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중국 선전시 대분 유화촌

  • 류혜숙 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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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1-06   |  발행일 2015-11-06 제38면   |  수정 2015-11-06
畵! 그림으로 만들어진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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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촌의 한가운데 제법 넓은 길이 광장으로 열려 있다. 여행객들은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아이들은 다빈치의 흉상 아래에서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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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화촌의 골목들은 전시장이자 화가들의 작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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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촌 건물의 상층은 화가들의 거주지이자 작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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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촌 한쪽에 자리한 대분미술관. 중국미술작가들의 수묵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농사로 먹고살던 변두리 작은 마을
1989년 홍콩의 화상 황강이 첫 입주
규모 확대돼 현재의 유화촌 형성
입구에는 붓을 든 커다란 손 조형물
화랑 수백 개…수천명의 화가 거주
연간 600만 점…세계유화 60% 거래
세계적인 명작의 주인도 위작 주문


도로는 차들로 포화상태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새로운 번호판을 살 수 없다고 했던가. 시에서 자동차 판매를 규제한다. 대신 4년 전 1개 노선밖에 없던 지하철이 5개 노선으로 늘었다.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빌딩들은 더욱 빼곡해졌고, 그 속에 680m의 평안(平安) 건물이 완공을 향해 하늘로 향하고 있다. 중국의 남단, 홍콩과 붙어있는 광둥성의 특구인 선전시는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크게 성장했다. 세계에서 제일 또는 중국에서 제일이라는 수식어를 몇 개나 가진 이 도시에 세계 그림시장의 60%를 점유하고 있는 거대 유화촌이 있다.

◆ 중국 제일의 그림시장, 대분 유화촌

지하를 달리던 열차가 지상으로 올라 한참을 달려서야 도착한다. 선전시 용강구 대분촌(大芬村). 도심의 빠른 확장에 따라 이미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는 선전의 변두리 지역이다. 도로는 넓고 복잡하다. 거대한 마트 앞, 복잡한 거리 난전을 뚫고 퀴퀴한 악취를 풍기는 하천 냄새를 견디며 5분쯤 걸으면 붓을 든 커다란 손 조형물이 유화촌의 입구를 알린다. 대분 유화촌, 중국어로는 따펀 리우화춘이라 한다.

걸린 것, 겹쳐 놓은 것, 쌓아 놓은 것,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림이다. 덩샤오핑도 있고, 모나리자와 나폴레옹도 있고, 마릴린 먼로도 있다. 말과 용과 새가 있고, 중국의 어느 고도와 홍콩의 거리도 있다. 고흐와 클림트, 렘브란트, 다빈치, 피카소, 모네 등 시공을 초월한 유명 화가들의 그림들도 여기저기 널려 있다. 작게는 손수건만한 것부터 크게는 열 자가 넘는 것까지, 수백만 점의 그림으로 만들어진 세상이다.

전체 4㎢ 면적 안에 5~6층 정도의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수백 개의 화랑이 밀집되어 있고 수천 명의 화가가 산다. 한 사람이 매일 같은 그림만 70장씩 그려내기도 하고, 경력별·급수별로 자신의 작품을 그리기도 한다. 판매되는 그림 중 절반은 유명 작품의 모작이고 절반은 창작물이다. 화가들은 대부분 미술학교나 미술대학 출신이라 한다.

각 상점 전속 화가들의 실력에 따라 같은 그림도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물론 가격도 그에 상응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진품을 소유한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똑같은 위작을 주문하기도 한다. 그들은 진품은 금고에 보관해 두고 위작을 걸어 둔다. 현재는 외국인들이 주거래처이고 연간 600만 장의 작품이 판매된다고 하는데, 전 세계 유화의 60%가 이곳에서 거래된다는 이야기다.

수많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분명한 격자형을 이뤄 길을 잃는 일은 없다. 골목은 통로이고 전시장이고 작업장이고 쉼터다. 화가들은 수천 번을 들여다보아 낡고 헤진 사진을 손에 쥐고 그와 완벽하게 똑같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집중한다. 한 젊은 화가가 길바닥에 캔버스를 놓고 허리를 굽혀 그림을 그린다. 텃밭의 할머니처럼 신중하고 진지하다. 이들의 집요한 열정으로 탄생한 그림들 대부분은 전 세계의 어느 호텔에, 식당에, 거실에, 화장실에 걸린다. 그리고 언제든 폐기될 수 있다. 기분이나 공간의 변화에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된다. 그림에는 대부분 서명이 없다. 이들의 열정과 전문성은 익명으로 남는다.

◆ 농사짓던 변두리의 작은 마을

유화촌 한가운데에는 제법 넓은 길이 광장을 이룬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흉상을 비롯해 몇몇 조형물이 서있다. 비교적 낮은 고전풍의 건물 몇 개가 이방인들의 시선을 끈다. 옛날 마을의 중심이 아니었을까, 몇 개의 굽은 길이 옛 골목지형의 잔재로 남아 있다. 이곳에 원래 살았던 사람은 300여 명. 오직 농사로 생계를 유지했고 연평균 수입은 200원(현재 환율로 3만8천원 정도)이 넘지 않았다 한다.

1989년 어느 날, 홍콩의 화상 황강이 임대료가 싼 곳을 찾아 이곳으로 온다. 그는 민가를 임차해 유화를 수집하고 판매하는 동시에 학생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후 많은 화가들과 규모가 큰 전문 화상들이 계속 들어와 1998년부터는 구와 진(지역단위) 그리고 정부가 힘을 합쳐 유화촌을 문화건설의 중심지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규모는 점점 확대되고 명성은 갈수록 높아져 지금의 유화촌이 형성되었다. 독특한 산업 발전을 이룬 유화촌은 2004년 국가문화산업 시범지라는 칭호를 받았다. 예술이라는 이상과는 단절되어 있지만, 예술과 기술과 사회 간의 관계가 경제적 수치로 증명되는 힘은 설득력이 강하다.

건물의 1~2층은 보통 그림을 전시 판매하는 곳이고, 그 이상은 화가들의 거주지이자 작업장이다. 원래 마을의 주민들도 살고 있고 유화촌 관련 업종의 사람들도 살고 있다. 그들의 아이들을 포함해 지금은 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일종의 연대, 전문화는 질서를 구성한다. 특히 거주와 생산이라는 기능이 혼합된 가난한 노동자들의 공동체는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선전은 강과 호수가 많아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해안가의 항구도시라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남송시대에 무역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명·청 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한다. 그러나 그리 비중 있는 주목을 받는 도시는 아니었고, 근래까지도 홍콩과 마카오를 출입하며 주로 농산물을 거래하는 국경의 거점 도시였다. 지금 선전은 물리적, 지리적, 개념적으로 이미 메트로폴리스다. 고대 그리스에서 메트로폴리스는 아테네의 가난한 사람들이 거주하던 곳이었고, 개인의 고향을 의미하기도 했다. 또한 번창하는 무역 교역소를 의미하기도 했다. 선전은 그 모든 의미를 아우르는 메트로폴리스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선전과 홍콩은 한 시간 거리. 기차, 밴, 버스 등으로 쉽게 들어올 수 있고 즉석 비자도 발급받을 수 있어 보통 홍콩과 연계해 들어온다. 선전으로 가는 직항도 있다. 홍콩에서 올 경우 선전 관문인 로후역에서 택시를 타면 요금 50원 안팎으로 데려다준다. 지하철을 이용할 경우 3호선 롱강 방향 대분역에서 내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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