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성석제 영주선비를 이야기하다 .3] 압각수는 그때 그일을 알고 있었다

  • 손동욱
  • |
  • 입력 2014-09-17   |  발행일 2014-09-17 제13면   |  수정 2014-09-17
-충절의 상징 순흥과 정축지변
나무에 가지와 잎이 돋아나자 순흥부가 226년만에 부활했다
20140917
순흥에 몰아닥친 피의 역사를 지켜 본 은행나무. 정축지변으로 순흥이 혁파되자 죽은 듯 생명이 멈추었다가, 200여년 후 순흥이 회복되면서 되살아난 나무로 유명하다.
20140917
주세붕이 순흥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쓴 ‘경(敬)’ 자.


#1. “순흥이 망하면 은행나무는 죽을 것이다”

남순북송(南順北宋), 남쪽에는 순흥이 있고 북쪽에는 개성이 있다고 할 정도로 학문과 문화가 번성한 순흥 땅에서 나무는 600여 년 풍상을 겪어왔다. 왕조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고 나무가 서 있는 곳의 지명이 흥주에서 순흥부로 바뀌어도 나무는 한자리를 지켰다. 나무 북쪽에 있는 향교로 가는 선비들을 비롯해 마을의 사람들은 나무 아래로 지날 때마다 나무를 우러러보며 아름답고 의연함을 칭송했다. 나무 또한 사람들을 좋아했다.

나무가 서 있던 곳은 죽계계곡이 급한 걸음을 서서히 멈추고 넓고 넉넉한 들로 들어가기 직전에 있는 호젓한 자리였다. 어느날 나무 앞으로 생소한 사람들이 무리지어 지나갔다. 창검을 든 군사와 관복을 입은 금부도사 등 여러 사람에게 에워싸여 걷고 있는 사람이 가장 귀해 보였다. 그는 나무 건너편에 있는 우물처럼 생긴 집에 갇혔다.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가 집 주변에 둘러지고 다른 사람들과의 내왕이 끊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무는 밤이면 몇몇 사람이 은밀하게 그곳에 드나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사계절이 지나 다시 여름이 되었다. 한양에서 말을 타고온 관리와 창칼을 든 군사들이 급박하게 들이닥쳤다. 그들은 가시나무 울타리 속에 살고 있던 사람을 붙잡아 묶고 가족 역시 붙잡았다. 그 사람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사람을 잡아다 고문하고 처단했다. 무고한 백성들마저 끌려갔다. 그들이 흘린 피로 죽계의 계곡물이 붉게 물들 정도였다.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들의 길고 가녀린 울음소리에 나무는 몸을 떨었다.

집은 무너지고 불에 탔다. 나무 남쪽에 있는 유서 깊은 절 숙수사마저 불에 타버렸다. 심지어 나무에도 불붙은 장작이 날아들었다. 근처에 서 있는 게 무슨 죄란 말인가. 나무는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숨결만 남기고 스스로 죽은 몸이 되어갔다.

언젠가 나무 아래를 지나가던 술사가 이런 말을 남겼다. “순흥이 망하면 저 큰 은행나무도 죽을 것이고 순흥이 회복되면 저 나무도 살아날 것이다.” 가운데 줄기가 불에 시커멓게 그을린 나무는 정말 죽은 것처럼 보였다.


#2. 순흥의 참화…생명 활동을 멈춘 나무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상왕 자리로 밀어내고 임금이 된 지 두 해 만인 병자년(1456)에 선왕에 충성하는 사육신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거대한 형옥이 일어났다. 수양대군의 동생이자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은 이때 귀양지가 경기도 광주에서 외할머니의 고향이던 순흥으로 옮겨지고 위리안치(圍籬安置)에 처해졌다. 순흥부사는 이보흠으로 단종의 아버지이자 세종의 첫째 아들인 선왕 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수양대군에 맞서다 사사된 금성대군의 셋째 형 안평대군과도 절친한 사이였다.

금성대군은 이보흠을 설득했다.

“순흥에서 하루 이틀이면 닿을 수 있는 소백산 너머 영월에 상왕이 억울하게 유폐되어 계시오. 멀고 가까운 고을에 격문을 돌리고 안동으로 가면 내 집안과 연고가 있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2천~3천명의 군사는 쉽게 얻을 수 있소. 그 군사를 호령하여 각 고을에 짓쳐 들어가면 누가 감히 우리 말을 듣지 않겠소. 상왕을 순흥으로 옮겨 모시고 조령과 죽령을 막아서 도성과의 연결을 끊은 뒤 힘을 비축하여 장차 수양의 정권을 타도합시다.”

이에 이보흠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금성대군과 거사 계획을 세워 나갔다. 이때 거사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사람은 순흥부의 명문이던 순흥안씨를 비롯한 충절을 숭상하는 선비들, 순흥부 소속의 품관, 군졸, 향리 등 최소한 20여명이었다.

당시 조선의 민심은 조카를 쫓아내고 임금 자리를 차지한 수양대군을 비난하고 단종을 동정하기는 했지만 보신을 위해 침묵하는 분위기였다. 조정에서는 ‘유언비어를 단속한다’는 핑계로 자신들에 반대하는 세력을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대낮에 태백성(금성)이 출현하고 흰 무지개가 해를 뚫는 것 같은 천재지변도 집권층의 부덕한 처사를 하늘이 힐난하는 듯 거사를 도모하는 측의 힘을 돋우었다.

정축년(1457) 6월, 마침내 거사를 포고하는 격문이 완성됐다. 그런데 그 격문이 사람들의 손에 전해지기도 전에 관노로 있던 이동이 금성대군의 시녀를 통해 이를 훔쳐냈다. 이 말을 들은 풍기군수는 파발마를 세 번씩이나 바꿔 타가며 도성으로 가던 이동을 추적한 끝에 격문을 가로챘다. 그는 그 문서를 근거로 조정에 역모를 고변함으로써 자신의 공을 최대한 키웠다. ‘정축지변(丁丑之變)’의 시작이었다.

격문이 입수되자 조정에서는 즉각 진압할 관리를 파견하고 인근 고을의 나졸과 군사를 모아 금성대군을 체포하게 했다. 거사 가담자들을 쇠사슬로 묶고 극심한 고문을 가해 연루자를 캐내느라 한 달 넘게 순흥에서는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정축지변 당시의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역사의 기록은 어차피 승자의 것이므로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기술되어 있게 마련이다. 어렵게 민간에 전해진 기록에 의하면 당시 순흥의 65개의 크고 작은 집안, 최소한 300여명의 사람이 역모와 관련된 혐의로 죽었다. 그들이 흘린 피가 죽계를 타고 하류까지 흘러가서 멈춘 곳에 ‘피끝리’라는 지명이 생겨나기도 했다. 특히 순흥안씨 집안이 치명적인 참화를 입었다.

순흥은 관아와 창고, 관련 시설이 불태워지고 터전마저 파여 나갔다. 순흥부는 혁파되어 토지와 백성은 풍기군 등으로 나눠졌다. 한때 번화하던 순흥은 불과 한두 달 사이에 인적이 끊어진 적막강산으로 변해갔다.

결국 금성대군은 이 사건으로 사사되고 영월의 단종 임금 역시 죽임을 당했다. 이보흠은 유배 끝에 의금부도사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죽령을 넘어온 진압군에 의해 졸지에 부모를 잃었거나 부모가 죽음 직전 도피시킨 아이들을 이웃이며 친척들이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하며 몰래 키웠다. 나무는 죽은 듯 반응이 없었다.


#3. 200여년 만에 되살아난 나무

그로부터 90여년 뒤, 풍기군수로 주세붕이 부임해왔다. 그는 1542년(중종 37), 정축지변에 불타 버린 숙수사가 있던 옛 자리에 백운동서원을 설립했다.

주세붕은 백운동서원 부근에서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꼈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비오는 날마다 원혼의 울음소리가 잦아졌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피끝리와 청다리 주변은 더욱 심했다. 그대로 방치하기에는 사람들이 너무 불안해하고 서원의 선비들이 공부에 집중하는 데도 지장이 많았다.

주세붕은 목욕재계하고 정신을 집중한 뒤 정성을 다해 글씨를 썼다. 안향이 이 땅에 도입한 성리학이 가장 큰 실천적 가치로 삼는 개념인 ‘경(敬)’, 그 한 글자였다. 성리학의 핵심개념인 ‘거경궁리(居敬窮理)’에서 ‘경’은 평소의 생활, 마음가짐, 태도의 기본이었다. 주세붕은 그 글자를 죽계의 바위에 새기게 하고 그 위에 붉은색을 칠하여 원혼들을 위로하려 했다. 글자의 빛깔이 흐려질 때마다 새로 칠하게 했다.

순흥부가 혁파된 지 200년 가까이 흐른 1643년(인조 21년) 어느날, 다시 나무에 생기가 돌아 껍질이 생기고 가지와 잎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1682년(숙종 8년)에는 나뭇가지가 무성해진 것이 되살아난 게 분명했다. 한 해 뒤인 83년, 드디어 혁파되었던 순흥부가 226년 만에 다시 생겼다.

1719년(숙종 45) 단소를 설치하고 42년(영조 18)에는 왕의 재가를 얻어 나무가 바라다 보이는 동쪽에 금성대군 신단이 세워졌다. 신단은 금성대군과 이보흠, 이들과 뜻을 같이 한 순흥의 충절 의사를 모시고 봄가을에 제향을 드리기 시작했다. 인근에 있는 소수서원에는 수많은 학생이 들어왔고 향교도 새로 만들어져 예전처럼 선비와 백성이 나무 아래를 자주 지나가게 되었다. 그들은 나무 아래를 지날 때마다 충과 의를 알아보는 나무라고 찬탄을 하곤 했다.

나무는 지금도 살아 있다. 하지만 나무는 그냥 서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이 사는 마을에 서 있는 나무는 인간사의 희비극에 감응하여 번성하기도 하고 시들기도 한다. 스스로의 몸에 세세연년의 풍흉과 재변, 격변을 기록한다. 순흥의 거대한 압각수(鴨脚樹 : 은행나무의 원산지 중국에서는 은행나무의 잎이 오리발을 닮았다 해서 이렇게 표현한다)는 천년을 훌쩍 넘는 세월과 인간세의 무상함을 제 몸에 새겨놓은 채 사람들의 마을과 삶을 굽어 살피고 있다.

글=성석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20140917
영주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금성대군 신단.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화를 당한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그리고 순흥 의 선비와 백성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설치한 신단이다.



이야기따라 그곳&

금성대군 유배된 충절의 고장
‘정축지변’ 참화 흔적 곳곳에

순흥은 영주의 옛 지명이다. 수양대군(세조)의 동생이자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이 수양의 왕위찬탈의 부당함을 지적하다 유배된 곳이 바로 순흥이다. 이곳에서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순흥의 선비들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했다. 하지만 거사를 준비하던 중 발각돼 수많은 순흥 선비들과 함께 화를 당하고 말았다.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 일컫는다. 순흥은 이후 무려 220여년 동안 역적의 고을로 낙인찍혀야 했다. 이 때문에 순흥을 충절의 고장이라고 부른다.

순흥 선비들이 참화를 당한 역사의 현장은 아직도 영주 곳곳에 오롯히 남아있다.

금성대군과 이보흠, 그리고 순흥의 선비와 백성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설치한 ‘영주 금성대군 신단(榮州 錦城大君 神壇)’은 현재 순흥면 내죽리에 있다. 1719년(숙종 45), 당시 순흥부사 이명희가 유허지에 단소를 설치하고, 이후 42년(영조 18) 경상감사 심성희가 단소를 정비해 신단을 세웠다. 사적 제491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성대군이 감금되었던 위리안치지(圍籬安置地)도 신단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위리안치는 울타리를 두르고 가둔다는 뜻이다. 금성대군 위리안치지는 사람 키의 한 배 반쯤되는 우물 형태의 구덩이를 파고, 구덩이 바깥을 돌담으로 쌓아 올린 형태다. 주위를 완전히 봉쇄하기 위해 가시가 억세고 빽빽한 탱자나무 울타리를 둘러 ‘3중 감옥’처럼 만들었다.

참화의 역사를 지켜본 은행나무 압각수는 금성대군 신단 바로 옆에 서있다. 수령이 무려 1천100여년이 된 나무라고 한다. 순흥을 스쳐 지나간 피의 역사를 지켜 본 나무다. 200년 넘게 죽은 듯 생명이 끊어졌다가 다시 살아난 나무로 유명하다. 나무는 정축지변 당시 죽은 것처럼 생명활동을 멈추었다가 200여년이 지난후 새 잎을 피웠다. 1682년에는 나뭇가지가 무성해져 옛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듬해인 1683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단종이 복위되고, 순흥은 잃었던 ‘순흥도호부’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순흥이 망하면 저 큰 은행나무도 죽을 것이고 순흥이 회복되면 저 나무도 살아날 것이다” 라는 술사의 예언이 현실이 된 셈이다. 주세붕이 정축지변 당시 화를 당한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 쓴 붉은 색의 ‘경(敬)’ 자는 소수서원 앞 죽계천변 바위에 새겨져 있다.
공동기획 : 영주시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