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의 TV가이드] JTBC ‘냉장고를 부탁해’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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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0-21   |  발행일 2016-10-21 제41면   |  수정 2016-10-21
댁의 냉장고는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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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사진으로 유명한 작가 마크 멘지버의 ‘샌안토니오에서 만난 사람의 냉장고’(왼쪽)와 처치곤란 천덕꾸러기 냉장고의 신분상승 프로젝트 JTBC의 ‘냉장고를 부탁해’.

◆ 아무래도 냉장고가 너무 작아

‘아얏!’ 냉장고 문을 열자마자 묵직한 유리통이 P의 발등에 떨어졌다. 어제 친정 엄마한테서 받은 열무김치였다. 너무 아파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발등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김치통을 다시 넣으려고 했지만 도대체 어느 공간에서 밀려 떨어졌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냉장고는 가득 차 있었다. 순간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필요 없다는데도 왜 엄마는 자꾸만 반찬거리를 갖다 주는 걸까? 게다가 주는 반찬보다 배는 더 많은 잔소리를 한다. 요즘 물가가 얼마나 비싼지 아니?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김치를 못 담그는지 원. 너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이다. 참다못한 P가 엄마한테 소리를 질렀다. 내가 언제 엄마한테 해 달랬어? 야, 이 기집애야! 내가 안 주면 매번 김치를 마트에서 사 먹을래? 내가 김치를 사 먹든 얻어먹든 이제 간섭 좀 그만해! 결국 그렇게 엄마한테 모진 소리를 뱉고 말았다.


냉장고 문 열자 김치통이 발등에 ‘툭’
산 지 한달 안돼 820ℓ 공간 차고 넘쳐
냉동실도 정체불명 봉지‘욕심 피라미드’
주인 욕심 품느라 오늘도 고된 냉장고

연예인 집 냉장고 들여다보기와 비우기
일명 처치곤란 냉장고 프로젝트 ‘냉부’
제한된 재료와 시간으로 요리대결 흥미
‘짐승롤’ 등 사연 담은 요리이름도 재미



820ℓ짜리 양문형 냉장고를 처음 살 때만 해도 수납공간은 넉넉했다. 채소는 신선칸에, 유제품은 도어칸에, 반찬용기는 새로 사서 깔끔하게 정리했다. 김치는 따로 구입한 김치냉장고에 두고 냉동실은 가급적 비워둔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한 달도 못 가서 냉장고는 내부 불빛이 잘 안 보일 정도로 가득 차 버렸다. ‘1+1’ ‘통 큰 세일’ ‘오늘만 이 가격’, 이 마법과도 같은 글씨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거기에 친정 엄마가 주는 고춧가루와 장아찌, 굴비 꾸러미, 갖가지 반찬과 김치가 더해진 것이다. 아무래도 냉장고가 너무 작아…. 혼잣말을 하며 P는 구석에 박혀있는 요구르트를 어렵게 꺼낸 후 냉장고 문을 닫고 TV를 켰다.

◆ ‘냉부’를 보는 4가지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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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번득이는 ‘냉장고를 부탁해’의 요리 제목. 미카엘 셰프의 요리 ‘웃음꼬치피었습니다’.

‘냉장고를, (탁탁 탁자를 두 번 치는 소리) 부탁해!’

2014년 11월에 처음 방송된 ‘냉장고를 부탁해 jtbc’는 먹방, 쿡방 바람을 탄 또 하나의 방송이었다. 맛집은 북적대거나 멀고 일류 레스토랑은 주머니사정이 어려운 현실에서 어느 집 냉장고에나 흔히 있을 법한 재료로 최고의 요리를 선보인다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기획의도이다. 일명 처치곤란 천덕꾸러기 냉장고의 신분상승 프로젝트. ‘그게 뭐가 재밌어?’라고 생각하던 P가 깜짝 놀란 건 실제 연예인 집의 냉장고를 통째로 스튜디오로 가져오는 장면이었다. 적어도 P에겐 연예인들의 냉장고 안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큰 흥밋거리였다. 냉장고는 주인의 속살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 사람의 식성뿐 아니라 평소 생활습관 그리고 성격까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크 멘지버라는 사진작가는 냉장고 사진으로 유명하다. 2006년부터 3년6개월 동안 미국의 23개 도시를 돌며 약 50장의 냉장고 사진을 찍었다. 얼린 뱀이 들어있는 수상한 냉장고, 채소와 과일로 가득 차 있는 당뇨병 환자의 냉장고, 그리고 432달러(약 49만원)로 한 달을 근근이 살아가는 도시인의 냉장고에 이르기까지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솔직한 일상이 담긴 냉장고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무엇을 먹는지, 돈은 많이 버는지, 정리를 좋아하는지,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이런 이야기를 담아 ‘You are what you eat’이라는 작품 전시를 했다.

‘냉부’에 나오는 게스트들의 냉장고도 각기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즉석식품이 가득한 이성재의 냉장고는 혼자 사는 기러기 아빠의 외로운 생활을 보여주고, 이탈리아 식재료가 든 안정환의 냉장고는 2000년 7월 이탈리아 풋볼클럽 AC페루자에서의 활약을 떠올리게 한다. 연예인이라도 우리와 다를 바 없이 냉동실에는 검은 비닐로 싸인 정체 모를 음식도 있고 유통기한이 지난 잼이 나와서 친밀감을 주기도 한다.

‘냉부’가 주는 두 번째 재미는 제한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재료는 냉장고에 있는 것으로만 제한한다. 음식 재료가 별로 없는 냉장고는 셰프들을 당황하게 만들지만 매 순간 그 안에서 최고의 음식을 요리해내곤 한다. 또 하나의 제한은 바로 시간이다. 요리하는 데 주어진 시간은 단 15분. 그 시간 안에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 못지않은 음식 플레이팅까지 마무리한다. 달걀 흰자와 설탕을 섞어서 거품을 내는 머랭은 짧은 시간에 만들기가 쉽지 않은데도 빠듯하게 해내는 걸 보면 절로 박수가 나온다. 이것이 요리를 박진감 넘치는 대결구도로 만든다. 거기에 더해 빠른 편집과 스포츠 중계 같은 MC의 진행이 재미를 더한다.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P가 생각하는 세 번째 재미는 요리의 이름이다. 분명히 셰프가 아닌 프로그램 작가들이 지은 것일 테지만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번득인다. ‘하룻강아지 복 무서운 줄 알고 오삼’ ‘짐승롤’ ‘가위로 오리면’ ‘할아버지 최고닭’ ‘낚았찌개’ ‘나 혼자 먹게 낫토’ 등 출연자의 사연에 딱 맞는 이름들을 붙여서 소개한다.

마지막 재미는 게임의 법칙이다. 자칭 자취 음식의 달인, 타칭 무허가 셰프 김풍(웹툰작가)도 최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 셰프를 이길 수 있는 것이 ‘냉부’의 미덕이다. ‘마스터 셰프 코리아’나 ‘한식대첩’이야 심사위원들이 최고의 요리 대가이지만 이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은 냉장고의 주인이다. 냉장고의 주인 입맛에 딱 맞으면 그만일 뿐 셰프의 경력이나 현재 위치는 중요한 변수가 되지 못한다. P의 기억에도 어릴 때 엄마 손을 잡고 전통시장 좌판에 앉아 먹던 칼국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어떤 맛집도 그때의 맛을 흉내 내지 못한다. 입맛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감정적이기 때문이다.

◆ 냉장고 음식만으로 살아가기

방송을 보던 P는 심한 허기를 느꼈다. 다이어트를 한다고 저녁을 안 먹은 지 일주일째. 갑자기 헛웃음이 피식 나왔다. 이게 뭐하는 건지. 다이어트를 한다며 먹지도 않을 음식을 냉장고에 꾸역꾸역 넣어서 어쩌겠다는 건가. 일주일에 두세 번은 회식을 하는 남편, 살찐다며 고구마 다이어트를 하는 딸, 이렇게 세 식구가 쓰기에 820ℓ 냉장고는 너무나 크지 않은가? P는 그동안 식품을 채운 게 아니라 욕심을 채웠던 것이다. 냉장고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리석은 주인의 욕심을 품느라 24시간 쉬지도 않고 윙윙 돌아가는 냉장고. 그런 수고로움도 모른 채 820ℓ를 탓하며 900ℓ를 탐했으니 얼마나 서운했을까? 달래는 마음으로 냉장고를 어루만졌다. 메탈 재질의 차가움이 고스란히 손에 전해졌다.

결심한 듯 P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플라스틱 반찬통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재빠르게 발을 빼서 다치지는 않았다. 냉장고 안에는 대체 몇 가지 식재료가 들어있을까? 작은 팩과 큰 팩이 묶여있는 우유, 탄산음료, 요리에 필요한 각종 양념들, 새로 산 유리반찬통과 예전부터 있던 반찬통들을 차례차례 꺼낸다. 제일 안쪽 맨 아래에 있던 반찬통의 뚜껑을 열어보았다. 깻잎김치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거품과 함께 푸른곰팡이가 깔려있었다. ‘삐익 삐익’ 냉장고가 문을 닫으라고 소리를 지른다. P는 아예 코드를 뽑아버렸다.

냉동실을 열었더니 비닐봉지로 가득하다. 미숫가루, 들깻가루, 아무리 봐도 뭔지 모를 가루, 명태, 각종 산나물, 영지버섯, 나중에 먹으려고 얼려둔 인절미, 마른 멸치, 다진 고기, 오징어, 생강, 삼겹살…. 30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벌써 2시간째. 가짓수는 벌써 120개를 돌파하고 있었다. 물을 마시러 나온 딸이 식탁과 바닥에 널린 난장판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마의 심상찮은 표정을 보고는 옆에서 거들기 시작했다.

우와, 이거 3년 전에 내 생일선물로 받은 초콜릿이잖아? 이게 아직도 있어? P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런 게 아직도 많아. 앞으로 당분간 마트는 안 갈 거야. 버릴 건 버리고 남은 냉장고 음식을 다 먹은 후에 진짜 필요한 만큼만 장을 봐서 먹을 거야. 엄마, 우리 이거 다 먹으려면 얼마나 걸릴까? P가 곰곰이 생각해보고는 답을 했다. 아마 한 달은 넘을 거야. 그동안 우리 집에 외식은 없다!

방송PD 8tardi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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