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경북여성 .9·<끝>] 인재육성 위해 전 재산을 내놓은 베풂의 여신 최송설당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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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2-22   |  발행일 2014-12-22 제22면   |  수정 2014-12-22
日총독부인과 단독면담 “고등교육 가로막으면 기부도 취소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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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고에 세워져 있는 최송설당의 동상.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보모였던 최송설당은 일제강점기 인재 양성을 위해 전 재산을 기부하고 1931년 김천고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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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고에 있는 송설역사관에서는 최송설당의 일대기를 비롯해 김천고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영친왕 보모였던 여인, 육영사업에 나서다

“이번에는 또 왜 학교 설립이 안 된다는 건가. 도시 속 시원히 이유라도 좀 압시다.”

최송설당(崔松雪堂)은 서울 무교동 자신의 집 ‘송설당’ 대청의 다탁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김천에서 기차를 타고 막 도착한 이한기는 주위를 의식한 듯 작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해 스님이나 이인 변호사도 그리 말씀하시고…. 결국 조선의 인재를 양성하는 고등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걸 총독부가 좋아할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최송설당은 다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해도 너무 하는 게 아닌가. 하나를 넘어가면 하나가 또 문제이고. 애초에 나는 김천고보가 아니라 고아원이나 유치원을 세웠으면 했소. 만해 스님 같은 분들이 나 개인의 극락왕생을 위해 사찰에 전 재산을 기부하느니 의미 깊은 육영사업을 하라고 말씀하시고, 내 고향 김천의 여러 유지들이 김천고보를 설립하기에는 자기네 역량으로는 부족하다고 거듭 찾아와 읍소를 하기에 내가 나선 것뿐이잖은가. 나는 나이든 아녀자에 불과합니다. 무슨 거창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오. 내 아들, 내 손자 같은 아이들이 제대로 된 학교에서 많은 돈 들이지 않고 제대로 공부를 하게 하려는 것뿐이오. 그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김천 같은 작은 도시에서 무슨 인문계 고보를 설립하려 하느냐, 상고나 농고 같은 실업계 학교나 만들라는 겝니다. 김천에 인문계 고보가 생기면 선례가 되어 전국에 같은 식으로 인문계 고보 설립 열풍이 불까봐 그러는 것 같습니다. 사이토 총독이라도 직접 만나 부탁하지 않고서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모르오. 내가 어릴 적 보모로 보살펴 드렸던 황태자 전하를 볼모로 끌고 간 왜놈의 고관 따위는 만나고도 싶지 않소.”

이한기는 한숨을 토해냈다.

“선생님. 시골에 있는 저희에게는 뜻이 있을 뿐 수단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최송설당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온갖 험한 꼴을 다 보고 못 견딜 일 참으며 재산을 모았지만, 김천고보 설립에 기부한 땅과 은행예금 30만원은 깨끗한 돈이오. 내 어머니가 유언으로 말씀하시기를 아이들 교육에는 깨끗한 재산을 쓰라 하셨기 때문이오. 이제 내게 남은 거라고는 내 늙은 한 몸뚱이 남의 손 빌리지 않고 살아갈 터전뿐이라오. 하지만 기왕 일이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끝장을 보는 수밖에. 사이토 총독은 꼴도 보기 싫지만 그 부인 하루코는 안면이 있어요. 그 여자가 요즘 어디에 잘 다니던가. 미쓰코시 백화점이 개관했다던데.”

최송설당은 방안에 있는 줄을 당겨 사람을 불렀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정보망에 사이토 하루코의 움직임은 금방 포착이 됐다. 최송설당은 우연히 만난 것처럼 사이토 하루코가 가는 찻집, 화랑마다 나타나 그녀의 관심을 끌었다. 여든에 가까운 나이에도 강건한 정신력과 여장부다운 추진력을 가진 최송설당은 누구에게도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보모였다는 사실이 전설적인 후광을 드리웠다. 총독 부인과의 면담에서 최송설당은 “나는 고향의 우리 학생들에게 고등 교육을 시켜 대학에도 보내고 싶다. 부득이 안 된다면 기부를 취소하겠다”며 강경한 입장을 피력하면서도 만면에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남은 집까지 팔아 공사비로

최송설당 특유의 인화적이고 부드러운 수완은 먹혀들었다. 총독부에서는 고등보통학교 규정 일부를 개정하기까지 하면서 인문계 고보에 실업과목을 첨가하는 조건으로 김천고보 설립 허가를 내주었다. 그러나 문제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큰일났습니다.”

이한기가 사색이 되어 정걸재(貞傑齋) 마당으로 뛰어들었다.

“나라에 의해 역적이 된 집안 조상도 되살려본 나일세. 여기서 더 무슨 큰일이 난단 말인가.”

재실 앞에서 합장을 마치고 돌아선 최송설당은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이한기는 조바심을 내며 이야기를 끌어갔다.

“건물 신축 공사대금 2만여원이 부족합니다. 미국의 공황 때문에 쌀값이 폭락해서 우리가 김천고보에 출연한 땅에서 나오는 소출이 줄어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설립기금을 허무는 수밖에는….”

최송설당은 까끌한 소나무 잎을 훑던 손을 멈췄다.

“학교 설립기금의 본원은 절대 건드리면 안 되오. 그건 자손만대에 이어갈 교육의 자산이오. 또다시 내가 나서야 하나. 공수래공수거라더니 결국 그렇게 되는구먼.”

문득 최송설당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1855년 고향 김천에서 서당 훈장인 아버지의 맏딸로 태어나 순헌황귀비 엄씨(엄귀비)의 후원으로 영친왕의 보모가 되고 홍경래의 난으로 멸문의 화를 당한 집안을 고종 임금에게 신원(伸)해 되살리고 고종이 퇴위 당하고 영친왕이 볼모로 일본으로 끌려간 후 무교동의 사가를 지어서 나온 일과 선조의 재실과 자신의 가묘(假墓)까지 포함된 생애 마지막 거처 정걸재를 지은 일까지 한꺼번에 떠올렸다. 노도처럼 분탕질치는 시대에 어떤 사람도 혼자서 만들기 힘든,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아왔다. 김천고보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느냐고 시험하는 듯했다.

“무교동의 집을 팔겠소.”

금싸라기 땅인 무교동 55칸 집을 팔아서 모자라던 공사비를 채운 뒤인 1931년 2월5일, 최송설당의 이름을 딴 재단법인 송설학원(松雪學園)이 설립됐다. 5월9일, 김천고등보통학교(오늘날의 김천중고등학교)가 개교하여 첫 입학생을 받았다. 정원의 50%를 더 받아 더 많은 학생들에게 교육 기회를 주었다. 교사에게는 서울의 고보 교사 월급의 두 배를 지급했다. 김천고보에는 각지에서 출중한 학생이 밀려왔고, 순식간에 사학의 명문으로 발돋움했다.

마지막 가는 길 5㎞ 운구행렬

최송설당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워 시문에 조예가 있었고 문집 세 권을 남기기도 했다. 최송설당은 무교동의 집을 짓고 난 뒤 손수 쓴 ‘송설당서(松雪堂序)’라는 글에서 “삼동에도 타고난 성품을 더럽히지 않는 자, 사물 가운데 눈 속의 소나무(雪中松)가 있는 고로 외람됨을 무릅쓰고 이를 호로 삼는다”며 ‘송설당’이 스스로가 지은 호임을 밝혔다. 고종이 최송설당에게 호를 하사했다는 설이 있기도 하지만 어떻든 ‘고난에 굴하지 않는 겨울의 소나무 기상’을 그녀가 닮으려 한 게 분명하다.

1935년 11월30일, 개교 기념식과 신축교사 낙성식, 설립자 동상 제막식 등 세 가지 행사가 차례로 거행되었다. 김천고보 운동장에는 교직원과 학생, 하객 700여명 등 1천여명이 운집했다. 경향 각지의 민족 지도자와 저명인사가 단 위에 앉았다. 그들 중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최송설당이 밝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을 세우는 것은 당시에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동상을 봉정 받은 뒤 최송설당은 답사를 통해 김천고보에 모든 재산을 털어주고 난 뒤 재단으로부터 지급받은 생활비 등을 아껴 모은 마지막 재산 3만원을 특별교실(과학관) 증설을 위해 추가로 기부하겠노라고 발표했다. 현재 가치로 30억원에 달하는 그 돈은 동상 건립비용의 대여섯 배는 될 거액이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82세였다.

만년의 최송설당은 김천고보 교정이 내려다보이는 정걸재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했다. 학생들이 찾아오기라도 하면 연당에 띄워둔 수박이며 참외를 썰어주고 돌아갈 때는 손에 꼭 캐러멜을 쥐여주곤 했다.

1939년 85세의 최송설당이 숨을 거둔 뒤 학교장으로 엄수된 장례식에서는 조가를 울리는 300여 명의 악대 뒤로 운구행렬이 5㎞ 넘게 이어졌다.

‘학교가 영원하도록 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 교육 받은 한 사람이 나라를 바로잡고 한 사람이 동양을 지배한다. 이 길을 꼭 지켜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

그것이 그의 유언이었다.

그는 오로지 베풀기 위해 이 땅에 온 사람 같았다. 그녀의 성은 최씨이고 본관은 화순, 본명은 미상이며 호는 송설당이다.

■ 글=성석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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