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따라 의성여행 .1] ‘신라 최고의 지성’ 고운 최치원의 혼이 깃든 고운사(孤雲寺)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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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9-29   |  발행일 2016-09-29 제13면   |  수정 2016-10-13
누각 아래는 계곡, 뒤는 찬란한 산과 구름… 신선의 세계가 이럴까
20160929
최치원이 고운사에 머물며 지은 가운루. 계곡을 가로질러 지은 모습이 마치 둥실 뜬 배처럼 보인다. 옛날에는 ‘누각에 서면 아래로는 계류가 흐르고, 뒤로는 찬란한 산들과 구름의 바다를 접하는 신선의 세계’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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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1년 의상대사가 지은 고운사는 천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간직한 고찰이다. ‘높은 구름’을 뜻하는 고운사(高雲寺)로 불리다가 최치원이 거처간 뒤부터 그의 자(字)를 따 ‘고독한 구름’을 의미하는 고운사(孤雲寺)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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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루 현판 중 누각 바깥 처마에 걸린 행초서 글씨는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 시리즈를 시작하며
산문을 지나자 선하고 유순하게 뻗은 말간 산길이다. 곁에는 아담한 계곡이 함께한다. 계류는 소리 낮고 이따금 세밀하게 층진 지층의 속살이 드러나 있다. 길 양쪽으로 빽빽한 키 큰 소나무들은 허공에 몸 기대 ‘솔굴’을 만들었고, 흙길에 걸음 놓을 적이면 솔향이 난다. 저 앞에 일주문이 보인다. ‘등운산(騰雲山) 고운사(孤雲寺)’ 현판이 구름 날개 단 듯하다. “고운사엔 다녀왔는가?” 세상을 떠나 하늘에 이르면 염라대왕이 그리 묻는다고 했다. ‘해동제일의 지장도량’이라 일컫는 고운사 일주문 앞에서 염라대왕에게 자신있는 대답을 할 수 있겠단 생각을 한다.

최치원이 유랑하다 지었다는 가운루
이상 갈구하는 대해의 배처럼 느껴져

경내 깊은 곳 명부전엔 염라대왕 벽화
나중에 ‘고운사엔 다녀왔는가’물으면
어떻게 대답할지 계속 생각해보게 돼



#1. 최치원의 자(字)를 따 이름 지은 고운사

의성의 동북 끝단 단촌면 구계리에 ‘구름을 타고 오른다’는 등운산(騰雲山)이 있다. 산의 서쪽 사면을 타고 흘러내린 산자락은, 반쯤 피어난 연꽃 형상을 이룬다. 그 꽃 속에서 물이 솟아 길고 부드러운 안망천(安望川)으로 흐른다. 그곳 꽃 핀 자리, 천(川)이 시작되는 자리에 681년 의상대사가 절을 짓고 고운사(高雲寺)라 했다.

고운사 일주문은 부드럽게 곡진 굵은 기둥이 각기둥의 협시를 받으며 육중한 지붕을 가뿐히 이고 있다. 아직 가지를 뻗을 것만 같은 나무기둥들은 처마를 살짝 떠받치고 있다.

일주문 속에 천왕문이 오롯이 보인다. 사천왕이 눈을 부라리는 좁은 문을 지나면 오래된 석불들을 봉안해 놓은 작은 고불전 위로 커다란 가운루(駕雲樓)가 출항하는 배처럼 서있다. 그 뒤를 우화루(羽化樓)가 따른다. 이들은 신라 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세웠다는 누각들이다.

고운 최치원. 신동 또는 천재, 또는 신라 최고의 지성이라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고운은 12세 때인 868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6년 만에 과거에 합격했고, 여러 벼슬을 지내며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75년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명성을 떨쳤다. 885년 귀국한 그는 의욕적으로 일했지만 신라 말이라는 어지러운 상황과 신분제라는 견고한 벽에 좌절하고 만다. 결국 고운은 42세 즈음 관직을 버리고 세상을 떠돌다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고운사의 가운루와 우화루는 그가 세상을 유랑할 적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운루의 원래 이름은 가허루(駕虛樓)였다. 누각은 계곡을 가로질러 다리처럼 놓여있다. 길고 가는 기둥들이 커다란 몸체를 떠받치고 있어 둥실 뜬 배처럼 보이기도 한다. 옛날에는 ‘누각에 서면 아래로는 계류가 흐르고, 뒤로는 찬란한 산들과 구름의 바다를 접하는 신선의 세계’라 했다.

계곡은 대부분 메워져 옛 풍취는 없지만 지금도 누각에 오르면, 서쪽 하늘가에 걸린 등운산 봉우리가 무지개처럼 섬처럼 보인다. 가운루는 그곳을 향하는 대해의 배처럼 느껴진다. 가운루의 원래 이름인 가허루와 우화루는 도교 사상이 담긴 이름이다. 고운이 품었던 이상세계로의 간구 또한 깃들어 있다. 가질 수 없기에 간절함은 깊었을 터. ‘높은 구름(高雲)’을 뜻하던 고운사(高雲寺)는 고운 최치원이 거처간 뒤 그의 자(字)를 따 ‘고독한 구름(孤雲)’ 고운사(孤雲寺)가 되었다.

#2. 천년 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가허루가 언제 가운루로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2개의 가운루 현판 중 누각 바깥 처마에 걸린 행초서 글씨는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공민왕은 내란을 겪으면서 노국공주가 세상을 뜨자 실의에 빠져 전국을 유람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고운사를 찾아 현판의 글씨를 남겼다. 구름에 몸을 싣고 세상사를 잊고 싶어 한 당시 공민왕의 심경이 담긴 어필이다. 그런 현판 앞에서 한동안 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노국공주를 잊지 못하는 공민왕의 애틋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우화루에도 특이하게 현판이 두 개 달려 있다. 밖에는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된다’는 도교적 의미의 우화루(羽化樓) 현판이 보인다. 누각 안에는 ‘꽃비가 내린다’는 뜻의 우화루(雨花樓) 현판이 자리를 잡고 있다. 환생을 뜻하는 불교적 의미라지만 심하게 두근거리는 이름이다. 현재는 조용히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우화루 곁의 종각을 지나면 고운사의 중심 법당인 대웅보전이다. 1992년에 신축한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장쾌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대웅보전의 왼쪽은 극락전, 뒤쪽은 약사전, 오른편 돌계단을 오르면 나한전이다.

극락전은 대웅보전이 신축되기 전까지 고운사의 큰 법당 역할을 하던 곳이다. 종일 바라보아도 좋을 단아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은근히 숨은 듯한 나한전은 조선 중기의 건물이다. 앞에는 상처 많은 삼층석탑이 서 있고 그 아래로 전각의 지붕 선들이 순순하게 흐르고 있다. 약사전에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삼층 석탑과 약사전 부처님은 신라 헌강왕 때 도선국사가 조성한 것이라 한다. 천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다.

고운사는 고려시대와 조선조에 걸쳐 여러 번 중창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군의 전방기지로 삼았다. 특히 연수전(延壽殿)은 영조 20년(1774) 왕실의 계보를 적은 어첩(御帖)을 봉안하기 위해 건립한 전각으로, 1887년 다른 전각들과 함께 중수됐다. 1902년에는 고종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새로 지었다. 약사전 맞은편에 품위 있게 낡은 연수전이 보전되어 있다. 나침반의 바늘이 꼼짝하지 않을 정도로 기가 센 자리라 한다. 대문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태극 문양에 문득 저릿하다.

일제강점기 동안 고운사는 조선불교 31총본산의 하나였다. 광복 이후 사찰의 재산이 망실되고 당우는 쇠락했지만 지금은 조계종 제16교구의 본사다. 의성, 안동, 영주, 봉화, 영양 등 인근에 산재한 60여 대소 사찰을 말사로 거느리고 있다. 교구본사로서는 작은 규모지만 10여년 전부터 꾸준히 불사가 이어지고 있다. 의상대사가 고운사를 세운 지 천년이 더 지나는 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을 테고 지금도 나날이 변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이라는 찰나에 갖는 고운사에 대한 영원한 감각은 팽팽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은 고요한 균형이다.

#3. 쫓아오는 눈동자

경내의 가장 깊은 곳에 명부전이 자리한다. 약 300년 전에 세워진 법당이다. 내부에는 사후에 인간이 심판받는 장소가 형상화되어 있는데, 미래불이 오시기 전까지 중생의 모든 고통을 구원하신다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염라대왕을 비롯한 열 대왕과 그 권속들이 조성되어 있다. 명부전은 사자에게 길을 안내하기도 하지만 살아있을 때 자신의 뒤를 돌아보고 사후의 길을 닦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염라대왕 앞에서 훗날의 일을 시뮬레이션 해 볼 수도 있다. “고운사엔 다녀왔는가?” 대답은 쉽고 안일하다.

다시 고운사 일주문으로 향하는 길, 두 가지 할 일이 있다. 첫째는 우화루와 극락전 사이에 스님들의 공간인 만덕당을 찾는 일이다. 그곳에 ‘이곳에서 등운산을 바라보라’는 은밀한 메시지가 있다. 만덕당 툇마루에 앉아 본다. 등운산 봉우리가 눈앞이다. 그것은 꽃비 내리는 세계와 극락의 세계에 걸쳐 있다.

둘째는 요사채 공양간 입구에서 ‘호랑이’를 만나는 일이다. 조선 중기에 그려졌다는 호랑이 그림이지만 금세라도 큰 돋움을 해 덮쳐올 것만 같은 형형한 눈빛이다. 어느 쪽으로 달아나도 호랑이의 시선은 살아서 쫓아온다.

천왕문 속 오롯한 일주문을 지나며 생각한다. 염라대왕의 두 번째 질문은 무엇일까. 긴 솔굴을 내려가는 동안 꽃비와, 극락과, 질문에 대한 질문이, 호랑이의 눈동자처럼 내내 쫓아온다. 그것은 간혹 잊을 수는 있지만 결코 잊지 못할, 명부전이 내려준 미션 혹은 화두와 같은 것이다. 아. 해동 제일의 지장 도량이라더니.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의성은 경북을 대표하는 ‘관광 1번지’로 손꼽히는 고장이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유서 깊은 역사가 어우러져 사계절 내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전국적 관광지인 빙계계곡부터 노란 꽃과 붉은 열매가 계절에 따라 장관을 연출하는 산수유마을까지,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풍성하다. 또한 삼한시대 부족국가인 조문국의 숨결이 어려있고, 신라·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불교유적과 유교문화가 꽃을 피운 곳이 의성이다. 사람살이와 함께한 무수한 이야기는 고개를 넘고 깊은 계곡을 따라 하염없이 펼쳐진다. 자연과 역사, 문화가 공존하는 여행을 꿈꾼다면 의성만큼 좋은 곳이 없다. 영남일보는 의성군과 공동으로 의성의 문화관광 명소를 소개하는 시리즈 ‘이야기 따라 의성 여행’을 연재한다. 의성을 대표하는 관광지를 소개하면서 그 속에 스며있는 흥미로운 스토리를 함께 담아낸다. 시리즈 1편은 ‘신라 최고의 지성’ 고운 최치원의 혼이 깃든 고운사를 다룬다.

■ 여행정보

우거진 송림과 아기단풍
산문부터는 걸어 보세요

대구와 의성에서는 5번 국도를 타고 단촌면 소재지에서 후평리, 구계리로 이어지는 군도 4호선 도로를 따라가면 고운사가 나온다. 2016년 현재 단촌면소재지에서 고운사를 연결하는 군도4호선이 2차로로 확장 중에 있는데 공사가 완료되면 통행이 더 편리해진다.

서울, 안동 방향에서는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IC로 나가 5번 국도를 타고 의성 대구 방향으로 잠시 남하한다. 망호 교차로에서 일직점곡로(79번 지방도)로 좌회전해 가다 팽목삼거리에서 고운사길로 접어들면 된다.

주차료와 입장료는 없다. 일주문까지 차가 들어가긴 하지만 산문에서부터 걷기를 추천한다. 우거진 송림에 아기단풍이 어우러진 숲은 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청정하다. 고운사 초입에는 번다한 사하촌이 없다. 대신 사찰음식체험관, 화엄승가대학원, 노인 요양병원 등이 숲속에 자리한다. 현재 공사중인 최치원 문학관도 곧 완성될 예정이다. 고운사 템플 스테이와 사찰음식 체험은 매우 유명하다. 된장, 고추장 등을 구입할 수 있다.
공동기획:의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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