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과 책상사이] 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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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4-27 07:59  |  수정 2015-04-27 07:59  |  발행일 2015-04-27 제18면
[밥상과 책상사이] 도시락

4교시 마침종이 울리면 화닥닥 도시락을 꺼낸다. 앞뒤 책상을 서너 개 붙여 각자의 도시락을 거기 얹는다. 반찬 통을 열면 내용물은 전체적으로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같은 물김치라도 집집마다 그 맛은 천차만별이다. 각자는 도시락의 3분의 1 정도를 먼저 먹고 나서, 친구의 반찬 통에서 반찬을 조금씩 덜어내어 자기 도시락에 담는다. 그런 다음 백철 도시락 뚜껑을 닫고 일제히 그것을 흔든다. 한참 흔들고 나서 뚜껑을 열면 밥과 반찬이 골고루 섞여 있다. ‘즉석 흔들 비빔밥’은 정말 맛이 있었다.

2교시 마치고 도시락을 까먹는 녀석이 한 반에 꼭 몇 명은 있다. 이 녀석들은 점심시간마다 젓가락으로 아이들의 밥을 한 덩어리씩 떼어 자기 도시락에 담는다. 대부분 아이들은 크게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는다. 미리 한 젓가락 떼어 주는 아이도 있다. 그러나 간혹 미워서 주기 싫은 경우도 있다. 해결책은 있다. 뚜껑을 열자마자 밥에 물을 부어버리면 된다. 밥알이 다 부서져서 젓가락으로 집어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보온밥통이 나오지 않았던 시절, 조개탄 난로가 있는 교실엔 3교시 마침종이 울리면 한바탕 전쟁이 벌어진다. 도시락을 난로 위에 얹어 덥힐 때의 순서 때문이다. 어디에 도시락을 놓느냐에 따라 점심시간의 행복도가 달라진다. 맨 아래 놓으면 밥이 눌어붙어 버린다. 난로 화력이 좋은 날은 밥 타는 냄새가 천지에 진동하고, 도시락 주인은 말도 못하고 속만 태운다. 적당한 온도일 때는 밥 눋는 냄새가 너무 구수해 반 아이들의 배를 더욱 꼬르륵 거리게 했다. 도시락을 놓을 때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위치는 바닥 도시락 바로 위다. 눋지 않으면서 밥도 잘 덥혀지기 때문이다. 4층 이후에 얹으면 열이 전달되지 않아 찬밥 상태로 먹어야 할 가능성이 높다. 40대 중후반 세대는 지금까지 이야기 중 일부는 직접 경험했을 것이다.

그 시절에도 도시락은 빈부격차와 불평등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징물이었다. 한 반에 한두 명은 모든 아이가 선망하는 환상적인 계란덮밥에 김을 가지고 와서는 다른 아이에게 주지 않으려고 뚜껑으로 가리고 혼자 먹었다. 도시락을 사오지 못하는 아이들도 흔했다. 그런 아이들은 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해결하기도 했고, 친구와 밥을 나누어 먹기도 했다. 자존심 강한 일부 아이는 점심시간마다 홀로 밖에 나가 찬물로 배를 채우기도 했으리라. 그들은 그렇게 이런저런 것들을 경험하고 극복하며 성장했다.

무상급식은 보편적 복지의 구체적 성과물이고, 엄마의 부담을 덜어주고 책가방을 가볍게 해주는 순기능적 측면이 더 많다. 그러나 도시락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많은 이야깃거리를 사라지게 했다. 엄마가 싸준 도시락으로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는 날이 한 번쯤 있는 것도 괜찮다. 도시락을 사올 수 없는 아이들은 표시 안 나게 도와주면 된다. 밥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돈독하게 해주고, 사람을 사귀게 해주는 인성교육의 출발점이다. 도시락의 순기능적 측면을 살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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