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남 강진 백련사

  • 류혜숙 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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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20   |  발행일 2017-01-20 제36면   |  수정 2017-01-20
절집 오르는 길, 붉은 동백을 깨운 찬 발걸음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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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동백나무 숲. 산문에서 절집까지 1천5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숲을 이룬 곳으로, 천연기념물 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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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숲을 지나면 높은 석축이 솟아 가파른 산세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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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루와 배롱나무. 만경루 아래를 통과해 대웅보전으로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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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루 아래 돌계단 앞에 서면 저 위 빛의 세계에서 대웅보전이 바짝 내려다보고 있다.

3월의 달력 모퉁이에 ‘백련사 동백’이라 써 놓고는, 다음날 새벽 동백에게로 갔다. 꽃 대신 숲을 보았다. 고요하고 짙푸른 상록의 숲. 숲은 어둑했고 숲길은 환했다. 환한 숲길과 맞닿은 숲의 가장자리에 붉은 동백꽃이 몇 송이 피어 있었다. 그걸로 족했다. 잎들은 지난밤 누군가 깨끗한 수건으로 하나하나 닦아 놓은 듯 윤기가 났다. 과분한 환영이었다.

산문 넘으면 1500여 그루 동백나무 숲
백련사까지 300m 숲길 내내 7m 키 자랑
길 맞닿은 숲 가장자리에 동백꽃 몇 송이

숲의 푸른 그늘 끝지점 높디높은 석축
만경루 아래 돌계단 서면 대웅보전 눈앞
두 현판은 이광사 글씨로 秋史가 극찬

◆백련사 동백나무 숲

‘만덕산 백련사’ 현판이 걸린 산문이 수비수처럼 양옆으로 팔을 뻗고 있다. 양팔 담장 너머로 푸른 동백나무가 보인다. 산문을 넘으면 곧바로 숲이다. 1천500여 그루의 동백나무 숲이다. 군데군데 굴참나무와 비자나무, 후박나무와 푸조나무도 자라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죄다 동백나무다. 조선 중기 때의 문인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은 ‘만덕산엔 다른 나무가 없고 동백만이 눈 속에 비추네’라고 백련사의 동백을 노래했다.

만덕산의 높이는 400m가 조금 넘는다. 산문에서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숲길은 약 300m. 슬렁슬렁 부드러운 길이지만 등줄기와 무릎은 산기울기를 느낀다. 동백나무 숲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부에서는 다산 선생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추측한다. 다산초당은 백련사와 1㎞ 정도 떨어져 있다. 선생은 백련사의 혜장선사와 이 숲을 거닐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다산 선생보다 200년 넘게 앞서 석천 선생이 백련사 동백을 노래했으니 숲의 시작은 석천 선생의 시대보다도 이를 것이다.

동백나무의 나이는 600년에서 800년이라고도 하고, 100년에서 300년이라고도 한다. 남도의 절집들은 동백숲을 부러 조성한 예가 많은데, 물을 잘 머금는 상록수라 홍수와 가뭄을 막아주기 때문이었다 한다. 어쩌면 백련사 동백숲은 숲과 절집의 역사가 나란할지도 모르겠다.

동백나무의 키는 평균 7m 정도 된다. 허리도 굵고 가지도 무성하다. 드물지만 빛이 샘물처럼 고인 자리에는 어김없이 꽃이 피었다. 백련사 동백은 2월부터 봉오리를 머금고 3월부터 개화하기 시작해 3월 말에 낙화한다. 석천 선생은 ‘멀리서 보면 등불과 같네’라고 했다. 미련을 못 버린 마음이 급하다. 3월은 언제 오는가.

◆백련사 혹은 만덕사

높디높은 석축이 성벽처럼 서있다. 몰려 오르던 숲의 그늘이 예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서성인다. 몇 그루 무리진 대나무들이 허약한 키다리처럼 높게 솟아 석축 너머를 들여다본다. ‘무엇이 보이니’ 숲 그늘이 물으면, 키다리 대나무가 답한다, ‘연못에 비친 만경루가 보인다.’

느슨한 기울기의 계단이 몇 단의 석축을 이어 오른다. 저 위 만경루 옆 종각에 기대앉은 한 사람이 보인다. 만경루 앞마당에는 근사한 배롱나무 한 그루가 세상 제일이라는 몸짓으로 서 있다. 나무들은 자신이 멋있다는 걸 안다. 만경루 아래층에는 기념품 가게와 종무소가 자리한다. 그 가운데 굴처럼 좁고 어두운 통로가 나 있다. 통로 끝에 그늘진 돌계단 앞에 서면 저 위 빛의 세계에서 대웅보전이 내려다보고 있다. 현판 글씨가 부리부리한 눈초리로 걸음을 주시한다.

돌계단을 오르면 만경루와 대웅보전에 포위된다. 두 거대한 건물이 바짝 마주 서 있어 잠시 어쩔 줄을 모른다. 현판은 둘 다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다. 그는 18세기 조선 명필가로 추사 김정희가 극찬한 인물이라 한다. 제주도 귀양길에 이곳에 들른 추사가 ‘글씨 같지도 않은 글씨’라고 낮춰 봤다가 유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들러 보고는 ‘천하 최고의 글씨를 몰라봤다’고 한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백련사는 통일신라 말기인 839년 무염(無染) 스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이후 터만 남아 있던 이곳에 고려 후기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가 신앙운동 결사체인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조직했다. 백련결사는 부패한 불교를 비판하고 수도자로서의 본 면모를 되찾자는 종교개혁운동 단체였다. 백련사는 120년 동안 8명의 국사를 배출하고 대몽항쟁에서도 큰 역할을 했지만 고려 말 최씨 정권과 밀접한 유대를 가지면서 서서히 몰락해 갔다. 후에는 왜구의 침탈로 폐사에 이른다.

조선시대 백련사는 만덕사라 불렸다. 세종 때가 되어서야 백련사는 다시 일어섰는데, 행호(行乎) 스님이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지원을 받아 절을 복구했다. 이곳에서 효령대군은 8년간 기거했다 전한다. 임진왜란 때는 모든 절집이 불탔고, 영조 때인 1760년에도 큰불이 나서 불상만 겨우 살아남았다. 지금 우리가 보는 백련사는 그 후에 중창된 것이다.

백련사는 아담하다. 맨 앞에 만경루가 있고, 대웅보전과 명부전, 칠성각, 응진당이 나란히 남향으로 앉았으며 선방과 요사채가 있다. 백련사가 남쪽으로 앉아 바라보는 것은 강진만 구강포다. 만경루 옆 종각에 기대앉아 있던 사람은 돌처럼 그대로다. 그도 바다를 보는 것일까. 동백나무 숲이 가깝게 검다. 절집의 양지와 바다의 푸름이 숲을 더욱 깊게 한다. 숲 그늘에 바다와 절집은 더욱 밝다. 백련결사를 조직했던 요세 스님은 속성이 서씨다. 스님은 평생을 참회 수행해 별명이 ‘서 참회’였다 한다. 그때가 백련사의 가장 빛나는 시대였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검은 숲에서 이파리들이 반짝거린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대구에서 45번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창원 방향으로 가다 칠원 분기점에서 10번 남해고속도로 진주 방향으로 간다. 광양IC로 나가 국도를 타고 순천으로 간 후 순천IC에서 다시 10번 남해고속도로를 타야 한다. 무위사 강진IC로 나가 2번 국도를 타고 강진읍 방향으로 가다 평동교차로에서 우회전해 들어가면 된다. 다산초당 전에 백련사 이정표가 있다. 만덕산을 1.4㎞ 오르면 주차장이 있고, 산문 너머 동백숲이다. 산문에서 백련사까지는 약 300m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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