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솔향이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솔송주’의 품격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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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11   |  발행일 2017-08-11 제34면   |  수정 2017-08-11
푸드로드 경남 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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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에는 한 척의 방주로 변하는 화림동계곡 ‘거연정’(오른쪽). 무지개다리와 석담, 그리고 거대한 조각품 같은 너럭바위군이 주변 산세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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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 가문의 가양주인 솔송주는 경남 대표 명주다.

음청류를 파는 아낙네들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면서 틈틈이 텃밭에서 따온 콩잎을 다듬고 있다. 안동 등 경상도 반가에선 이 콩잎을 허투루 다루지 않는다. 콩잎은 물김치를 담글 때도 요긴하게 사용된다. 특히 ‘콩잎김치’는 경상도 반가에서만 볼 수 있는 빛나는 반찬. 서울·경기권에선 이걸 잘 모른다. 젊은 친구들은 콩잎을 ‘낙엽’으로 보기도 한다. 잘 쪄진 콩잎은 쌈으로 싸먹어도 식감이 좋다. 콩잎은 우거지나 시래기처럼 잘 말려 묵나물처럼 활용할 수도 있다. 콩잎과 함께 팥잎·깻잎도 반가의 대표적 식재료. 콩잎도 장아찌와 김치로 분류된다. 보통 간장물에 갈무리하면 장아찌, 젓갈류 및 마늘·고춧가루 등이 가미되면 김치가 된다. 콩잎은 장아찌보다 김치로 해먹어야 제맛이다. 그런데 콩잎의 섬유소가 여간 까탈스러운 게 아니다. 여러 차례 채즙을 빼고 부드럽게 달래줘야 된다. 요즘 세태로선 해먹을 엄두를 낼 수 없을 것 같다. 팥잎도 있는데 이건 김치보다는 부드럽게 장만해 칼로 잘 다져 비빔밥 고명으로 사용하면 된다. 깻잎류는 김치보다 장아찌로 절여 먹는 게 제격이다. 아무튼, 함양의 콩잎사랑은 안동 못지않았다.

한 아낙네가 “일두고택에 와서 고작 감주만 마셔서 되겠냐”면서 바로 옆에 있는 솔송주문화관으로 가보라고 독촉한다. 그래, 이제 일두 어른의 기품을 맛볼 차례다.

솔잎·솔순 재료로 한 일두家門 전통주
정종의 손녀가 시집와 빚은 후 16대째
현재 공방 ‘명가원’서 주조 등 대중화
발효주‘솔송주’·증류주 ‘담솔’로 생산

7개 폭포와 33개 沼 포진한 칠선계곡
호젓함이 일품인 서하면 화림동계곡
계곡 한복판 거연정은 절대 휴식 명소


◆경남 대표주인 솔송주

팔도에는 이런저런 향토 명주가 있다. 그 향토주는 대를 이어 내려온 것이다. 일명 ‘가양주(家釀酒)’다. 어느 술이 더 좋은가를 따지는 건 별 의미없는 일.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 삶의 전부였던 예전 반가의 삶. 통과의례 때 등장해야만 했던 가양주는 천지인의 숙성된 기운을 고스란히 담은 내림음식의 백미였다. 종부 등이 직접 담근 술로 기제사를 봉행했다. 그런 술이 상업적 거래수단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선인도 시대를 따라야 하는 법. 이젠 지자체의 주요 소득원이다. 각기 최고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온갖 마케팅을 벌인다. 나라에선 국주(國酒)급 전통주 명인에게 ‘식품명인 27호’란 칭호를 부여한다.

일두 가문의 대표주인 솔송주는 2012년 경남 무형문화재 35호로 지정된다. 16대 손부인 박흥선씨가 96년부터 솔송주 대중화에 나선다. 현재 ‘명가원’이란 공방에서 술을 빚는다. 이 술은 일두 가문(하동정씨)의 가양주를 표준으로 해서 양산된다. 정종의 손녀가 일두 집안으로 시집와서 빚기 시작했다. 술에 솔잎과 솔순이 들어가서 ‘솔송주’라 불린다.

이른 봄에 빚는다. 솔순은 매년 4월 중순에서 5월 초 개평마을 인근 산에서 채취한다. 누룩은 밀을 빻아서 밀기울로 만들고 아랫목에서 3주 정도 띄운다. 누룩과 함께 밑술을 제조하고 그 다음 고두밥을 찌고 쪄낸 해묵은 솔잎에 솔순을 섞어 알맞은 온도에서 발효시킨다. 숙성이 끝나면 탁해지고 걸쭉해진 술을 체와 창호지로 걸러내고 20일 뒤에 맑은 청주를 분리하면 된다. 청주는 ‘솔송주’, 증류주는 ‘담솔’이란 이름으로 팔린다.

가양주도 두 종류가 있다. 13도짜리는 ‘청주’, 소주고리를 통해 3번 증류한 40도짜리는 ‘증류식소주’가 된다. 그런데 청주와 증류식소주의 술 ‘주’ 자가 각기 다르다. 일반 술에는 주(酒), 증류식소주에는 주(酎)를 사용해야 된다. 안동소주도 ‘소주(燒酎)’로 표기해야 맞다.

팔도를 대표하는 이런저런 가양주가 있다. 솔송주는 경남, 안동소주는 경북, 송화백일주와 전주이강주는 전북, 담양추성주는 전남, 한산소곡주는 충남, 오메기술은 제주도를 대표한다. 솔송주의 인기는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북한 방문 때 공식 만찬주로 선정된 뒤부터 시작된다.

담솔 한 모금을 눈감고 들이켰다. 안동소주를 먹었을 때 그 화한 목넘김의 무게감이 담솔에서도 감지됐다. 은은한 솔향이 목구멍을 따라 바람처럼 타고 내려갔다. 각종 화학첨가제가 전제되지 않은 술이라 혀끝에 감칠향이 감돌지 않는다.

◆화림동계곡 그리고 거연정

땅밑으로 스며들지 못한 물줄기. 흐르는 강물이 되거나 고인 물이 된다. 옛 풍류인들은 고인 물도 크기와 깊이에 따라 호(湖), 담(潭), 지(池), 소(沼), 연(淵) 등으로 분류했다. 가령 폭포 아래 형성된 웅덩이는 ‘연’이라 하고 너럭바위에 형성된 돌웅덩이는 ‘소’, 여느 강물이 호수처럼 고인 데는 대중소에 따라 ‘호·담·지’로 구분했다. 태산준령의 아랫도리가 풍우에 오래 시달리면 그 밑동이 거대한 너럭바위로 드러난다. 그 너럭바위가 기기묘묘하면 ‘절창 수석’으로 주목받는다. 길게 드리워진 바윗돌과 장장하게 펼쳐진 반석이 물을 품으면 ‘석담(石潭)’이 된다. 혹서기 최고의 보양식은 ‘쉼’. 그 쉼도 심산유곡의 너럭바위 곁 정자 그늘만 한 것도 없다. 여름 나그네도 그걸 바라고 함양으로 온다.

함양권 지리산·덕유산은 ‘칠선계곡’(18㎞)과 ‘화림동계곡’(10.1㎞)을 빚었다. 함양을 넘어 국가대표급 계곡이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물이 마천면 의탄리까지 뻗치는 칠선계곡. 여기에 무려 7개의 폭포와 33개의 소가 포진해 있다. 칠선계곡의 기운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작은 암자 벽송사. 한때 빨치산의 거점 중 한 곳이자 소설가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 첫 장면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전국에 이런저런 계곡이 있는데 칠선·화림동계곡을 내밀면 다들 입을 다문다. 압권이다.

예전 함양 유생들은 두 계곡에서 품성을 연마했다. 한 곳에만 편중하지 않았다. 칠선계곡에서는 ‘기상’, 화림동계곡에 와서는 ‘풍류심’을 일궜다. 두 계곡이 합쳐져야 ‘동정일심(動靜一心)’의 경지가 된다.

덕유산에서 내린 물은 봉전마을, 오리동마을, 정마을, 월림마을, 황대마을 등을 거치면서 남강천이 된다. 이 강이 진주 남강의 상류. 대다수 관광객은 국민관광지로 유명해져버린 용추계곡과 농월정부터 찾는다. 여긴 이미 오토캠핑족에 의해 점령돼 버렸다. 북적대는 곳을 피해 서하면 봉전리 화림동계곡의 백미 정자인 ‘거연정(居然亭)’을 찾았다. 고사된 느티나무가 석담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막막함과 호젓함, 그리고 삶의 덧없음 같은 심사가 피었다 진다. 그 어떤 부귀공명으로도 독점할 수 없는 절대급 풍광 앞에서 무심이 아니라 무력(無力)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재충전이란 자신의 무력함을 객관화하는 또다른 기회이다.

예전엔 다들 농월정을 으뜸으로 쳤다. 2003년 화재로 전소돼 2년전 복원되는 바람에 예전의 퇴락미는 좀처럼 찾을 수 없다. 이젠 거연정의 운치가 더 좋다. 거연정이 딛고 있는 끝없이 이어진 암반은 오랜세월 별별 물줄기에 시달려 이젠 하나의 설치예술품으로 변해 있다.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 훼철됐다가 1872년 중건된다. 여느 정자는 거의 물가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거연정은 보란 듯이 계곡의 한복판에 서 있다. 폭우가 내리면 또다른 ‘방주(方舟)’가 된다. 거연정은 무릉도원인데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식당들은 뭔가를 ‘호시탐탐’하는 것 같다. 성속(聖俗)이 이렇게 지척에 있어도 되는가.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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