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영화 ‘차이나타운’ 엄마 역 김혜수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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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5-01   |  발행일 2015-05-01 제37면   |  수정 2015-07-10
“출연 망설였던 이유?…이게 인간인가 싶을 만큼 정서적 부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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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타운’에서 김혜수는 더 이상 우리가 알던 그 김혜수가 아니다. 여성성을 배제한 하얗게 센 머리와 얼굴 가득한 주근깨, 보형물로 덩치를 키운 외모도 그렇지만, 서늘한 무표정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스산함의 기운은 기괴한 공포감마저 불러일으킬 만큼 강렬하다. 분명 한국영화에서 쉽게 마주할 수 없는 캐릭터다. 별다른 대사와 연기가 없어도 존재감만으로 모두를 압도하는 아우라를 뿜어내는 엄마 역에 “김혜수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는 한준희 감독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 건 그런 이유다. 김혜수가 맡은 엄마는 짐작하듯 모성 가득한 보통의 엄마는 아니다. 차이나타운의 지배자인 그의 말을 거역하는 사람도 없고 모두가 존칭을 쓰는, 김혜수의 말처럼 “남성도 여성도 아닌 그냥 괴물 같은 인간”이다.

 

‘차이나타운’은 그 점에서 지금껏 그녀의 영화들 중 가장 흥미로운 지점에 서 있는 영화다. 건강미, 발랄함, 섹시함 등으로 수식되는 전형적인 ‘김혜수스러움’에서 벗어나 한국형 범죄 누아르물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던 강렬한 여성 캐릭터를 만났다는 점에서다. 그런 엄마에게 유일하게 눈에 밟히는 존재는 일영(김고은)이다. 태어나자마자 지하철역 보관함에 버려진 아이를 식구로 거둬들인 엄마는 일영에게서 대물림 된 자기의 모습을 본다. 영화는 이처럼 벗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대물림 되는 운명을 살아가는 두 여자의 비정한 드라마를 그려간다. 그 과정에서 인상적인 건 클로즈업된 마스크만으로도 화면이 터질 것 같은 압도적 긴장감을 선사하는 김혜수의 존재감이다. 분명 흥미롭고 의미 있는 그녀와의 만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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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의 변신이라는 진부한 표현을 떠올릴 만큼 당신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 정도로 변신이라는 단어가 제대로 어울리는 캐릭터를 만났다. 게다가 차이나타운이라는 공간과 하고자 하는 이야기 자체가 달랐고 여성이 주체라는 점도 반가웠다. 다시 접하기 쉽지 않을 만큼 시나리오가 주는 충격은 꽤나 컸다. 정서적으로 느껴지는 잔혹함은 크고 무거웠지만, 그만큼 인상적이었다. 이런 캐릭터를 거부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시나리오를 받고 출연을 망설였던 이유는.

“정서적인 측면에서 부담감이 있었다. 엄마 캐릭터는 우리가 흔히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수위의 강렬함과는 달랐다. 처음에는 알 것 같았는데 연기로 구체화시키려니 추상적인 느낌이 드는 거다. ‘진짜 이런 사람들이 있을까, 이게 인간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될 만큼 굉장히 영화적이었다. 그런데 차츰 어딘가에는 이런 사람들이 진짜 살아가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촬영에 들어가면서 그때 시나리오를 읽고 느꼈던 기분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다. 영화적으로 완성된 어떤 강렬한 캐릭터가 아닌, 실제 어딘가에 엄마가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이라는 전제로 출발했다.”


성별·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인물
민얼굴에분장할 때
이상한 흥분감


▲녹록지 않은 캐릭터다.

“그렇다. 만약 누구라도 엄마를 봤을 때, 처음 보는 이상하고 기묘한 분위기에 사로잡혀서 아무것도 못할 것 같고, 그 사람에게 완전히 지배당할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게 좀 현실적으로 보였으면 했다. 그녀는 생존 자체가 삶의 한 방향이고 목적인 사람이다. 그런 그녀에게 여성성이 과연 존재하고 의미가 있을까. 엄마를 통해 척박한 삶을 살아낸 사람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캐릭터에 접근했다.”

▲이런 느낌을 받은 건 처음인가.

“처음이고 앞으로도 이런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있는 그대로 시나리오를 봤을 때는 굉장히 낯설고 만만치 않은 얘기지만 잘 썼다. 영화 하는 사람이 봤다면 되게 매력적으로 느꼈을 작품이다. 엄마 캐릭터도 정말 확실하다. 사실 설명 없이 확실한 캐릭터는 별로 없다. 당연히 배우 입장에선 도전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얘기다. 단지 이를 소화해 내기는 너무 어렵다. 너무 센 역할이고 담아내기도 녹록지 않은 게 사실이다. 특히 나는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정서와 맞닥뜨리는 게 너무 힘들었다. 정말 부담이란 말밖에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억눌렸다.”

▲그렇게 정서적인 부담을 견뎌낸 결과물이 나왔다. 만족하나.

“감독님이 하고자 한 얘기는 충분히 녹아있는 것 같다. 영화의 색깔도 굉장히 명료하다. 결과적으로 영화가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에는 제대로 도달한 것 같다.”

늘 고독하다
술을 마시지 못해
가끔 친구들 만나
차 마시며 이야기

 

▲이 영화를 여성영화로 분류할 수 있나.

“여성이 주체가 되니까 여성영화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성별에만 국한된 여성만의 얘기는 아니다. 인간의 얘기이자 어떻게 보면 가족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작은 조직과 사회의 얘기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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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장이 인상적이다.

“엄마의 몸으로 외모가 완전히 바뀌길 원했다. 이런 삶을 버텨낸 여자의 무너진 몸. 살은 쪘지만 건강하고 풍채 좋은 몸이 아니라 정말 무너진 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엄마라는 역할을 하면서 보스를 떠올릴 수 있는 고착화된 이미지는 애초에 다 배제했다. 피부 상태나 머리 상태가 어떤 위협적인 모습으로 비치기보다는 실제로 피폐한 삶을 사는 여자의 모습이기를 바랐다. 방치된 피부, 머리, 10년 전이나 후에 만나도 (변하지 않은) 엄마일 것 같은 느낌. 여성성을 배제했고, 보스라고 해서 어설프게 남성을 흉내 내는 것들을 견제했다. 성별의 의미가 전혀 무의미한, 그리고 실제 그녀의 나이가 몇 살인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인물이기를 바랐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잘 표현된 것 같다.”

▲분장한 얼굴을 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나.

“놀라진 않았다.(웃음) 분장한 모습도 오래 보니까 익숙해지더라. 직업이 배우니까 여러 가지 인물을 해볼 수 있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굉장히 신선했고 그것만으로 즐거웠다. 한번은 엄마의 과거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가발을 써야 하는데 그게 너무 재밌는 거다. 대머리 아저씨같이 만들어놓고 그 위에 다시 가발을 쓰는 건데 되게 좋았다. 특히 영화 촬영 전, 두세 시간가량 민얼굴에 분장을 할 때 이상한 흥분감이 밀려왔다. 또한 매캐한 냄새가 나는 세트장에 첫발을 디딜 때마다 온몸으로 전율이 느껴졌다. 이번 촬영은 여러모로 나에겐 특별한 경험이다.”

▲김고은과의 호흡은 어땠나.

“굉장히 많은 것을 갖춘 배우다. 내가 이 나이 때를 생각하면 정말 요즘에는 자의식을 가지고 많은 것을 준비하는 배우들이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특별하다. 만나서 반가웠고, 시나리오를 보면서 일영이라는 인물이 왜 김고은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동의가 있었다. 그리고 김고은이라는 배우가 어떻게 해낼지 궁금했는데 현장에서 여러 번 감동하고 굉장히 놀랐다. 많이 자극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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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영과 독특한 모녀관계 설정인데….

“엄마와 일영의 관계는 굉장히 묘하다. 어떻게 보면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일영이가 엄마 곁으로 오면서 운명의 궤도를 같이하는, 운명의 일치감이 있는 여자들이다. 어릴 때 일영의 기지를 보고 엄마는 아마 그런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워 더 하이즈’라는 것이 실제 내가 낳은 아이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후임, 내 뒷세대를 오롯이 짊어질 내 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실 굉장히 다른 듯하지만 운명적으로는 묘하게 엮여있다. 또한 모성이라는 것을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엄마도 일영과 같은 과거를 지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엄마가 그런 식으로 조직원들을 관리하고 돈을 수거하는 것은 현실적인 욕망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람이 사는 방식인 것이다. 그렇게밖에 살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고, 그런 식의 삶밖에 느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일영에게 특별한 마음, 애정 이상을 표현한다. 극 중 치도가 엄마를 향해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예요’라고 묻는다. 이는 ‘당신이 아꼈던 조직원인 것은 알겠는데 왜 이렇게까지 가해하는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 ‘엄마의 방식이라면 실수하는 순간 죽여야 했는데 왜 죽이지 않고 이 아이만은 살려두냐’는 것이다.”

▲레퍼런스로 삼은 게 있었나.

“없다. 오로지 내가 할 캐릭터만 생각한다. 그렇게 지금까지 해왔다. 물론 참고할 필요가 있는 작품도 있을 거다. 하지만 솔직히 내 캐릭터만 파고들기에도 벅찬 편이라 다른 게 개입하면 더 방해가 될 것 같았다.”

▲연기를 시작한 지 30년이 됐다. 그 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동력이 하나는 아닌 것 같고, 수시로 변하는 것 같다. 나는 배우로서의 자의식이 있기도 전에 연기를 시작했다. 영화를 포함해서 연예계에 적(籍)을 둔 어린애가 그냥 성장한 거다. 어렸고, 특별히 문화적인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창의적이고 특별한 어른들 사이에서 성장을 하는 동안 많은 영향을 받았을 거다. 그러다가 자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든 것 같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연기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배우로서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떻게 해야지 하는, 뚜렷한 목표는 지금도 없다.”

▲연기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었나.

“한 번 제대로 있었다. 내가 지금 살아가면서 연기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이 시간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꼭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렇다면 ‘내가 배우로서 마음의 준비와 기본적인 자질이 되어 있는 사람인가, 또 준비된 상태에서 이 일을 시작했나’ 하고 자문해보면 아니라는 거다. 그냥 시작을 하고,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다. 그때 아예 내가 배우로서 자질이 없는 건 아닐까를 생각했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내 인생의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하겠지. 그래서 공식적인 은퇴 없이 조용히 아웃하자고 매니저와 얘기한 적이 있다.”

▲당신에게서 고독이라는 단어가 떠올려진다. 톱스타로 정상에 서있다는 건 늘 외로움과의 싸움일 듯하다.

“아직 정상에 혼자 서 본 적이 없어서.(웃음) 정상에 있지 않더라도 매일 고독하다. 너무 고독하다. 제대로 연기를 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그렇다. 사실 배우라는 직업 자체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완성되기도 하지만 연기하는 순간에는 미치도록 고독하다. 그걸 버텨야 한다. 그게 힘들다. 물론 다른 더 힘든 분들이 많을 텐데 엄살일 수 있다. 그리고 고독한 건 늘 그랬던 것 같다.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고독하다. 고독은 결코 상대적인 건 아닌 것 같다. 어떤 장르의 영화가 됐든 인간을 제대로 다루고자 한다면 고독은 늘 배우에게 수반되는 것 같다. 어차피 인간은 생각을 하게끔 태어났는데 나는 특히 그놈의 생각 때문에 더욱 고독한 것 같다.”(웃음)

▲그럴 때는 어떻게 해소하나.

“술을 마시지 못한다. 친구들이 많지는 않지만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과 가끔 만나서 차 마시면서 얘기를 나눈다.”

▲연기는 언제까지 할 생각인가.

“누워서 생각했다. 내가 그래도 청소년기와 청춘을 이 일을 가장 많이 하면서 보냈고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는데 배우로서 나 스스로 얻고, 찾고자 하는 것이 뚜렷하지 않았고 당연히 가치 부합을 못하니까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남들이 뭐라고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 스스로 미치겠더라.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 건 그래도 이왕 시작했으니 그 의미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해서다. 스스로 의미를 찾기까지는 아마도 연기를 계속하고 있지 않을까.”(웃음)

글=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 제공=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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