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칼럼] ‘품격 있는’ 직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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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13   |  발행일 2017-12-13 제30면   |  수정 2017-12-13
값싼 술집의 월급쟁이 점장
미성년 출입시킨 죄로 재판
허위증언 증명해 무죄 판결
직업에 대한 편견에 빠져
내심 못 믿은 내가 부끄럽다
[수요칼럼] ‘품격 있는’ 직업인
정혜진 (국선전담변호사)

갑자기 건물이 크게 흔들린다. 제멋대로 흔들리는 아기 침대를 직원들이 재빠르게 움켜잡는다. 한 손으로 두 개씩, 침대 네 개를 동시에 움켜쥔 직원이 있고, 안고 있던 아기를 감싸며 몸을 낮추고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는 직원도 있다. 한 방송사 뉴스로 보게 된 포항 지진 때 어느 산후조리원 신생아실 CCTV 영상이다. 자신의 일에 충실했을 뿐인 평범한 간호조무사들의 모습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은 제대로 안 하고 엉뚱한 수작을 벌였다고 수사받고 재판받는 뉴스 속 ‘높으신’ 분들에 대비되어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 일로 직업인의 품격을 새삼 생각했다. 직업의 귀천(貴賤)과 상관없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할 때 우러나는 그런 품격 말이다. 국선변호를 하면서 그런 품격을 가진 직업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의 결백을 뒤늦게 믿기 전까지 직업에 대한 편견에 빠져 그 품격을 짐작조차 못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의 직업은 도심 유흥가 값싼 술집의 월급쟁이 점장이었다. 여고생 4명의 신분증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미성년자를 술집에 들어오게 해 청소년보호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30대 중반의 그는 예의바르고 착해 보였지만, 나는 몇 가지 이유로 내심 그의 말을 믿지 않고 재판에 임했다.

일단 유흥업소 직원의 말을 신뢰하기 어려웠다(겉으로는 직업에 대한 편견이 없는 척하지만, 이 얼마나 위선이었던가!). 범죄경력 조회를 보니 청소년보호법 위반으로 세 번이나 수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두 번은 ‘혐의없음’으로 불기소 결정, 한번은 무죄 확정판결을 받아 사실 처벌받은 적은 없었는데, 아니 땐 굴뚝에 왜 연기가 ‘이토록 여러 번 나랴’ 싶었다(변호인이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무죄추정 원칙은 어디에 버려두었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17세 여고생 4명이 일부러 그를 음해하는 주장을 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여고생 4명은 주말 심야에 20대 남자 4명한테 헌팅당해(?) 같이 그 술집에 왔는데, 헌팅 남자들은 누가 봐도 성인이라 신분증 확인 절차 없이 그냥 들어가고 자기들은 남자들이 빌려 준 남자 신분증을 제시하고 그 술집에 들어갔다는 거다. 일일이 신분증 확인을 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경우에만 들여보냈다는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여학생 4명이 모두 위조된 신분증을 제시했고 똑같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유흥업소 직원 말을 믿겠는가, 여고생 4명의 말을 믿겠는가!).

반전(反轉)은 헌팅 남자들이 증언하면서부터 시작됐다. 4명이 하나같이 자신들은 결코 신분증을 빌려준 적이 없다고 했다. 남자들이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어 보였다. 그동안 유죄 확신에 차 형식적으로만 변호인 역할을 했던 나는 ‘아차!’ 싶었다. 다시 수사 기록을 보니 여학생들의 말에 비합리적인 정황이 곳곳에서 보였다. 그제야 이런저런 증거를 제출하고, 장문의 변론서면을 내는 등 호들갑을 떨었다.

이번이 그에게 네 번째 청소년보호법 위반 사건이었다. 한번 사건이 되면 경찰서, 검찰청, 법원에서 나오라고 하는 대로 나갈 수밖에 없다. 간단한 사건이라도 한번 출석하면 한나절이다. 월급쟁이 직원으로서는 시간도 부담이고, 자신의 결백이 밝혀질지 불확실한 상태이니 그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술집을 하다 보면 그런 사건을 피해갈 수가 없다고, 경쟁 술집에서 제보를 하고, 경찰이 손님끼리의 폭행 사건을 조사하다 오해하는 일도 잦아서 그 직업의 숙명으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다행히 무죄 선고를 나던 날, 그가 내게 감사전화를 해 왔다. 유흥업소 직원이라는 ‘하찮아 보이는’ 직업에 대한 편견에 빠져, 그 직업상 해야 할 일인 신분증 확인을 철저히 해 온 이 ‘품격 있는’ 직업인을 알아보지 못했던 나는 양심이 찔렸다. 한 해를 돌아보니, 뉴스에 차고 넘치는 지난 정권 ‘높으신’ 분들의 직업윤리를 비난하기에 급급했지, 정작 직업인으로서 나의 품격은 돌아보지 못했다. ‘너나 잘하세요’ 친절한 금자씨의 말이 새삼 명언임을 깨닫는 부끄러운 세모(歲暮)다. 정혜진 (국선전담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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