지역에서 전개된 농민운동과 청년운동, 여성운동 등 민족 해방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무엇보다도 청년운동의 경우는 보다 더 활발히 이루어졌다. 3·1운동 직후 전국 각지에서 지식인과 지역 유지들이 주도하는 청년(회) 단체가 동시다발적으로 만들어져 봉건 질서 타파와 근대 계몽을 전망하는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특히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이 발달하지 못한 지역에선 청년운동이 농민·노동자와 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주도해 나가기도 했다.

글=김진규<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사진=영남일보 DB
공동기획 : 칠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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