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대한민국 첫 아나키스트 대회…‘무정부주의자의 본고장’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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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11   |  발행일 2017-08-11 제34면   |  수정 2017-08-11
‘반골의 땅’ 안의면
韓 아나키즘 대부 하기락 교수의 고향
첫 아나키스트 詩人 이진은도 이곳 출신
소설가 이외수 고향은 바로 옆 수동면
연암이 첫 물레방아를 세운 고장이기도

안의(安義)면으로 가면서 아나키스트를 품었다. 그걸 생각하면서 ‘아나키스탕’을 지어냈다. 아나키스탕, 그래 난 안의갈비탕의 아호로 지어주고 싶다. 그런 내력이 안의에 있다.

지금은 함양군이 안의를 품고 있지만 실은 안의가 함양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의는 풍족하면서도 기질적으로는 꼬장꼬장하다. 소백산맥, 덕유산 등에 막혀 풍수해도 별로 당하지 않았다. 영남사림파의 기질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일제강점기 총독부는 안의의 기질이 워낙 반골스러워 폐군(廢郡)해버린다. 북상·마리·위천면은 거창, 안의·서상·서하면은 함양에 합쳐버린 것이다. 원래 생활권으로 본다면 안의는 함양보다 거창과 더 밀접하다. 거창 사람들은 안의에 대해 상당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흉년과 장마가 잦았던 그 시절. 살길이 막막해진 거창인들이 상대적으로 풍족한 안의에 아쉬운 소리를 많이 했다. 오죽 했으면 ‘안의 죽은 송장 하나가 살아있는 거창 사람 셋을 감당한다’고 했을까.

그래서 그런지 안의면은 훗날 ‘아나키스트 고향’이 된다. 꼬장꼬장한 성정을 가진 여러 지식인이 여기와 관련이 된다. 일두와 연암 박지원은 안의현감을 지냈다. 연암은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시도한다. 당시 조선 식자의 문체는 거의 한자투였다. 하지만 연암은 ‘열하일기’처럼 현실감있는 구어체적 표현을 고집했다. 그는 4년간의 안의현감 시절 연자방아시대를 끝내려고 물레방아 인프라를 안의에 구축해준다. 그걸 기념하기 위해 상원리 용추계곡 발치, ‘심진헌’이라는 이름의 민박집 옆에 국내 첫 대형 물레방아를 복원해 놓았다. 지름 10m, 폭 2m 크기다. 인근 주민들은 용추계곡의 물길을 이용해 물레방아를 돌리고 농사에 활용했다. 물레방아의 본고장임을 알리고 떡 만드는 체험을 널리 알리고자 ‘물레방아떡마을’도 만든다.

한국의 마지막 아나키스트 철학자로 불리는 경북대 하기락 교수의 고향도 안의면 당본리다. 그는 46년 한국 첫 아나키스트 대회를 자기 고향에 유치했다. 안의중학교를 설립한 이진은은 한국 첫 아나키스트 시인으로 유명하다. 이곳 출신 지식인 중 상당수는 일본 도쿄제대, 평양, 서울 등으로 유학을 떠났다. 자연 진보적인 지식인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젊은 시절 아나키스트로 살던 소설가 이외수의 고향도 안의면 바로 옆에 있는 수동면 상백리 계실마을. 현재 함양군에서 강원도 화천에 있는 이외수와 접촉, 고향으로 귀향시키는 작업을 추진 중이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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