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흥의 음악칼럼] 헨델 작사·작곡, 정세훈 노래 ‘울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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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7-22   |  발행일 2016-07-22 제40면   |  수정 2016-07-22
다시 우리의 아이들을 거세시키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전태흥의 음악칼럼] 헨델 작사·작곡, 정세훈 노래 ‘울게 하소서’
[전태흥의 음악칼럼] 헨델 작사·작곡, 정세훈 노래 ‘울게 하소서’

이 나라 교육부의 정책기획관이라는 사람이 모 신문의 기자들에게 “민중은 개, 돼지”라고 말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누리꾼들은 그 말씀(?)을 두고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개, 돼지를 키우는 우리냐”라고 분노했다. 그토록 자신 있게 말했던 그는 뒤늦게 “과음과 과로가 겹쳐 한 실언”이라고 사과 아닌 사과를 했다고 한다.

“개, 돼지보다 못한 놈”이라는 세간의 욕은 개나 돼지는 그래도 밥을 주는 주인을 알아보지만, 주인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인간을 두고 하는 욕이다. 말 못하는 짐승이 무슨 죄가 있어 비교의 대상이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소위 국민의 세금으로 밥을 빌어먹고 사는 자가 그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니 그야말로 스스로 자신이 개나 돼지보다 못한 인간임을 인정한 꼴이다. 비웃을 가치조차 없는 일이지만, 이런 사람이 이 나라의 교육 정책을 기획하고 소위 국정교과서를 만드는 자리에 있다는 사실은 백년대계라는 이 나라 교육의 미래를 너무나 끔찍하게 만든다.

더구나 99%가 개, 돼지이고 나머지 1%만이 인간인 세상에서 자신은 ‘1%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니 분노를 넘어 참담하다. 그의 말대로 어차피 1%라는 것이 날 때부터 규정되어 있다면, 그는 노력할 필요도 없고 노력해서도 안 된다. 그가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면 그는 이미 1%에 속하지 않은 인간이고, 결국 그는 자신이 그렇게 속하고 싶은 그 집단의 종일 뿐이다.

최근 미국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흑인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미국이란 나라에서 경찰의 과잉대응이 문제가 된 것은 한두 번이 아니지만, 신분증을 꺼내려는 운전자에게 총격을 가하는 장면이 동승자의 SNS를 통해 생중계되면서 경찰의 조치가 인종차별에 기인한 것이라는 분노가 폭발했다. 급기야 항의시위가 미 전역으로 퍼졌고 댈러스 지역에서 이번에는 경찰을 향한 총기 난사로 경찰관 5명이 숨지고 다수가 부상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정책기획관이라는 사람은 이런 일을 두고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이미 답은 나와 있다. 보도된 바와 같이 그는 미국의 흑인이나 히스패닉에 대해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그에게 정의란 가진 자들, 1%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히스패닉이나 흑인, 민중은 무식하고 보잘것없는 것들이라서 폭력을 조장하고 옹호하며 사회를 혼란시킨다고 그는 말하겠지만, 사실은 자신이 이 사회적 분열과 절망을 만드는 주역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영원히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가 만드는 사회, 그가 만들고 싶어 하는 사회가 결코 자신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진 순간에도 그는 자신이 사육장 바깥에서 먹이를 던져주는 자리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 만연한 도덕 불감증, 특히 고위 관료라는 사람들의 행태는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국민을 장기판의 졸을 넘어 개, 돼지로 생각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게 한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스스로 친일파라 자랑스럽게 칭하면서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했다는 얼빠진 공무원부터 공영방송에 전화를 걸어 보도 통제에 열을 올린 청와대 전 홍보수석까지,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공무원들이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고 그들을 깎아내리거나 매도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음악을 말해야 할 자리에 이렇게 길게 세상을 한탄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잘못된 권력이 만든 음악사의 슬픈 단면을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성악에서 카운터테너는 지금의 우리에겐 낯선 이름이 아니다. 하지만 카운터테너가 남성이 여성의 음역을 대신하는 성악의 한 분야로 처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라틴어 ‘castrare’에서 유래된 카스트라토가 금지되어 나타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씁쓸하다. 가톨릭 교회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성경 고린도전서 14장 34절의 구절을 잘못 해석하여 여자들은 교회에서 설교할 수 없고 성가대뿐만 아니라 오페라에서도 노래를 부르는 것을 금지했다. 따라서 교회나 오페라에서는 어쩔 수 없이 여성의 음역을 대신할 수 있는 목소리를 찾아야 했다. 이것이 바로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소년들을 거세한 카스트라토였다. 성공만 하면 귀족 못지않은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카스트라토는 가난한 하급계층의 수많은 소년을 고음 유지를 위해 거세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모든 카스트라토가 부와 명예를 얻을 수는 없었다. 수많은 카스트라토 중에 그런 영광을 누린 사람은 단 1%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카스트라토는 부는커녕 성의 정체성을 잃고 비참한 삶을 살아가거나 삶을 비관하여 자살로 생을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인권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고 거세에 대한 비윤리적인 문제로 결국 가톨릭 교회는 1903년 공식적으로 이를 금지했다.

이렇게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권리라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두고 싸워온 기록이다. 해서, 다시 신분제로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서도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인권이란 인간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되돌리려는 시도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 어떤 경우에도 용서될 수 없고 용서해서도 안된다.

서울 구의역에서 안전문을 고치다 죽어간 청년 노동자를 두고 가슴 아파하는 것을 위선이라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내뱉는 인간에게 우리의 교육을 맡겨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다시 우리의 아이들을 거세시키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우울한 일요일 오후, 카운터테너가 부른 ‘울게 하소서’를 듣고 싶었다.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가 초연될 당시 카스트라토가 불렀다는 ‘울게 하소서’는 영화 ‘파리넬리’의 삽입곡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곡이다. 지금은 많은 소프라노가 불러 인기를 얻고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남성이 부른 슬픈 노래다. 오디오의 재생 버튼을 누르자 이 나라의 수많은 청춘이 ‘외로운 늑대’가 되어 비명을 지르며 달려온다. 일부 기성세대의 비뚤어진 사고와 역사 인식을 어떻게 단죄할 것인가. 목 놓아 울고 싶은 슬픈 오후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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