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한글문해 교육생 김순이 할머니 “팔십 평생 연필 처음 쥐어봤어…글 배우게 돼 하루하루가 즐거워요”

  • 천윤자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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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9-28   |  발행일 2016-09-28 제15면   |  수정 2016-09-28
1년남짓 익혀 詩도 써…‘시인’별명
“살아온 나의 이야기도 써보고 싶어”
경산 한글문해 교육생 김순이 할머니 “팔십 평생 연필 처음 쥐어봤어…글 배우게 돼 하루하루가 즐거워요”
김순이 할머니가 원고지에 쓴 글을 보여주며 시를 쓰게 된 심정을 이야기 하고 있다(왼쪽). 원고지에 쓴 김 할머니의 시.

“오래 살다 보니 이렇게 좋은 날도 오네. 세월이 참 좋아졌어. 팔십 평생에 연필을 처음 쥐어보았지. 좋은 선생님을 만나 몰랐던 글도 배우고….”

경산시 진량읍 김순이 할머니(84)는 요즘 글 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지난해 4월 경산시 어르신복지센터에서 운영하는 ‘한글 문해 교육’에 등록한 할머니는 매주 월·금요일이면 어김없이 책가방을 챙겨 집을 나선다. 반에서 최연장자인 할머니는 귀가 잘 들리지 않음에도 누구 못지않은 열성으로 글을 익혔다. 그리고 1년 남짓 지난 지금은 시를 짓기도 한다.

2학기 개강 날, 할머니는 원고지에 쓴 한 편의 시를 선생님에게 건넸다. 원고지에 또박또박 적은 ‘봄 가을’이란 제목의 시는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정확했다. 원고지를 받아든 한글교실 조순 강사는 ‘혼자 보기에는 너무나 아깝고 아름다운 시’라고 칭찬하며 여러 사람에게 읽어주고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그날 이후 할머니는 동료들에게 ‘시인’으로 불린다.

“자랄 때는 6남매 맏딸로 동생들 업어 키우느라 못 배웠제. 영감이 글 모른다고 무시하고 구박도 많이 하더만. 시집와서는 또 자식들 키우며 사는 게 바빠서 배울 생각도 못했제.”

채소 장사를 하며 홀로 6남매를 키웠다는 할머니는 “어느 날 TV를 보는데 노인들도 학교에 가서 글을 배운다고 하더라. 딸한테 좀 알아보라고 했고, 여기저기 알아보더니 마침 집에서 가까운 하양에 있는 노인복지관에서 글을 가르쳐 준다고 해서 다니게 됐다”며 “옛날 같으면 이미 저세상 갔을 나이인데 좋은 선생님을 만나 글을 배우게 되어 하루하루가 즐겁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일본에서 100세가 된 노인이 시를 써서 책도 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늦은 나이에 글을 배운 것만도 감사한 일인데 건강이 괜찮으면 살아온 내 이야기를 글로 써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사진=천윤자 시민기자 kscyj83@hanmail.net


봄 가을 -김순이 作

봄비는 소리 없이 내리고 꽃은 피어도 소리도 없고/ 바람은 손이 없어도 세상을 흔들고/ 새는 울어도 눈물도 나지 않네// 내 가슴은 불이 타도 연기도 김도 아니 나고/ 호박은 늙으면 맛이라도 있건만/ 내 청춘 늙으면 보기도 싫어요// 새끼 백 발은 쓸 곳이라도 있건만/ 내 청춘 백발은 쓸 곳도 없네// 나도 옛날 친구 만나서 같이 술이나 한잔 받아먹으면서/ 호박 같은 세상에 둥글둥글 살다가 갑니다// 그리고 내 나이가 여든이 넘으니 이 좋은 세상을 만나고 좋은 선생님도 만나서 몰랐던 글도 배우고 글짓기도 하고 너무너무 좋아요// 그리고 즐거운 웃음꽃이 피어납니다// 그리고 우리 선생님은 백년이 가고 천년이 가도 지지 않는 꽃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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