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의 읽기 세상] 만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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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24   |  발행일 2017-02-24 제22면   |  수정 2017-02-24
20170224

100년전 사회상황 다룬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
지금 우리 현실과 방불
온국민이 일심단결해서
만세라도 불러야 하나?


한국 근대소설의 선구자인 염상섭은 100년 전의 우리 사회를 묘지(墓地)로 묘사했습니다. ‘만세전(萬歲前)’이라는 중편소설에서입니다. 이 소설의 원제(原題)가 ‘묘지’였습니다. 동경 유학생인 부잣집 도련님 이인화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서울로 귀환합니다. 그 도정(道程)에서 마주친 이 땅의 현실이 아주 암담합니다. 기미년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전해 겨울의 일이었습니다. 소설 속의 한 대목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은 어때요?”

“요보 말씀이에요? 젊은 놈들은 그래도 제법들이지마는, 촌에 들어가면 대만의 생번(生蕃)보다는 낫다면 나을까. 인제 가서 보슈… 하하하.”

‘대만의 생번’이란 말에 그 욕탕 속에 들어앉았던 사람들이 나만 빼놓고는 모두 킥킥 웃었다. 나는 가만히 앉았다가 무심코 입술을 악물고 쳐다보았으나 더운 김에 가려서 궐자들에게는 분명히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말이지, 나는 그 소위 우국지사는 아니다. 자기가 망국 민족의 일분자라는 사실은 자기도 간혹은 명료히 의식하는 바요, 따라서 고통을 감하는 때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때껏 망국 민족의 일분자가 된 지 벌써 7년 동안이나 되는 오늘날까지는 사실 무관심으로 지냈고 또 사위가 그러하게 나에게는 관대하게 내버려 두었었다.(염상섭 ‘만세전’)

옛 말투, 옛 단어가 간간이 섞여 있어서 읽기가 쉽지는 않습니다만 관부연락선의 욕탕에서 일본인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듣고, 시쳇말로 ‘이러려고 지식인이 되었나 하는 자괴감’을 느끼는 장면입니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가서 ‘요보’(조선인 노동자들)를 모집해서 인신매매로 돈 벌 궁리를 한다는 것, 그리고 조선 사람의 수준이 대만의 ‘생번(야만인)’과 비슷하다는 말을 듣고 비참한 심정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방관자로 살아온 한 식민지 지식인이 충격적으로 목격한 이 ‘조국의 현실’은 지금 봐도 상당한 소설적 성과를 이루고 있습니다. 안팎으로 썩을 대로 썩은 조선의 현실을 이만큼 보여준 소설도 흔치 않습니다.

특히 봉건적 의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목전의 이득에만 연연하는 조선의 기득권층에 대한 묘사는 압권입니다. 철저한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식민지 작가 의식의 한 발로라 여겨집니다. 다만 주인공 이인화가 더 이상의 미래를 보지 못하고 “공동묘지다! 구더기가 우글우글하는 공동묘지다! 에잇! 뒈져라! 움도 싹도 없어져 버려라! 망할 대로 망해 버려라”고 자포자기의 심정을 토로하는 게 좀 아쉽기는 합니다.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시각형 지식인이었기에 ‘세상의 비참’을 그렇게 꼼꼼하게 그려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의 현실, 그것을 그려낸 한 걸출한 선배 작가의 삶과 작품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지금 우리의 현실이 그때와 방불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우리의 속은 많이 썩어 있습니다. 그 일부가 터진 것이 이른바 국정농단 사태와 대통령의 탄핵, 재벌 총수의 구속이 아니겠습니까.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압박도 심각합니다. 그러나 더 위험한 것은 100년 전 사람들이 ‘생번’이라고 부르며 멸시했던 그 어떤 구차한 삶이 지금도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망해 버려라!”를 속으로 외치는 ‘헬조선’의 젊은 신민들도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려고 그렇게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에 열심이고 열광했었는지 자괴감마저 듭니다. 온 국민이 일심단결해서 크게 한 번 ‘만세’라도 외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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