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인간에 대한 예의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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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02   |  발행일 2017-11-02 제31면   |  수정 2017-11-02
[영남타워] 인간에 대한 예의

여고 시절 우리 집은 학교 담벼락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체육시간이나 쉬는 시간, 운동장에서 올려다보면 가끔씩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 엄마를 볼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의 첫 아파트였다. 그 아파트로 이사를 한 건 내가 길 건너에 있는 여고에 입학하면서였다. 덕분에 만원버스에 시달린 기억없이 평화롭게 등하교 할 수 있었던 행복한 여고시절을 보냈다. 그때부터였을까. 좋은 학교에 대한 나의 기준은 이렇게 정해졌다. 집에서 가까운 학교.

아이 둘을 키우면서도 이 기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공교육의 시스템이란 학교마다 크게 다를 바 없고, 교사들의 수준 역시 대단한 차이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여러모로 좋다. 걸어서 10분 이내에 초·중·고등학교가 모두 자리하고 있어서다. “엄마, 나도 버스 타고 학교 다니고 싶어.” 초등학교 때 딸아이가 철없이 내뱉은 투정을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는지 모른다. 물론 딸아이의 좋은 학교에 대한 기준 역시 확고하다. 급식이 맛있는 학교. 지금 딸아이는 급식이 맛있는 집 가까운 학교에 다니고 있다. 행운이라 생각한다.

아파트 담벼락에 초·중·고가 졸졸 늘어선 탓에 아침마다 아파트는 그야말로 북새통이다. 출근하는 차량과 등교하는 학생들이 뒤엉켜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도로가 아닌 탓에 아이들은 무심하게 아파트 앞마당을 활개치며 다닌다.

그런데 어느날 아파트 벽면에 커다란 플래카드가 나붙었다. ‘외부학생 아파트 단지 내 등교 금지’. 플래카드를 발견한 순간의 참담함이란. 플래카드에 뭐라고 써 있든 아랑곳 않고 평소처럼 재잘대며 아파트를 가로지르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이 오히려 고마울 정도였다. 애들아, 제발 저 플래카드는 보지 말렴. 보고도 못본 척 지나가 주렴. 아이들에게 플래카드는, 그 플래카드를 내건 어른들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나의 불편일랑 절대 참지말라? 타인의 고통 따윈 무시하라?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곳이다?

어른들이 막아 놓은 아파트를 돌고 돌아 10~20분을 더 걸어 학교로 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때의 마음을 상상해 본다. 늦잠을 자서 지각을 한 아이도 있을 테고, 아침을 거르고 학교로 종종걸음 치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 가까운 길을 두고 돌아가는 시간은 얼마가 됐든 결코 짧을 수 없다. 먼 길을 돌아가는 동안 어른들을 원망하고, 그러면서 그 어른들을 배워갈 아이들이 불쌍하고 무서웠다.

부모의 마음이 다를 리 없다. 가까운 등교길을 두고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아이가 내 아이라면 그 플래카드는 나붙지 않았을 것이다. 몇시간씩 걸리는 먼 곳의 학교를 다녀야 하는 아이가 내 아이라면 강서구 주민들도, 동해시 주민들도 단언컨대 특수학교를 설립해선 안된다 막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를 짓게 해달라 무릎 꿇는 부모도, 한마디 말도 못하고 죄인처럼 끌려나가야 할 부모도 없었을 것이다.

마을 이미지가 훼손된다며 특수학교 설립을 막고 나선 어른들 탓에 최근 5년간 서울을 포함한 6개 시·도에서 초·중·고 과정 특수학교가 설립된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서울의 경우는 2002년 이후 15년째 설립된 학교가 없다. 2013년 출범한 세종시도 5년째 특수학교 신설이 전무한 상태다. 특수학교의 신설이 이뤄지지 않는 동안에도 특수교육 대상자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인류의 역사가 발전했다는 것은 삶의 조건이 나아졌다는데 있지 않다.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삶,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온전히 획득하고 현실이 그것을 뒷받침한다는 의미다. 물질적 풍요로 경제적 기반이 나아질수록 현대사회가 차별과 격리에 대해 늘 경계해 온 것은 이 때문이다. 조그만 차이에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상호적이다. 함부로 던지는 차별과 멸시, 적의는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온다.

이은경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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