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鄕 경북, 문학관을 찾아 떠나는 여행 .1] 칠곡군 ‘구상 문학관’

  • 류혜숙 객원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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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0-25   |  발행일 2016-10-25 제13면   |  수정 2016-10-25

▨ 시리즈를 시작하며…

경북을 수식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문향(文鄕)’이다. 역사시대 이전부터 근·현대까지 경북은 문학의 꽃을 피운 산실이고 작가들의 요람이다. 특히 근·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수많은 문인이 경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민족시인 이육사(안동)를 비롯해 한국시단을 대표하는 시인 조지훈(영양)·박목월(경주), 소설가 김동리(경주)의 고향이 경북이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두차례나 올랐던 시인 구상은 그의 전성기를 칠곡에서 보냈다. 최근 세상을 떠난 시조문학의 거목 정완영의 고향은 김천이다. 청송이 고향인 소설가 김주영과 영양에서 태어난 소설가 이문열은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하며 한국문단을 이끌고 있다. 경북에는 특히 이들 작가의 작품과 삶의 이력이 함축되어 있는 문학관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문학관은 단순히 작가와 그의 작품을 전시한 공간이 아니다. 죽어서도 독자와 함께 호흡하는 ‘소통의 공간’이다. 영남일보는 경북도와 공동으로 ‘文鄕 경북, 문학관을 찾아 떠나는 여행’ 시리즈를 7회에 걸쳐 연재한다. 경북지역에 들어서 있는 7곳의 문학관을 둘러보고, 작가들의 삶의 이력과 예술혼을 재조명한다. 그들의 문학적 숨결이 살아 숨쉬는 현장도 찾아 생생하게 전한다. 시리즈 1편에서는 시인 구상의 삶과 작품세계가 함축되어 있는 칠곡의 구상문학관을 찾아 떠난다.

옛 왜관 나루터 앞, 詩 하나 새겨 품고 영원을 사는 ‘구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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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군 왜관읍 구상문학관. 정면에 시인의 서재인 ‘관수재’가 보인다. 시인은 이곳에 정좌해 주옥같은 작품을 썼다. 관수재는 화가 이중섭, 시인 오상순, 아동문학가 마해송, 걸레 스님 중광, 운보 김기창 화백 등에게 사랑방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53년 왜관에 정착한 구상 시인은 22년간 이 지역의 산천과 더불어 살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2002년 개관한 문학관에서는 구상 시인의 이력과 그의 작품세계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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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문학관에는 시인의 이력과 작품세계는 물론 그가 생전에 사용한 모자, 묵주, 안경, 돋보기, 만년필 등이 전시되어 있다(왼쪽). 구상문학관을 찾은 한 방문객이 시인의 대표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시인 구상(具常, 1919∼2004). 그가 칠곡 왜관에 거주한 시간은 22년이다. 6·25전쟁 직후 초토의 1953년, 이립(而立)의 시기에 터를 갈고 불혹(不惑)을 지나 1974년 지천명(知天命)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던 어느 날까지였다. 왜관 철교가 아스라한 옛 왜관나루터 앞, 낙동강이 내다보이는 둔치의 땅이다. 지금 그곳에는 시인의 옛 서재와 문학관이 자리한다. 그 입구에 둥그런 바윗돌 하나, 시인을 애모하는 이들이 기려 세운 시비가 있다. 가슴에 시 하나 새겨 품고 강 앞에 앉은 그것은,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오늘’ 중)고 말하는 듯하다.

#1. 시인의 삶이 흐르는 구상문학관

마주한 문학관은 폐쇄적이고 딱딱해 보인다. 작고 푸른 정문만이 마치 생명체처럼 일렁인다. 문을 열자 푸른빛이 물안개처럼 쏟아진다. 건물은 중정을 가진 ‘ㄷ’자 모양이다. 내부의 푸른빛은 중정에 담긴 세계의 빛에서부터 온다. 멀리서 시인의 음성이 들린다. 정면으로 나아가는 길 끝 모퉁이를 돌자 음성은 가까워진다. 전시실을 가로질러 입구에서 가장 먼 곳에 자리한 영상실이 있다. 어둠 속 주름 깊은 시인이 시를 읊는 동안, 눈부신 화면 속에는 옛 왜관과 오래된 강과 시인의 삶이 흐른다.

영상실에서 나오면 차츰 밝아지는 눈앞에 전시실이 펼쳐진다. 벽에는 구상 시인의 연보와 약력이 길게 나열되어 있다. 거기에는 일제강점기, 전쟁, 분단, 독재, 4·19와 5·16 같은 우리의 근대사가 그의 탄생, 고난, 사건, 고통과 기쁨 등의 시간과 뒤얽혀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태어났을 시인의 시집들이 일제히 기립한 듯 진열되어 있다. 첫 시집 ‘구상’에서부터 영어, 일본어, 불어, 독일어 등 외국어로 번역된 시집들까지.


칠곡과 구상
1919년 서울生…1953년 왜관에 정착
예술인들 사랑방 관수재서 詩作 몰두
30∼40代 보내며 22년간 160여편 써

구상 문학관
예술의전당 설계 건축가 김석철 작품
한가운데 마당을 놓은 ‘ㄷ’자형 건물
1층엔 전시·영상실…2층에는 도서관



시인의 모자와 묵주, 안경, 돋보기, 만년필 등은 유리 상자 속에 놓여 있다. 보호된 유물은 주인의 부재를 강하게 깨닫게 한다. 한쪽에는 시인의 아내와 아이, 친지, 문우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그리고 중광 스님이 그린 시인의 얼굴과 화가 이중섭이 그린 ‘K씨의 가족’이 있다. 걸레 스님 중광의 눈에 시인은 박 같고, 달 같고, 어린아이 같았던 걸까. 이중섭의 눈에 시인의 가족은 속 아픈 부러움의 풍경이었을지도 모른다.

벗들에게서 받은 편지들도 한자리에 있다. 흐릿해졌지만 유려한 글씨체들, 깊은 애정이 담긴 안부의 글들 앞에 오래 머문다. 어제 받은 반가운 엽서에, 오늘 시인은 기꺼운 답장을 보냈을 것이다. 시인 노천명, 소설가 박종화, 화가 이중섭 등 수많은 다정한 이름들 속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름이 있다. 다양한 상패들이 진열된 칸도 있다. 그 가운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름이 적힌 훈장증이 보인다.

그렇게 다시 입구 쪽으로 거슬러 다다르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2층에는 두 개의 방이 있다. 조곤조곤한 음성이 새어나오고 있는 방은 문학 창작교실이 열리는 사랑방이다. 또 다른 한곳은 도서관이다. 복도로 난 유리창을 가진 커다란 도서관에는 구상 시인과 지인들이 기증한 2만7천여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다. 저자의 서명이 담긴 책은 6천권이 넘는다. 이곳은 저자의 서명본을 가장 많이 보유한 문학관이기도 하다. 창밖으로 낙동강의 한 조각이 보인다.

문학관은 예술의 전당을 설계한 건축가 김석철이 설계했다. 최초의 굳은 인상은 문을 열었을 때 깜짝 흐뭇함으로 바뀌고 중정을 통한 외부공간에의 기대를 점점 증폭시켰다가 마침내 중정으로 끌어내어 자연의 빛 속에 서게 한다. 중정에 서면, 뜰의 가장자리를 적시는 수로에 감싸인다. 그리고 사계절 변화하는 대기 속에 가만히 선 두 칸 작은 한옥과 마주한다. 구상 시인의 서재 ‘관수재(觀水齋)’다. 그가 거하던 시절엔 언제나 창으로 강이 내다보였다고 한다. 지금은 관수재 마루에 앉으면 강이 보인다. 중정의 수로는 작은 낙동강이다.

#2. 수도원 옆 관수재

구상은 191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형이 신부가 될 만큼 믿음이 깊은 가톨릭 집안이었다. 그가 네살 때 그의 가족은 부친이 베네딕트 수도원의 교육 사업을 맡으면서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리로 이사하게 된다. 그는 ‘철도 건널목을 건너면 조 수수밭이 널려 있고 우거진 수풀 속에 가톨릭 수도원 종각이 보이는 마식령 골짜기’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열다섯살에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환속했고 일반 중학교에 들어갔으나 퇴학당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로 전전하다 일본대학 종교과에 진학하게 된다.

1941년 졸업 후 귀국한 그는 원산에서 만난 여의사 서영옥과 결혼한다. 그 즈음 그에게 폐결핵이 찾아 왔다. 그리고 광복. 그러나 광복 기념 시집 ‘응향’의 권두에 실린 그의 시 ‘여명도’ ‘길’ 등이 퇴폐적, 악마적, 부르주아적, 반역사적, 반인민적이라는 죄목으로 규탄의 대상이 되자 결국 그는 1947년 2월에 월남한다. 그리고 1950년 6월 전쟁이 터진다. 구상은 전쟁동안 국방부 기관지인 승리일보를 만들며 종군했고 폐결핵은 시시때때로 그를 괴롭혔다.

구상 시인이 칠곡 왜관에 정착한 것은 휴전 협정이 있었던 1953년이다. 왜관에는 1928년에 설립된 오래된 성당이 있었는데, 1952년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을 위한 임시 수도원이 되었다. 그것이 현재의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이다. 구상은 자신의 어린 시절과 맞닿아 있는 수도원 곁으로 이사했다. 부인은 순심병원(順心病院)을 개원하고 남편의 정양을 위한 독채를 지었다. 관수재다. 현판은 진주의 설창수 시인이 만들어 보내 준 것으로 구상 시인은 ‘물(水)은 마음(心)과 한 뜻의 글자여서 나의 서재에는 똑 떨어진 이름’이라고 했다.

구상 시인은 낙동강변을 거닐고, 수도원 농장에서 밭일하고, 관수재에 정좌해 시를 썼다. 그렇게 그의 연작시 ‘밭 일기’ 100편과 ‘강’ 60여 편이 세상에 나왔다. 관수재는 화가 이중섭, 시인 오상순, 아동문학가 마해송, 걸레 스님 중광, 운보 김기창 화백 등 평생 아웃사이더라 불리던 기인들의 사랑방이기도 했다. 한 때 피로 물들었던 왜관 강변의 작은 방은 그들 모두에게 또 다른 의미의 정양소가 아니었을까. 이중섭은 구상의 가족화를 이곳에 기거하며 그렸다. 훗날 구상은 이중섭이 그린 자신의 가족화를 왜관의 성 베네딕도 사제양성기금으로 내놓았다. 이중섭이 남겨준 또 다른 그림 한 점은 칠곡 지역의 양로원을 위해 쓰였다.

관수재 방 안에는 시인이 생전에 사용한 타자기와 필기도구가 놓여 있다. 잠시 출타한 주인을 기다리는 듯 정갈한 매무새다. 구상 선생은 아주 오래전부터 관수재를 예술가들의 정양소로 지을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꿈은 지금 순심병원 자리에 서 있는 ‘구상문학관’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3. 강, 회심의 일터

관수재 뒤로 강변대로를 건너면 낙동강에 닿는다. 시인의 고명딸인 소설가 구자명은 그가 강나루로 걸어가던 뒷모습을 기억한다.

“아버지께서는 강나루에 묶인 나룻배 뱃전에 올라 우두커니 강 맞은편 마을을 바라보실 때도 있고, 때로는 뱃전에 쪼그리고 앉아 낚싯대로 고기를 낚아 올리듯 한 자세를 취할 때도 있었습니다.”

어린 소녀의 눈에 그것은 ‘시어(詩語)를 낚는’ 모습이었다 한다.

작은 놀이터가 있는 강변에 옛 나루터의 흔적은 없다. 다만 덩그러니 선 안내판 하나가 옛일을 기억한다. 왜관 나루는 일제강점기 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낙동강 유역에서 가장 번창한 나루 중 하나였고 1960년대까지도 나룻배가 맞은편 강정나루와 이곳을 오갔다 한다.

문학관 앞 시비에는 ‘그리스도 폴의 강’이 새겨져 있다.

‘오늘 마주하는 이 강은/ 어제의 그 강이 아니다./ 내일 맞이할 강은 오늘의 이 강이 아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 강과/ 새 사람을 만나면서/ 옛 강과 옛 사람을/ 만나는 착각을 한다.’(강 24)

‘그리스도 폴’은 전설의 성인으로 ‘그리스도를 어깨에 짊어진 사람’이라 한다. 구상은 그의 두 아들과 아내를 먼저 피안으로 보냈다. 그는 2004년 5월11일 지병인 폐병과 교통사고 후유증이 겹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로부터 영원을 사는’ 시인을 안다. 그리고 때때로 이곳에서 옛 사람을 만난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경상북도

■여행정보= 고속도로 이용 시 왜관IC로 나와 우회전해 가다 매원교에서 좌회전해 직진한다. 제2왜관교 못 미쳐 우측 도로로 빠져나와 다시 우회전하면 50m전방에 구상문학관이 자리한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토요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요일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다. 매주 월요일과 법정공휴일은 휴관이다. 왜관역과 왜관남부터미널에서 도보로 10여분 거리다. 왜관역에 내리면 역전에서 구상 시인의 ‘꽃자리’시비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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