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에스토니아 탈린(Tallinn)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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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03   |  발행일 2017-02-03 제37면   |  수정 2017-02-03
“2시간이면 마을 한 바퀴” 중세 역사 속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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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캐더린 골목길의 ‘위대한 길드의 집(House of Great Guild, 1410)’. 묘비석길로부터 이어져 있으며, 15세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지금은 각종 기념품 가게가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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툼페아 언덕에서 내려다본 탈린의 전경. 멀리 보이는 바다가 발트해이며, 이곳에서 배를 타고 두 시간이면 헬싱키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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툼페아 언덕으로 가는 길. 거리의 벽마다 예술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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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데 한자의 명성을 파는 스위트 아몬드 노점상.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여행하게 되거나 동유럽을 여행하면서 폴란드나 벨라루스까지 이르게 되면 이때가 아니면 평생 못 갈 것 같은 강박을 느끼게 만드는 곳이 있다. 발트해 연안 국가, 즉 발트 3국이다. 이 세 나라만을 전문으로 하는 여행 패키지는 없고 직항 역시 없다. 에르미타주나 도스토옙스키로 대표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찬란한 유산이나 인문 콘텐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동유럽의 멋진 성당이나 낭만적인 거리가 떠오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을 들썩이게 하는 자극적인 매력은 없을지라도 자연과 동화되어 세상 부러울 것 없다는 표정을 지닌 이곳 사람들을 보면 참 잘 왔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여행하면서 이곳을 찾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트 3국으로 넘어가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심야버스를 선택했다.

‘러’ 상트페테르부르크서 버스로 월경
밤새워 닿은 ‘발트해의 진주’에 설렘
130만 인구에 한반도의 20%인 영토
어딜 가도 끝없는 평원·숲들의 향연

14세기 한자동맹 역사 ‘올드타운’ 탈린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13만여 민요 보유국답게 곳곳 버스킹
툼페아 오를 땐 마음엔‘비밀의 여백’이…

◆국경을 넘는 야간 버스와 자동차 렌트

버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발틱역 ‘LUX EXPRESS 정류장’에서 밤 11시50분에 출발하는 탈린행이다. 네티즌들의 호평과 홈페이지에 등장한 멋진 외관 때문에 기대가 너무 컸었나 보다. 국경을 넘는 심야버스는 그냥 우리의 일반 고속버스 정도다. 당혹감이 밀려왔지만 휴대폰 충전기와 커피머신, 간이화장실이 있다는 것 정도가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두세 시간 남짓 지났다 싶었는데 출국수속을 위해 정차를 한다. 여권을 챙겨들고 공항에서처럼 수속을 하는데 러시아 입국할 때 받았던 작은 비자종이를 회수해 간다. 다시 탑승을 하고 본격적으로 잠을 청하려는데, 또 내리란다. 이번에는 에스토니아 입국수속이다. 이래저래 뒤척이다 보니 오전 7시쯤 탈린 정류장에 도착을 했다.

퀭한 눈을 비비며 첫발을 디딘 탈린의 모습은 ‘발트해의 진주’라는 별명이 실감나지 않았다. 세수를 하기 위해 정류장 화장실로 갔다. 입구에 30센트 동전을 투입해야 바가 열린다. 루블에서 유로로 바뀐 화폐 단위로 센트 동전은 없었다. 다시 자판기를 찾아 초콜릿 하나를 산 후에야 겨우 화장(?)을 할 수 있었다. 낯선 풍경들이 졸린 내 의식 속에서 묘한 설렘을 일으킨다.

정신을 가다듬고 예약한 자동차를 렌트하기 위해 시내버스를 탄다. 간신히 주소 근처까지 찾아왔으나 렌터카 사무실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큰 건물 쪽에서 사람이 나오는 걸 보고 물어보니,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간판도 없이 두 평(6.6㎡) 남짓한 좁은 방에 책상 하나를 두고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풀커버리지 보험을 들었는데도 앞 유리와 타이어는 제외니 별도로 이 보험도 드는 게 좋다고 은근히 협박이다. 발트 3국은 국경 개념이 없이 한 나라처럼 이어져 있다. 그리고 관광지 이동거리도 멀기 때문에 자동차 여행이 여러모로 장점이 많다. 일단 자동차를 렌트하니 마치 어디든 갈 수 있는 발이 생긴 듯하여 한결 마음이 편해지고, 마침내 ‘발트해의 진주’다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에스토니아는 인구 130여만 명에 한반도의 20%를 차지하는 영토를 갖고 있어서 전 세계에서 인가가 가장 드문 나라다. 어디로 가더라도 끝없는 평원과 숲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눈부신 진주 한 알

적어도 관광객들에게 탈린이란 도시는 곧 올드 타운을 의미한다 해도 좋다. 천천히 구경하며 걸어도 두 시간 남짓이면 충분한 2.4㎞ 정도의 이 작은 마을의 역사는 한자마을(Hanseatic town)로 대변된다. 한자마을은 14세기 중세 상업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한자동맹에 의해 탄생되었다. 한자동맹은 13~15세기에 독일 북부지역의 도시들과 발트해 연안 도시의 상인들이 맺은 일종의 상업적 결탁으로, 당시에 100여개 도시가 참여할 정도로 활발하게 진행됐다. 지정학적으로 중간 지역에 있었던 에스토니아는 이 동맹에서 중간지점 역할을 했으며 탈린은 에스토니아의 수도로 오랜 기간 연계도시의 임무를 맡았다. 이처럼 한자동맹의 역사가 이 올드 타운의 역사가 된 것이다.

올드 타운을 찾았을 때는 입구인 비루 게이트부터 갖가지 공사로 어수선하였다. 시청사 앞의 라에코야 광장에는 노점상이 가득하고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1991년에야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한 나라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자유롭고 활기찬 공기가 흘렀다. 그 속에 고풍스러운 건물과 골목들은 또 중세 유럽의 분위기를 말없이 웅변하고 있었다. 올드 타운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만큼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넘쳐나고, 영토의 50%가 숲으로 뒤덮인 국가답게 노점상에는 나무로 만든 각종 소품이 많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버스킹 팀이 많다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13만3천여 개의 민요를 보유한 국가라더니 가무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과 많이 닮았다. 에스토니아의 ‘바엡’이나 리투아니아의 ‘시엘바르타스’는 우리의 아리랑 같은 민요 정서를 말한다. 발트 3국 국민이 손에 손을 잡고 인간 사슬을 만들어 독립을 쟁취할 때도 노래로써 저항하여 ‘노래하는 혁명’으로 일컬어진다고 하니 이 나라 사람들에게 노래는 생활이자 역사다. 에스토니아의 유명 재즈가수 시리 시사스크가 2010년에 우리 민요 강원도 아리랑을 우리말로 취입한 것도 이런 역사적 감성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퉁소 가락의 단선율에 입혀진 그녀의 구성진 음색은 이곳 민요의 역사와 깊이를 짐작게 한다. 그러고보면 스카이프를 만든 IT 강국이라는 점도 우리와 닮았다. 한자동맹에서부터 소비에트 연방 시절, 그리고 독립혁명까지 이곳 올드 타운이 간직한 역사는 그대로 에스토니아의 역사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것을 관통해 온 소리의 어우러짐은 이곳의 가장 높은 곳인 툼페아 언덕(높은 곳이라는 뜻)으로 오르는 골목길에 모두 배어있다. 그래서 감히 이 골목길이 이곳 여행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 구부러진 골목길이 이곳의 여행미학이라면 곳곳에 묻어있는 도시의 비밀을 음미하는 것이 이곳의 가장 적합한 여행 방식이 될 터이다. 복잡한 이름의 건물이나 입에 붙지 않는 역사적 고유명사들에 마음 빼앗기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나만의 방식으로 ‘비밀의 여백’을 느끼는 게 좋겠다.

15세기 한자동맹 시절의 인테리어와 조명은 물론 메뉴와 음식까지도 재현하고 있는 올데 한자 레스토랑에서 허니 비어로 역사를 반추하거나 외딴 골목 한 귀퉁이에서 입에 붙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려보는 것도 낭만적이겠다. 그러면 전영애 교수가 ‘시인의 집’(문학동네, 2015) ‘프롤로그’에서 인상 깊게 그려낸 이곳의 풍경에 대해 깊이 동감하게 될 것도 같다. 전 교수가 얀 크로스의 책을 사고 우연히 묵은 집이 바로 그가 살고 있는 ‘에스토니아 문인의 집’이었단다. 얀 크로스는 크로아티아의 대표 문인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몇 차례나 올랐던 인물이다. 그 ‘문인의 집’을 기웃거려보는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도 같다. 이것이 이병률 시인이 말한 ‘비밀의 여백’에서 저지른 ‘자신만의 비밀’이 아닐까.

“탈린이라는 도시에 제목을 하나 붙이면 ‘비밀의 여백’이다. 매혹에 흠뻑 젖게 해주면서도 골목길을 걷는 이들 마음 한편에 여백을 번지게 한다. 돌길의 냉엄한 틈과 다정한 온도. 나무 문짝들의 수런거림. 밤이 되면 촛불인지 가로등인지 분간이 어려운 불빛들의 속닥거림, 치마폭이 긴 바람. 이 모든 것들과 함께, 이 도시에 비밀을 들으러 온 사람들은 자신만의 비밀을 저지르고 간다. 만약 길을 걷다 장갑을 잃고 맨손으로 돌아갈지라도 그 얼마나 살아 있는 눈빛으로 돌아왔는지에 대해서만 적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그곳에서 얻은 비밀 하나로 기운을 얻어 눈빛을 반짝일 것이다.” (이병률, ‘오, 12월을 사랑하는 사람들’ 중)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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