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의 세계] 대구 수제화골목 제화공(製靴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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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2-19   |  발행일 2014-12-19 제36면   |  수정 2015-01-30
천번의 손길 하나의 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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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닝만켈의 소설 ‘이탈리아 구두’에는 구두 가게 점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루 종일 손님들 발만 쳐다보는 하찮은 일상에 신물이 날 지경이던 그녀는 어느 날, 이탈리아로 가서 유명한 구두 장인을 만난 뒤 이렇게 고백했다.

“그는 발을 다양한 인물과 비교하기를 좋아했어. 어떤 오페라 여자 가수의 발은 음흉했어. 구두를 가볍게 생각하고 존경하지도 않았는데, 가수 이름은 잊어버렸어. 또 어떤 헝가리 금융가의 발은 구두를 아주 섬세하게 대했대. 나이 많은 그 장인에게서 나는 마치 예술에 대해 공부하듯 구두를 배웠어. 그 뒤로는 구두를 판매하는 게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어.”

대구 중구 대안동 수제화골목에도 그런 장인이 여럿 있다. 길을 걷다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물어봐도 이 골목에선 최하 경력이 30년이다. 자, 이제 그들을 만나보자. 그러고 나면 당신도 구두를 신는 일이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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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동 수제화골목. 1970년대부터 형성된 이 골목에는 최하 30년 이상의 수제화 장인들이 모여있다. 30년의 경력에도 불구하고 이 골목의 막내인 김한석 사장은 수선 전문가로 소문난 수제화 기술자다.

 

헌 구두도 새 구두로 만들어주는 수선전문점 ‘대호제화’

제화골목의 막둥이 김한석 사장 “발냄새는 차라리 괜찮지요…본드 냄새만 30년 맡았어요”

“와, 냄새가 진짜 독하네요.”

나도 모르게 고개가 밖으로 돌아가는데, 정작 구두를 쥐고 앉은 ‘대호제화’의 김한석 사장(경력 30년)은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혹시 발냄새냐고? 차라리 발 냄새가 백배는 낫겠다!

“밑창을 갈려면 구두 안을 이렇게 불로 지져야 해요. 그래야 밑창에 박힌 못을 뺄 수 있거든. 그래도 이건 괜찮은 편이에요. 본드 냄새가 더하지. 본드 냄새만 근 30년을 맡고 살았는데, 이런 거야 뭐.”

30년. 가게에 들어온 지 30분도 채 안됐는데 벌써 머리가 어질어질한 나로선 가늠이 되지 않는 햇수다. 그런데 이 수제화골목에선 그가 막둥이라고 했다.

“아이고, 마침 오셨네! 이분이 한 45년쯤 하셨을 거야. 형님, 말 좀 해주이소.”

아침 8시30분. 출근해서 난롯불 피워놓고 잠시 몸을 데우러 왔다는 이웃 가게 이영래 사장(경력 45년)은 연륜만큼이나 쌓인 얘기도 많다.

“70년대만 해도 여기가 완전히 끗발 날렸지. 회사에 취직도 잠깐 했는데 때려치우고 다시 이 골목으로 왔어. 벌이가 여기가 훨씬 나았으니까.”

당시만 해도 일주일 일하면 공무원 한 달 월급을 벌었다. 그래서 어디 가서 수제화 한다고 하면 아가씨들이 시집오겠다고 그렇게 야단이었단다.

“특히 대구 수제화는 유명했거든. 그때는 서울로 스카우트 돼 갔던 사람도 참 많았는데…. 거기 그 사장도 한 20년 서울생활 하지 않았나? 그 집에 가봐요. 그 양반이 정통이라.”

1990년대 이전까지는 빈 점포를 찾기 힘들 만큼 전성기를 누렸던 대안동 수제화골목. 그랬던 이 골목이 중국산 저가 구두와 국내외 브랜드 구두가 보급되면서 서서히 사람들 기억속에서 잊혀갔다. 그리고 그가 다시 돌아왔다.

대안동 수제화골목. 1970년대부터 형성된 이 골목에는 최하 30년 이상의 수제화 장인들이 모여있다. 30년의 경력에도 불구하고 이 골목의 막내인 김한석 사장은 수선 전문가로 소문난 수제화 기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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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수제화가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시절 서울업체로 스카우트 돼 갔다가 6년 전 다시 대안동 수제화골목으로 돌아온 이교학 장인. 100% 전 공정을 손수 작업하는 정통 수제화를 만들고 있다.

 

전 공정 손수 하는 정통 수제화 전문점 ‘리샹스 구두 명품샵’

“구두 바닥 중창이 5겹이라 오래 걸어도 편해…장인은 최고 품질의 양가죽을‘내피’로 쓴다”

“한 6년 됐어요, 여기로 돌아온 지. 이제는 대구에서 이런 신발을 만드는 기술자가 없으니까. 젊은 친구들에게 기술 전수도 해야겠다 싶고….”

구두제작소와 매장을 겸하고 있는 이교학 수제화 장인(경력 46년)의 가게에는 마흔 켤레 정도의 구두가 놓여있다. 그런데 ‘정통’ 수제화는커녕 ‘보통’ 수제화도 신어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대체 어떤 부분이 ‘정통’ 수제화인지 알 길이 없다. 보물찾기라도 하듯이 발등이며 구두코를 유심히 바라보자, 그는 갑자기 구두를 홱 뒤집어 보인다.

‘그래, 저거구나!’구두 밑창의 가장자리를 따라 하나하나 손수 박아넣은 정갈한 못 자국이 마치 무늬처럼 남아있다. 역시 정통답게 바닥까지 예쁘다. 그런데 정작 찾아내야 할 보물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바닥에 중창이 5겹으로 들어가 있거든요. 먼저 완화장치가 있고, 틀어짐을 방지하는 중창이 있고, 그다음에 코르크가 있고…. 이렇게 해야 오래 걸어도 발이 편해요.”

그렇다! 구두의 진가는 눈으로 보이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마치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하게 있자, 이번에는 구두 속을 뒤집어 보인다.

“이 내피가 보통 신발 한 켤레 값입니다.”

흔히 ‘리얼 가죽’을 내세우는 기성구두가 ‘외피’로 사용하는 양가죽이다. 장인은 최고 품질의 양가죽을 구두의 ‘내피’로 쓴다고 했다.

“신으면 촉감이 다르거든요.”

그러자 남자구두인데도 불구하고 여자인 나도 슬며시 발을 넣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보기 좋은 예쁜 구두가 아니라 그야말로 신어보고 싶은 구두! 대체 이 구두 한 켤레를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 걸까?

“한 이틀? 한 켤레 만드는 데 못해도 꼬박 이틀은 걸리죠.”

한 켤레에 이틀이면, 한 달을 꼬박 일해도 15켤레 만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돈 벌려면 이런 구두 만지면 안돼요. 이건 인건비 빼기도 쉽지가 않거든. 그렇다고 내 성에 안 차는 구두를 만들 수도 없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 ‘그래서 굉장히 비싸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 예상은 ‘반갑게’ 빗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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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공동판매장 ‘편아지오’를 개점한 우종필 대표. 얼마 전부터는 아들 동완씨가 합류하면서 대안동 수제화골목에 3대를 이어가는 수제화 장인 집안이 탄생했다.

 

3대가 이어가는 수제화골목 수제화 공동판매장 ‘편아지오’

“보통 10만원대, 조금 고급이다 싶으면 20만원 정도…서울은 물론 해외에서도 주문 들어와요”

“흔히들 수제화라고 하면 비싸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가게의 수제화는 보통이 10만원대, 조금 고급이다 싶으면 20만원 정도 하거든요. 그러니까 한번 신어본 고객은 또 오고, 또 오고 하는 것 같아요.”

이 매장에는 적어도 100켤레 넘는 구두가 놓여있다. 지난해 5월, 대안동 수제화골목의 활성화를 위해 야심차게 문을 연 공동판매장 ‘편아지오’. 우종필 대표(경력 37년·대구수제화협회장)는 요즘 이곳을 찾는 도매상만 해도 30군데 넘는다고 했다. 골목 안의 공방과 협력해서 생산하다 보니 한달에 1천500켤레 가까운 주문량을 맞출 수도 있게 됐다.

“아버지에게 이 가게를 물려받았는데, 이제 내 세대에서 수제화 가업도 끝나는구나, 낙심했던 시절도 있었죠. 그런데 이제 이 골목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할 것 같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우리 아들도 공장에서 수제화 기술을 배우고 있거든요. 기성제품이 구두에 발을 맞춰 신어야 한다면 우리는 각자의 발에 구두를 맞춰주는데, 이보다 더 좋은 구두가 어디 있겠습니까?”

서울이나 타지역은 물론이고 최근엔 해외에서도 주문 요청이 들어온다면서 그가 웃었다.

현대적인 감각에 뒤처지지 않도록 열심히 아들과 머리를 맞대고 디자인 공부도 하고, 골목에 젊은 사람이 들어올 수 있도록 수제화 교육과정도 개설했다. 이런 노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것 하나는 확실해 보인다. 세월의 변화에 따라 부침을 겪었던 대안동 수제화골목에 또 다른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수제화 한 켤레를 완성하려면 수백 번, 많게는 천 번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한다. 내 손 험해지는 줄 모르고 누군가의 편안한 발걸음을 생각하는 業. 골목을 돌아나오면서 가만히 신발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내 발을 감싸고 있는 누군가의 손길을 생각해 보는 곳, 이곳은 대안동 수제화골목이다.

인터넷뉴스팀기자 ynnews@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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