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북 부안 채석강·적벽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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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18   |  발행일 2017-08-18 제36면   |  수정 2017-08-18
변산반도엔 江이라 불리는 바다가 있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북 부안 채석강·적벽강
채석강의 해안 단애. 약 7천만 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의 퇴적암층으로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모습이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북 부안 채석강·적벽강
아름다운 적벽강. 주상절리와 해식동굴이 선명하게 보인다.

저녁에는 채석강을 거닐었다. 붉은 해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내내 지켜보았다.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 곳을 바라보며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아침에는 적벽강을 거닐었다. 아무도 없는 해변은 증기처럼 뜨거웠고 속이 맑게 들여다보이는 바닷물은 꿈처럼 따스했다.


수만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한 채석강
7천만년 달과 파도가 만든 퇴적암층
李白이 달에 취한 강과 닮아 같은 이름

소동파 노닐던 적벽과 흡사한 적벽강
투명한 물빛과 자그마한 자갈들의 해변
채석강과 함께 검붉은 落照 풍광 압권

◆격포해변 채석강의 가장자리에서

미리 썰물 시간을 숙지하고 떠난 길이었다. 채석강은 하루 두 번, 달이 조화를 부려 바다가 물러났을 때만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물때표와 같이 익숙하지 않은 것을 해석하는 일은 늘 스스로를 의심하는 눈초리로 마무리된다. 일몰은 일곱 시 반경. 눈치껏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누구는 두 시간 전이면 충분하다 하고 누구는 일곱 시에 맞춰 가라 한다. 채석강에 도착한 것은 소심한 한 시간 반 전이었다.

채석강은 이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층층이 쌓여 수직으로 솟은 해안 절벽에 한번 눈길을 주고는 여전히 지글거리는 대기를 피해 채석강의 가장자리에 올라서 있는 식당에 다리를 뻗었다. 창밖으로 격포해변이 한눈에 펼쳐지고 채석강의 파식와(波蝕窪) 일부가 내려다보이는 집이었다. 바위틈에 포획되어 빠져나가지 못한 바다가 군데군데 바위 면에 고여 있었고, 평평해 보이던 파식와의 촘촘한 층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안고 조심조심 중생대 백악기의 땅을 걷고 있었다.

채석강은 변산반도의 가장 서쪽, 부안 격포해안의 왼쪽 곶인 닭이봉 아래에 드러나 있는 해안절벽과 바다를 아우르는 이름이다. 우리가 만지고 걷고 기대고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약 7천만 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에 퇴적한 퇴적암층이다. 그 아래에는 선캄브리아대의 화강암과 편마암이 숨죽이고 있다. 채석강의 퇴적층을 보통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하다’고 표현하는데, 사실 잠깐 대구역 근처의 오래된 헌책방을 떠올리기도 했다.

누구였을까, 채석강(彩石江)이라 이름 붙인 이는. 중국의 채석강과 닮아 채석이라 했다지만 한자가 다르다. 중국의 채석강은 장강(長江)변의 채석기(采石磯)를 말한다. 1161년 금(金)나라가 장강을 건너 남송(南宋)에 침입하려다가 패했던 채석지전(采石之戰)이 일어난 곳이고,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져 숨졌다는 곳이다. 이태백의 묘는 채석강변에 있다. 그가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믿는 쪽이 훨씬 운명적이고 낭만적이다. 채석강이라 부르면 그 음성 속에 저절로 달과 시인이 떠오른다. 이름을 지은 이는 그 음의 파장을 사모했을지도 모르겠다. 뜻이야 우리의 채석이 좀 더 반짝반짝하지 않는가.

◆채석강의 낙조

채석강 바위 위에 서자 생명 있는 작은 것들이 화들짝 사방으로 흩어진다. 바위의 가장자리, 태양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선다. 사과가 대지에 떨어지듯 태양이 바다로 떨어지고 있다. 그 속도는 변함이 없을 텐데 마치 엔진을 단 듯 빨라진다. 물놀이 하던 가까운 바다의 사람들도, 그늘 속에 누워있던 해변의 사람들도, 채석강의 바위 위를 거닐던 이도 모두가 가만히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꿈틀거리는 태양의 가장자리가 바다에 잠기고 붉게 물든 대기마저 푸르게 식을 때까지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피조물이자 창조자인 바다만이 거대한 얼굴의 근육을 천천히 이완시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요히 검어졌다. 하늘의 자유로운 질서와 바다의 정연한 자유에 압도된 최초의 낙조였다.

◆적벽강과 변산해변로

느지막이 눈을 떠 가뿐히 길을 나선다. 왜 이제야 왔을까 보다는 지금이라서 더 좋다는 썩 괜찮은 긍정심이 든다. 자연밖에 없는, 자연만으로 숨 막히게 넘치는 변산해변로를 달리며 긍정의 원인이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왔음을 느낀다. 채석강을 떠난 지 얼마 안 돼 적벽강(赤壁江) 이정표를 만난다. 초입의 펜션 몇 채를 지나 좁은 언덕길을 오르면 잠시 후 시야가 확 트이는 넓고 평평한 언덕바지에 닿는다. 적벽강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자리다.

적벽 역시 중국에서 온 이름이다. 삼국시대 오(吳)나라 손권(孫權)의 장수 주유(周瑜)가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전선(戰船) 모두를 불살랐던 적벽대전의 그 곳이자, 송나라 때의 대문호 소동파(蘇東坡)가 노닐던 곳을 말한다. 소동파가 우리나라 산수의 아름다움을 듣고 찾아와 이곳의 절경을 보고 적벽강을 옮겨놓은 듯하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적벽강 꼭대기에는 바다의 수호신인 수성할머니를 모신 수성당이 있다. 여덟 딸을 차례로 시집보내고 막내딸만을 데리고 살면서 서해의 파도로부터 어부들을 지켜주었다는 전설의 할머니다.

아무 말 없이 계단을 내려가 바다로 간다. 자그마한 자갈들의 해변이다. 조금 떨어진 해안의 갯바위에 몇몇 사람이 보일 뿐, 적벽의 해변은 물속처럼 고요하다. 물은 투명하고, 물속의 돌들은 무지개빛 나는 물방울 같다. 석양이 비치면 적벽은 더욱 붉은색으로 물든다고 한다. 적벽의 바다는 옛 사람들이 즐겨 말했던 ‘하늘과 땅이 숨겨 놓은 곳’이라거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곳’이라거나 ‘숨 막히게 아름답다’는 말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찜통 속의 만두처럼 숨 막히는 정오이기는 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12번 대구광주고속도로를 타고 광주방향으로 간다. 담양 지나 담양분기점에서 고창방향으로 간 후 고창분기점에서 서해안고속도로 부안, 군산방향으로 간다. 줄포IC에서 나와 30번 국도를 타고 격포, 채석강으로 가면 된다. 채석강에서 변산해안로를 타고 북쪽으로 조금 가면 적벽강이다. 입장료는 없고, 주차장도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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