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도시 대구 .3] ‘능성구씨 선조들의 뜻을 기린…’ 동화천변 송계당과 다양한 유적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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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07   |  발행일 2017-12-07 제13면   |  수정 2018-01-26
영원한 고려 신하 기리는 송계당…동화천변에 물처럼 바람처럼 350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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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북구 서변동에 자리한 송계당. 고려 말 두문동 72현 중의 한 분인 송은 구홍과 그의 8세 손 첨정공 계암 구회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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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북구 동변동에 자리한 표절사는 1600년(선조 33)에 구회신이 지은 구홍의 사당이다.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됐다가 2007년 복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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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사 아래에는 재실이자 강학의 장소였던 화수정이 위치해 있다. 원래 이름은 ‘포금정’이었지만, 19세기 말 문중이 번성한다는 의미의 ‘화수정’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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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지산(函芝山) 망일봉(望日峯)과 화담산(花潭山) 학봉(鶴峯)이 마주본다. 그들 사이로 동화천 옥계가 흐른다. 천변의 침식된 벼랑의 배후 또는 퇴적된 평야의 배후에 사람이 산지는 오래 되었다. 천은 이편을 동변, 저편을 서변으로 나눔과 동시에 충만함과 아름다움을 골고루 나누어주며 ‘무태(無怠)’라는 이름으로 양안을 결속시켰다. ‘게으름이 없다’는 무태는 고려 왕건의 시대에 생겨난 이름이지만 봉우리 아래 단상과 같은 기슭을 중심으로 일족이 모여 세가를 이루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다.

구홍·구회신 호를 딴 송계당
1659년에 세우고 1960년 중건

능성 구씨들의 성지 무태지역
물소재·능성세가 등 유적 즐비

화담산 학봉 밑 구씨 세거지엔
동화천변 따라 화수정·표절사


#1. 동화천과 함께해 온 ‘송계당’

깜깜한 그늘이다. 무장한 은행나무가 100여 년 쌓은 짙은 그림자로 감춘 길이다. 이파리 사이에 맺힌 이슬 같은 빛을 쫓으면, 예닐곱 개의 좁은 돌계단이 계류처럼 부드럽게 흘러 햇살 가득한 흙돌담 길로 인도한다. 높고 낮은 따스한 담 너머로 무심하게 고개 내민 수목들이 향기로 소요하고, 담장에 늘어진 능소화와 하늘에 뿌리내린 배롱나무가 여윈 몸으로 지난 계절을 더듬는다. 고졸한 매혹으로 상승하는 길 끝에 청기와를 인 문이 열린다.

함지산 망일봉 자락의 주름에 순응해 층층단이 진 소박한 대지를 흙돌담으로 둘러싼 자리, 학봉을 마주하며 동화천변의 한젓들, 방울들, 앞들을 내려다보았을 자리에 정자 하나가 앉아 있다. 고려 말 두문동 72현 중의 한 분인 능성구씨(綾城具氏) 시문정공(諡文貞公) 송은(松隱) 구홍(具鴻)과 그의 8세손인 첨정공(僉正公) 계암(溪巖) 구회신(具懷愼)을 기려 세운 송계당(松溪堂)이다.

‘의롭지 아니한 부귀는(不義之富貴)/ 내게 뜬구름과 같도다(於我如浮雲)/ 돌밭에도 임금의 봄은 서려 있으니(石田王春在)/ 호미를 들고 저물도록 김을 맨다오(鋤朝暮耘)’

이 시는 태조 이성계가 좌정승(左政丞) 벼슬을 제안하면서 세 차례나 불러도 끝내 거절했던 구홍의 대답이다. 그는 운명 전 후손들에게 ‘조선이 준 관직 이름으로 나를 부르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새 왕조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던 후손들은 명정(銘旌)에 ‘좌정승’이라 표기한다. 그러자 갑자기 날카로운 회오리바람이 솟구쳐 명정을 찢어 놓기를 세 차례, 결국 그는 영원한 고려의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으로 영면에 들었다.

구홍의 8세손인 구회신은 무태 능성구씨의 입향조다. 의성에서 태어난 그는 29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을의 장정들과 창의해 팔공산에서 북상하는 왜적을 막았다. 정유재란 때는 류성룡의 군관으로 활약하며 울산의 서생포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웠으며 전란 후에는 공적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무태에 정착했다. 이후 1599년 임란 공훈으로 훈련원 첨정에 올랐으나 중앙정계의 어지러움을 뒤로하고 돌아와 조용히 독서로 소일했다고 전한다.

송은 구홍과 계암 구회신의 호를 딴 송계당은 효종 10년인 1659년 후손들에 의해 지어져 1960년에 중건되었다.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에 청기와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 양쪽은 온돌방으로 방 앞에는 단을 높여 난간을 두른 누마루 형식의 툇마루를 두었다. 송계당 뒤에는 별도로 담을 두르고 문을 낸 설단(設壇)이 있다. 단에는 능성구씨 선조들 중 묘가 실전된 두 분의 비석이 모셔져 있다. 그들은 구홍의 아들인 매헌(梅軒) 구종절(具宗節)과 손자인 송계(松溪) 구익령(具益齡)이다.



#2. 물소재, 능성세가, 창포재, 모선당

송계당 왼쪽 담 너머에는 구재서(具在書)의 재실인 물소재(勿小齋)가 자리한다. 문행으로 추앙받았던 그는 항일 독립운동가로 옥중 순절한 소봉(小峯) 구찬회(具燦會)의 아버지다. 물소재는 정면 4칸에 오른쪽 한 칸 앞에만 돌출된 누마루를 둔 ‘ㄱ’자 형식의 건물이다. 재실 옆에는 아름드리 팽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어엿하다.

물소재와 송계당 아래 낮은 자리에 ‘능성세가(綾城世家)’가 있다. 구회신이 입향한 이래 그 자손들이 살아온 집이다. 소봉 구찬회가 이 집에서 태어났다.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에 옛 창고가 있고, 그 뒤로 흙돌담과 협문으로 구획된 3칸 건물이 남향하고 있는데 사당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뒤로 본체인 일자형의 5칸 건물이 들어서 있다. 중건을 거듭하며 1920년에 지어졌다는 집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능성구씨 집안의 집이 아닌 개인 소유의 민가로 되어 있다.

망일봉 남쪽 골짜기 깊숙한 곳에는 창포재(菖蒲齋)가 있다. 구회신의 재실로 인조 17년인 1639년 그의 아들인 치암(癡庵) 구인계(具仁繼)가 건립한 것이다. ‘대구읍지’에 ‘창포재는 첨정 구회신의 유적’이라는 기록이 있다. 1944년에 정면 4칸, 측면 1칸에 팔작지붕 건물로 중건하였다가 2000년에 중수했다. 창포재 앞에는 수령 약 400년의 모과나무 한 그루가 서서 오랜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넓게 구획된 경내에는 1981년 창건된 모선당(慕先堂)도 함께 자리한다. 능성구씨 5·6·7대조의 재실이다. 곁에는 세 선조의 추모비와 모선당 건립 기념비가 서있고 주변으로는 연못과 광장 등이 조성되어 있다. 속칭 무태 능성구씨들의 성지라 할 만하다.

#3. 화수정과 표절사

화담산 학봉 아래 동화천의 동변 역시 능성구씨 세거지다. 망일봉을 마주하며 동화천변의 눈부신 버드나무와 갈대밭을 내려다보았을 높은 자리에 화수정과 표절사가 있다. 표절사(表節祠)는 선조 33년인 1600년에 구회신이 지은 구홍의 사당이다. 무태의 구씨 유적들 중 가장 앞선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그가 무태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이 사당을 짓는 일이었다. 강 건너 동변의 높은 자리에 터를 마련한 것은 언제나 숭앙하여 바라보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구회신은 타계 이후 자신이 조상을 위해 세운 사당에 함께 제향되었고 그 후 자헌대부를 지낸 구홍리(具洪履)가 추가로 배향되었다. 표절사는 고종 8년인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2007년 복원되었다.

표절사 아래에는 재실이자 강학의 장소였던 화수정(花樹亭)이 자리한다. 정면 5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육중한 건물이다. 특히 화수정은 구한말의 많은 지사들인 면암 최익현(崔益鉉),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 등과 같은 분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처음 이름은 포금정(抱琴亭)이었다고 한다. 팔공산과 금호강을 담은 이름이었다. 화수정으로 변한 것은 19세기 말 근와(謹窩) 구연간(具然侃)에 의해서다. 그는 ‘화수정원운(花樹亭原韻)’에 ‘선조들께서 문 안에 이 강당(講堂) 지었는데(自先後堂成)/ 팔공산이 첩첩 두른데 금호강물은 비단같이 맑도다(公岳重重錦水淸)/ 한 뿌리 화수가 일천세에 이어가니(一根花樹於千世)/ 원하건대 여러 종친들 이름의 뜻 돌아보세(願使諸宗義顧名)’라 했다. 문중이 화수에서 꽃이 피는 것과 같이 화목하게 번성할 것을 당부하는 글이다.

매년 봄 따뜻한 바람에 버드나무 가지마다 싹이 돋을 무렵이면 전국 각지의 능성구씨들이 송계당에 모여 한식일 향사를 한다. 오래전 송계당에서, 표절사에서, 마주보며 함께 내려다보는 천과, 들과, 갈대밭과, 모래밭은 눈부셨을 것이다. 지금 키 큰 아파트가 무리지어 그 눈부신 것을 차지해 버린 듯해도 ‘동화천의 버드나무(前川楊柳)’는 세계에 유효하다.

‘따뜻한 바람이 잎마다 싹이 돋는 것을 금하지 아니한다.(好風葉葉不禁開)/ 한번 앞내를 바라보니 금색의 나무가 심겨 있는 것 같구나(一望前川金色栽)/ 젊은이와 늙은이 버들가지 흩날릴 때를 기다렸는데(若待絮飛春且老)/ 때가 이르니 모름지기 냇가에 가서 감상하며 배회하네.(及時須賞往徘徊)’ (근와(謹窩) 구연간(具然侃) 화수정 8경 中 6경)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도움말=능성구씨 종친회
공동 기획 : 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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