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불평등의 덫

  • 박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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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10   |  발행일 2017-07-10 제31면   |  수정 2017-07-10
[월요칼럼] 불평등의 덫

책으로도 출간된 ‘라이프 프로젝트’는 7만명의 아이를 70년간 추적한 영국의 인간탐구 보고서다.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신상 변화와 건강·학업성적·직업·소득 등 개인의 일대기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결론은 부모의 빈부에 따라 인생 항로가 정해질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이었다. 부유층 자녀는 저소득층보다 정신·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좋은 직업을 갖는 경우가 많았으며, 대를 거듭할수록 소득·교육 등 다방면의 불평등이 심화됐다. ‘라이프 프로젝트’는 청년들이 도그마처럼 신봉하는 ‘금수저·흙수저론’의 실증판인 셈이다.

불평등 문제에 천착해온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뉴욕타임스 등에 기고한 칼럼 모음집 ‘거대한 불평등’을 통해 고장난 미국의 자본주의를 질타했다. 스티글리츠는 상위 1%의 기득권 세력이 이익을 사유화하고, 기업들이 독과점 이익을 챙기는 현상을 ‘짝퉁 자본주의’로 묘사했다. 스티글리츠는 정부정책과 정치의 실패가 불평등의 주범이라고 주장한다.

실제 불평등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보스턴컨설팅그룹의 ‘2017 세계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상위 1% 부자가 전 세계 자산의 45%를 차지하고 있다. 기업 양극화도 가관이다. 지난해 자산 5천억원이 넘는 국내 대기업은 1천280개로 전체 법인의 0.21%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들 기업은 나머지 59만개보다 많은 107조6천692억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학 교수는 저서 ‘21세기 자본’에서 인구가 줄거나 경제성장이 정체되면 기득(旣得) 자본의 힘이 더 증가한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불평등은 언제부터 발아됐을까. 농경사회의 등장과 함께 소득 불평등이 시작됐다는 게 정설(定說)이긴 하다. 그러나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의 분석은 다르다. 농경사회 이전, 1만2천800~1만4천500년 전 수렵시대에 이미 불평등이 뿌리내렸다는 주장이다. 캐나다에서 발견된 고대 원주민 집터가 이를 방증한다. 가장 큰 집의 생선뼈는 75%가 4~5년산으로 크고 종류도 다양한 데 비해 가장 작은 집에서 발견된 물고기 뼈는 2~3년산 작은 연어가 100%였다고 한다.

약 4천년 전 고대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왕이 만든 세계 최초의 성문법 함무라비 법전에도 ‘불평등’이 녹아 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논리는 일견 평등한 듯 보이지만 신분의 경계를 아우르진 못했다. 예컨대 노예가 노예를 살해하면 사형을 당했으되 귀족이 노예를 죽이면 주인에게 노예를 사주면 그만이었다. 유전무죄는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불문율이었던 모양이다.

글로벌 화두가 된 불평등, 문재인정부는 양극화 완화의 내공을 보여줄까. 일단 기대감은 가져볼 만하다. 국정기획자문위가 제시한 조세개혁 방향도 불평등 완화와 부합한다. 지난번 대선 때 빅3 후보를 유명 경제학자에 대입하면 문재인 대통령은 케인즈형이다. 시장주의자 홍준표 전 경남도지사는 하이에크에 가깝고, 기업 혁신을 강조하는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는 슘페터의 경제이론과 맥락이 닿아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6·10 민주항쟁 기념사에서 “소득과 부(富)의 불평등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12일 국회 시정연설에선 “경제 민주주의로 양극화를 완화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정부의 역할을 제고(提高)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미국의 소득 상위 10%의 소득 점유율은 1980년대 초반 30%대로 낮아졌으나, 최근 다시 대공황 직전과 비슷한 50%에 육박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떠받든 결과다. 시장주의 맹신에 대한 경종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장의 자율성을 거부해 빈곤을 해결해야 한다”며 방임으로 흐르는 시장주의를 경계했다. 시장에 개입해 불평등을 완화하자는 얘기로도 들린다. 하지만 기득권의 방호벽이 워낙 강고하다. 공권력을 가진 정부가 아니고서는 그 벽을 헤집어낼 재간이 없다. 케인즈주의자 문 대통령에게 기대를 거는 이유다. 박규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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