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스스탄 농업 법인 <주>다산 부사장 김철용씨

  • 이춘호
  • |
  • 입력 2015-01-30   |  발행일 2015-01-30 제37면   |  수정 2015-01-30
나는 키르기스스탄의 한국인 농부…“함께 가서 일할 청년 없나요?”
20150130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기업농은 언감생심. 김 부사장(앞줄 가운데)은 현지의 토질에 눈이 밝은 현지인들과 형제애를 맺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모처럼 농장 인부로 일하는 현지인과 텐산산맥을 배경으로 앉아 기념촬영을 했다. 김철용 <주> 다산 부사장 제공


너무 고운 마흔살이다. 그런 그가 2년전 키르기스스탄에서 농부가 된다. 아내와 두 딸이 있었다. 한때 성공한 정치인이 되고 싶었다. 2012년엔 대구 달서병에서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해봤다. 하지만 한때 구국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었던 정치가 골다공증에 걸렸다는 걸 알았다. 그는 정치를 더욱 객관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국내가 아니라 ‘해외농부’가 되고 싶었다. 그것도 일반인에겐 너무나 생소한 중국의 서부와 러시아 등과 맞물려 있는 키르기스스탄의 한국 농부가 되고 싶었다.

현재 <사>한키르기스친선교류협회장과 농업회사법인 <주>다산 부사장으로 있는 김철용 전 민주당 대구 달서병 지구당위원장. 그는 지난해 12월 온전한 농부가 되기 위해 위원장 자리를 내놓고 평당원이 되었다. 설 직후 가족을 모두 데리고 키르기스스탄으로 갈 작정이다. 그렇게 한 20년을 현지에서 뿌리를 내려 살고 싶어한다.

◆ 한때 정치에 야망

대구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은 순탄했다. 경원고를 나와 경북대 경제학과를 졸업한다. 학보사 기자로 있으면서 3년간 편집을 위해 영남일보 편집국의 도움을 받아 교정 및 편집일도 했다.

고교시절 가장 관심이 많은 분야는 사회문제. 분신정국 때 자살의 본질에 대해 파고든다.

사회를 제대로 알고 싶어서 경제학을 선택했다. 학보사를 통해 캠퍼스 밖 활동도 많이 했다. 당시 대학생의 마인드도 점차 민주화운동보다 출세주의로 돌아서고 있었다. 학보사 기자로 활동을 하면서 뭔가 세상이 잘못 됐다는 생각을 했다. 봉사활동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많이 지켜봤다. 시간이 가도 그들은 그 자리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믿고 점차 정당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다.

졸업을 한 뒤 군에서 IMF 외환위기를 맞는다. 대한생명에 취업했지만 일이 너무 단조로웠다. 주위에서 명퇴하는 걸 보면서 첫단추를 신중하게 끼우는 게 중요할 것 같았다. 1년6개월 만에 사직서를 낸다.

대구시 새정치국민연합 북구지구당 당직자로 들어간다. 2006년 달서구 구의원으로 출마를 한다. 낙선이었다. 박찬석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국회활동도 하게 된다. 나름 괜찮은 정치인으로 발돋움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치판이 갈수록 생산적이지 않았다. 당초에는 정치가 세상을 확 바꿀 수 있는 절대적 파워를 갖고 있다고 믿었는데 막상 당직자로 활동하니 정치의 권위적인 면도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은 변하는데 정치는 구태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패배적 선거운동이 지속되었다.

국정감사 등을 통해 평소 알던 세상 밖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절감하게 된다.

당시는 미혼이었다. 국회에서 정치 관련 일은 하고 있지만 묵묵하게 내 삶의 스펙을 생산적으로 축적한다기보다는 그냥 자신이 뭔가에 소모된다는 갑갑함을 느낀다.


20150130
농한기를 이용해 잠시 귀국한 김 부사장이 인터뷰 직후 영남일보 사옥 옆 쉼터에서 포즈를 취했다.



한키르기스친선교류협회
사무국장으로 인연 맺어
2008년 첫 방문 이후
양국 농업교류 추진
2년전 직접 농사짓자결심
초기 투자금 3억원으로
농장 99만㎡ 3년간 임차
다양한 작물 가능성 점검
첫술에 배부르랴?
20년간은 농사지을 생각



◆ 돌파구였던 키르기스스탄

어느 날 키르기스스탄이 눈에 들어왔다.

키르기스는 중앙아시아 내륙의 공화국으로 소련의 위성 공화국이었다가 91년에 독립했다. 중국,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과 마주하고 있다. 2005년까지는 혁명과 내전으로 정국불안이 이어졌다. 국토가 대부분 산이어서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로 불린다. 밀, 감자, 살구, 사과 등이 세계적인 인지도를 갖고 있다.

당시 박찬석 의원 주도로 한키르기스친선교류협회(2007년)가 창립된다. 그도 처음으로 2008년 그곳으로 간다. 농사를 꿈꾼 건 아니다. 당시에는 네이버에조차 그 나라 정보가 거의 없었다.

한국에선 보통 6시간30분 걸린다. 수도 비슈케크에 도착해 보니 일단 한국보다 10배 정도 못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한민족의 핏줄이 흐르고 있었다. 카레이스키(고려인)가 많이 있었다. 당시 한국교민도 1천여명. 대다수 선교인, 유학생, 무역하는 사람 등이었다.

그는 협회의 사무국장 자격으로 이 나라를 한국에 홍보하고 싶었다. EBS ‘세계테마기행’ 제작진을 설득했다. 현지 투자유치 일도 했다. 당시에는 중국, 몽골, 필리핀 등에 해외투자가 집중됐다. 투자 중에 가장 성공적인 부문은 단연 농업이었다.

일단 농업부 관련 주요 정부 인사를 한국으로 초청한 뒤 농촌진흥청과 농업 관련 시설을 견학하게 했다. 한국 농업관련 기관과 개인 투자자 등을 현지로 데려갔다. 한국의 모 종자회사도 현지에서 시험재배를 하게 된다.

2013년에 직접 농사를 짓자고 결심을 한다. 아내는 찬성을 했다. 그는 2008년에 결혼을 하고 2명의 딸을 두고 있었다.

그날부터 ‘김철용표 해외농업 청사진’을 작성해나갔다. 농사 짓기에 정말 좋은 기후조건이었다. 현지 정부의 지원이 여의치 않아 휴경지도 많았다. 한국의 농업력을 접목하면 두 나라가 서로 이득을 거둘 수 있다고 봤다. 경북대 농대 손재근 교수, 이정동 교수 등의 도움을 받으면서 현지농업 품목 등 그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한다.

당시만 해도 ‘해외농업’이란 게 생소했다. 외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국내 시장에서 판다고 생각하는 관계자가 많았다. 그는 그렇게 하면 타산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현지에서 생산해서 현지에서 판매했다.

◆ 초기 투자금 3억원…첫술 배부르지 않아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긁어모았다.

초기 투자금은 3억원, 농장은 99만㎡(30만평)를 3년간 임차했다. 수도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카라발타의 한 농지였다. 임차료는 한국의 10분의 1정도였다. 분기에 한번씩 현지로 들어가서 농사를 짓는다. 현재 현지 농사 전문가와 한국인 전문가 등 2명이 그가 없는 사이 농사를 도와준다. 한국에서는 알맞은 농기계 등을 조사한다.

현지에는 한국처럼 소형 첨단농기계는 별로 없었다. 첫해 첫 작물은 양파였다. 첫해는 23.1만㎡(7만평)에 양파를 심었다. 생각한 만큼 생산이 나지 않았다.

한국은 벼농사 직후 땅 놀리기 아까워 가을에 파종한다. 현지는 워낙 땅이 많고 겨울도 많이 춥고 해서 봄~가을 농사 패턴인데 한국식으로 파종했다. 일단 죽지는 않았지만 목표 생산량에 3분의 1정도로 저조했다. 현지 방식과 한국 방식을 절충해 봤다. 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멀칭재배도 해봤다. 현지에서의 시행착오였다. 그는 급할 게 없었다. 20년간 농사를 짓는다고 다짐했으니. 양파의 경우 2년간 시행착오 끝에 절충점을 조금 찾았다. 수확해서 현지인에게 팔았다. 첫해는 고생도 하고 본전 정도였다.

작년에는 대두, 감자, 콩 등을 파종해서 현지 농업 가능성을 점검해봤다. 한국 대두도 작황이 한국만큼은 아니었다. 감자는 현지 걸 사용했다. 작년은 가물어서 작황이 별로였다. 지난해의 경우 현지에는 3개월 정도 있었고 나머지는 대구 달서구 본리동 본가에 머물렀다. 한국에서 구입한 물건을 현지까지 보내려면 15일 정도 걸린다.

농번기에는 일당 1만원 정도 주고 현지 인부를 불러 오전 7시부터 10시간 정도 일을 하게 한다.

모든 게 버거웠다. 농업에 대한 포부가 없었다면 당장 집어치우고 가족 곁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역시 꿈은 절망을 막아주는 수호천사였다.

◆ 아직 정치와 농사를 병행 중

주위에서는 일단 그가 뭔가 하고 있다는 걸 부러워했다.

낯선 환경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높게 산 것이다. 솔직히 국내는 무한경쟁시스템이고 저효율 시스템, 트렌드도 너무 빨리 바뀌고 해서 향후 계속 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런데 현지는 달랐다. 다들 20년 농사계획에 상당한 호기심을 보여줬다. 같이 농사를 지어보겠다는 몇몇 투자자도 있었다.

앞으로 러시아 시장 등을 포함해 인근 몇 개 나라가 오는 5월 관세동맹을 맺는다. EU처럼 단일 경제권(2억명)이 짜인다. 그도 이걸 호기로 본다. 일부 한국교포의 경우 섬유원단, 건축, 서비스업, 한국식당, 뷰티 등의 부문에 진출하고 있다.

오는 2월24일 가족과 모두 현지로 가서 농번기를 다 보내고 올 계획이다.

그는 지금 지역의 청년 백수를 현지로 많이 데려가고 싶어한다.

그는 현지 사정에 매우 밝은 게 장점이다. 해외농은 단지 기술만 갖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본인의 인맥도 큰 도움이 됐다. 일단 키르기스스탄은 농업 자체에 면세조항이 많다. 관세도 한국보다 훨씬 적다. 고산 만년설 때문에 녹은 물이 연중 풍부하게 흐르고 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 김철용 부사장의 생각

이제 시작이다. 차츰 안정적인 작목부터 시작해서 부가가치가 높은 사과, 살구, 농산물 가공 등으로 넘어갈 것이다. 국내 수출은 관세 등 때문에 타산이 별로다. 현지에서 생산해 현지에서 파는 게 가장 경제적이다. 일단 선택은 잘했다.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농부가 됐다는 게 아주 좋은 선택이다.

중앙아시아에는 한민족의 얼이 담겨 있다. 이역만리에서 해외농사 짓는 심정은 일제강점기 민족지사가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농사를 더 잘 지으면 청년 백수를 위한 농민사관학교 같은 것도 짓고 싶다. 그 경제력을 토대로 ‘농심정치’를 구현해보고 싶은 것이다. 다들 청년실업에 대해 이런저런 걱정도 하고 대안도 내지만 실제 해결책은 거의 못 찾는 것 같다. 선거 때는 당장 효과를 위해 이런저런 공약을 내긴 하지만 당분간 청년 백수에게 봄날은 쉽게 올 것 같지 않다. 달콤한 기존 질서를 답습하다 보면 자신의 가능성이 자칫 상실될 수 있다. 이게 청년 백수의 취업만능주의가 갖고 있는 폐해가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현재 방송통신대학교 농학과에 편입을 신청해 놓은 상태이다. 올해에는 양파·밀·보리를 심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호두 군락지가 현지에 있는데 가공해서 한국에 수출할 계획이다.

현지 농심은 아직도 순진무구하다. 투기농은 말할 것도 없고 폭리를 겨냥한 농산물 사재기 문화도 거의 없다. 농산물 가격폭락도 없다. 자기만 노력하면 성공이 보장되는 곳이다. 물론 안 사용하던 근육을 사용하려면 몇 해는 죽도록 고생해야 될 것이다. 그 고생 위에서 한국의 삶을 보면 뭐가 삶의 급소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