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국건정치칼럼] 이병기와 김기춘

  • 송국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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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3-02   |  발행일 2015-03-02 제30면   |  수정 2015-03-02
20150302

전형적인 비서형 김기춘
불통의 상징으로 꼽혀
과묵한 스타일의 이병기
제2의 김기춘 될 수도
‘맞춤형’ 비서실장 돼야

필자가 이병기 신임 청와대 비서실장을 처음 만난 건 이명박-박근혜 후보가 맞붙은 2007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이 한창이던 어느 날이었다. 박 후보와 몇몇 기자가 저녁식사를 겸한 간담회를 하는 자리에 이병기 여의도연구소(현 여의도연구원) 고문이 다른 참모와 배석했다. 이병기 고문에 대한 첫인상은 ‘과묵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전형적인 참모’였다. 그는 만찬이 두 시간가량 이어지면서 술잔이 몇 순배 도는 분위기였음에도 정좌한 자세로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참석자들의 대화를 묵묵히 듣기만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말이 많고 과시하는 스타일을 싫어한다. 선친인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안에선 아첨하고 밖에 나가선 호가호위하는 인물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1993년)이란 책에서 “어수룩한 체하면서 속으론 딴 마음을 먹고, 뒤로는 음모를 꾸미고 음흉했던 사람들을 기억하게 된다”고 썼다. 또 “말도 곧잘 하고 뱃심도 꽤 있다고(주관이 있다고) 생각됐던 사람도 몇 번 가까이서 그 모습을 진실로 알고보니 보통 주책이 아니고, 말도 그렇게 헤플 수가 없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정치에 입문한 뒤에도 그런 부류를 많이 경험했다. 지금 박 대통령 곁을 오랫동안 지키는 참모 중엔 말수가 적은 사람이 많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을 그토록 신임한 것도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는 보좌 스타일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 전 실장을 “정말 보기 드물게 사심 없는 분”이라고 평가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김 전 실장은 김종필 전 총리가 ‘박 대통령을 모셔보니까 어떤 인격입디까?’라고 묻자 정색을 하며 “제가 감히 말씀드릴 수가…”라고 했다. 그동안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통령을 보좌해 왔는지 읽힌다. 그런 스타일은 박 대통령의 마음엔 들었겠지만 국민에겐 ‘불통’의 상징으로 비쳤다.

대통령 비서실장의 유형은 보좌하는 방식에 따라 ‘실세형’ ‘정무형’ ‘실무형’ ‘관리형’ ‘비서형’ 등으로 다양하게 나뉜다. 김 전 실장은 전형적인 비서형, 또는 관리형이었다. 대통령의 뜻을 받드는 데 최우선 가치를 두고 청와대 참모진을 관리했다. 이병기 신임 실장도 개인의 캐릭터만 놓고 보면 김 전 실장과 마찬가지로 비서형이나 관리형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의 전력을 감안하면 폭넓은 보좌를 할 수 있는 역량이 충분하다. 과거 이회창 캠프, 박근혜 캠프에서 지금의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유승민 원내대표와 손발을 맞춘 적이 있어 정무형이 될 수 있다. 대북정책을 오랫동안 다뤘고 주일대사를 지냈으니 얼어붙은 남북 관계, 한일 관계를 풀 실무형도 가능하다. 박 대통령이 많은 역할을 부여하면 실세형이 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하기 위해선 모든 보좌 유형을 뛰어넘어 ‘맞춤형’ 비서실장이 돼야 한다. 박 대통령의 단점으로 지적되는 문제를 보완하는 역할이 필요하다. 청와대 안에 만연한 비밀주의, 청와대와 정치권의 소통 부족, 깜깜이 인사, 대북정책·대일외교의 경색 등이 박 대통령의 단점이다. 김 전 실장처럼 비서형, 관리형에 충실해선 보완이 어렵다. ‘이병기’만의 새로운 보좌 행태를 찾아야 한다. 지금은 조용한 보좌, 그림자 보좌가 최선이 아닌 지경에 처해 있다. 막중한 자리인 국정원장 인선이 비서실장 인선에 묻혀 버린 것도 그만큼 국정운영에서 청와대의 역할이 요구되는 까닭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건 좋지만 대통령의 심기 보좌에만 충실하다간 ‘제2의 김기춘’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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