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과 책상사이] 그 섬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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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6-29 08:00  |  수정 2015-06-29 08:00  |  발행일 2015-06-29 제19면
[밥상과 책상사이] 그 섬에 가고 싶다

섬은 사면이 물로 둘러싸인 육지다. 섬다운 섬은 바다 한가운데 있는 것이지만, 마을 앞을 흐르는 강에도 조그마한 섬이 있었다. 나는 친구들과 그 작은 섬으로 헤엄쳐 건너가서 여름 한나절을 신나게 놀다 오곤 했다. 그 섬은 사방에 두 길 넘는 깊이의 물이 흐르니 누구도 쉽게 다가올 수 없고,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아무도 방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곳에서는 완전한 해방감을 느꼈다.

바닷물이나 강물로 둘러싸인 땅을 섬이라 부르는데, 나는 땅으로 둘러싸인 호수도 일종의 섬이라고 생각했다. 물속에 떠 있는 섬이 야생동물과 악동들의 천국이라면, 육지의 섬인 호수는 나로 하여금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혼자 꿈꾸고 상상하게 해 주는 영혼의 해방구였다. 초·중학교 시절에는 강에 있는 섬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로는 홀로 마을 뒷산에 있는 호수를 찾는 것이 더 좋았다. 나 자신과 대화하며 끝없이 생각에 잠기곤 하던 그곳, 나는 지금도 그 섬에 가는 꿈을 꾼다.

휴일 아침, 물이 가득한 봄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새벽안개를 바라보는 것은 정말 좋았다. 여름 한낮 호숫가에 누워 뭉게구름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형상을 바라보다가 점심을 굶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깊어가는 가을에는 물비늘이 은빛으로 반짝이는 수면을 바라보며 따사로운 햇볕을 쬐는 것이 좋았다.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호수 위로 지나갈 때, 얼음이 징징대며 우는 소리는 두려움과 함께 대단한 모험을 감행한다는 스릴을 느끼게 해 주었다.

올해처럼 주기적으로 가뭄이 찾아와 못 바닥이 거북 등처럼 쩍쩍 갈라질 때면 조금 남은 물에 몰려있는 고기들이 말라 죽기 전에 비가 내리기를 간절히 기도하곤 했다. 드디어 비가 쏟아지는 날은 우산도 없이 호수로 뛰어나갔다. 친구의 참외밭 원두막에 앉아 사카린 물에 미숫가루를 타 먹으며, 저수지로 쏟아지는 장대비를 바라보는 것은 세상 어떤 구경보다 좋았다. 여러 날 비가 오고 나면 호수는 누런 흙탕물로 가득 찼다. 여름 장마철의 호수는 모든 골짜기로부터 물을 받아들였다. 흙탕물은 시간과 더불어 정화되어 가을이 오면 수정같이 맑아졌다. 그때 수로를 통해 흘러나오는 물은 장마철의 그 흙탕물이 아니었다. 그 호수만이 가지는 빛과 향을 간직하고 있었다.

젊은 날의 독서는 호수가 장마철에 물을 채우는 것과 같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여름날의 호수가 이 골짝, 저 골짝 물을 모두 받아들여 일단 자신을 가득 채우듯이, 젊은 날에는 이것저것 가리지 말고 무엇이든 많이 읽어 머리와 가슴에 다양한 내용물이 가득 넘치게 해야 한다. 세월과 더불어 그 내용물은 자기만의 색깔과 개성을 가진 삶의 지혜로 바뀌게 된다. 우리 모두에겐 완전한 해방감을 만끽하며 즐겁게 뛰놀고, 홀로 여유롭게 산책하며 조용히 사색에 잠기면서, 몸과 마음의 성장에 필요한 자양분을 스스로 만들어 내게 해 주는 작은 섬이나 호수가 필요하다. 나는 아직도 그 섬들을 가슴에 품고 산다.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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