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사랑이야기 .17]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백석과 자야(上)

  • 김봉규
  • |
  • 입력 2017-05-04   |  발행일 2017-05-04 제22면   |  수정 2017-05-04
25세 시인, 문학기생과 운명적 만남…“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
20170504
자야 김영한이 노년에 자신의 전 재산인 대원각(요정) 터와 건물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사찰로 재탄생한 길상사(서울 성북동)의 극락전 모습.
20170504
영어교사 시절의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시인 백석(白石, 1912~96)이 사랑하는 자야(子夜, 1916~99)를 그리며 지은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첫 구절이다.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시인으로, 본명은 백기행이다. 자야는 백석이 지어준 아호로, 그녀의 본명은 김영한이다. 자야는 ‘진향(眞香)’이란 이름의 권번 기생 출신으로 만년에 자신이 일궈 온 요정 대원각 등을 시주해 사찰 길상사(서울 성북동)를 탄생시킨 주인공이다. 백석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야와 나눈 절절한 사랑 이야기다.

◆함흥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두 사람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보를 졸업한 후 1929년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선발돼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청산)학원에 입학해 영문학을 공부했다. 백석은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그 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1934년 귀국 후 조선일보사에 입사해 출판부 일을 하면서 계열 잡지인 ‘여성’의 편집을 맡아 근무하게 되었다. 19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했고, 그 이후 시 작품에 열중했다. 1936년 1월 시집 ‘사슴’을 발간했으며, 그해 4월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옮겼다.

백석은 이 함흥에서 자야를 만난다.

함흥 영생여고보 근무하던 백석
이임교사 송별연서 자야에 반해

부모 독촉에 딴 여자와 억지결혼
색시도 안보고 자야 다시 찾지만
만주서 함께 살자 제의 거절하자
詩 ‘나와 나타샤와…’ 주고 떠나


자야는 광산사업에 홀린 친척으로 인해 집안이 망한 뒤 어려움을 겪다가, 기생의 길로 들어선 소학교 동창 언니의 권유로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열여섯 살 때 일이다. 공부도 할 수 있고 기울어진 집안의 가세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며 자꾸 권했기 때문이다.

권번에서 금하(琴下) 하규일(1867~1960)로부터 기생 수업을 받았다. 금하는 구한말 왕조 정부의 국악사로 있다가 진안군수, 한성소윤 등 벼슬을 하다 나라가 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정악전습소를 열고 아악부 학감으로 있으면서 아악과 가무를 후학들에게 전수했다. 또한 조선 권번을 세워 학교에 못 가는 어려운 형편의 소녀들을 모아 가무를 가르쳤다.

자야에게 지어준 기명(妓名)은 진향(眞香)이다. ‘진수무향(眞水無香)’이란 글귀에서 따온 이름이다. 문학에도 관심을 가졌던 진향은 잡지 ‘삼천리’에 수필을 발표하며 세인들로부터 ‘문학기생’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자야는 그 후 조선어연구회의 해관(海觀) 신윤국의 도움으로 1933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런데 신윤국을 비롯한 조선어학회 회원 몇 사람이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의 형무소에 수감되는 일이 일어났다. 자야는 서둘러 귀국해 신윤국을 면회하러 홍원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면회는 거절당했다. 그래서 면회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다시 기생 옷을 입고 함흥 권번으로 들어갔다. 권번 기생이 되어야 중요한 연회 같은 자리에 참석할 수 있고, 그런 기회에 함흥 법조계의 유력 인사를 만나 특별 면회를 부탁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민족주의자나 사상범은 일절 면허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함흥 권번 소속으로 함흥에서 가장 큰 요릿집인 함흥관에 나갔던 첫날에 백석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영생여고보의 어느 교사가 이임하는 송별연이 거기에서 열렸던 것이다. 21세 때다. 백석은 이 자리에서 자야에게 반해 자기 옆으로 와서 앉게 한 뒤 술잔을 건넸다. 자야는 속으로 겁이 났지만 조심하며 술잔을 받아 마셨다. 백석은 술을 몇 잔 나눈 뒤 용기를 내어 자야의 손목을 불쑥 잡고는 말했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이렇게 21세와 25세의 두 청춘 남녀 사이에 한 번 댕겨진 사랑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활활 타올랐다. 두 사람은 1936년 늦가을, 각자 서로 멀지 않은 곳에 하숙을 정한 뒤 자야의 하숙집을 오가며 달콤한 사랑을 나누는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백석이 지어준 아호 ‘자야’

하루는 자야가 함흥시내 서점에서 이백의 시 ‘자야오가’에서 따온 당시(唐詩) 선집 ‘자야오가(子夜吳歌)’가 눈길을 끌어 사 가지고 와서 백석에게 보였다. 이 시집을 반갑게 보던 백석이 말했다.

“나 당신에게 아호를 하나 지어주겠소. 이제부터 ‘자야(子夜)’라고 합시다.”

자야오가는 본래 진대(晉代)에 오(吳)나라 땅에 살던 자야(子夜)라는 여인이 변경에 국경을 지키러 간 임을 그리며 만들었다는 애절한 노래인 ‘자야가(子夜歌)’에서 유래한 노래다. 이 자야가가 남조시대에 크게 유행하면서 ‘자야사시가(子夜四時歌)’ ‘대자야가(大子夜歌)’ ‘자야경가(子夜警歌)’ 등 여러 변주곡들이 생겨났다. 이백은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본래 5언4구의 절구 형식을 6구 형식으로 바꾸면서도, 사시가(四時歌)로서의 성격은 유지하여 춘하추동의 정경을 담았다.

이백의 ‘자야오가’ 중 가을 노래인 다음 시가 널리 알려져 있다.

‘장안엔 조각달 하나(長安一片月)/ 집집마다 다듬이 소리(萬戶衣聲)/ 가을바람 그치지 않을 때면(秋風吹不盡)/ 하나같이 옥문관(玉門關)을 그리는 마음뿐(總是玉關情)/ 어느 날에 오랑캐를 평정하고(何日平胡虜)/ 고운 님 먼 출정을 끝내려는가(良人罷遠征)’

1937년 백석은 부모의 독촉으로 억지 결혼을 했으나 새색시 얼굴도 보지 않고 다시 자야에게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함께 가서 자유롭게 살자고 제의했으나, 자야는 고민 끝에 받아들이지 않고 서울로 떠나 버렸다. 백석은 곧 서울로 자야를 찾아와 하룻밤을 지낸 뒤 편지 봉투 하나를 남기고 떠났다. 그 편지 봉투에는 백석이 친필로 쓴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들어있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마가리’는 ‘오두막’을, ‘고조곤히’는 ‘고요히’를 의미한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