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영의 마음 톡톡] 작년 여름 유럽 여행의 기억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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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1-19   |  발행일 2018-01-19 제39면   |  수정 2018-01-19
커피 한 잔이면 족하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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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고 벌써 셋째 주지만 지난해의 여운이 남아서인지 지난해 6월 유럽 여행 갔을 때 본 두 사람이 생각났다. 한 사람은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제3의 노트르담 성당을 관광하고 있을 때였다.

현지 가이드는 열심히 성당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성당의 어마어마한 크기와 세밀한 조각 하나하나에서 번성하였을 그 시대의 상황을 읽어낼 수 있었다. 가이드의 말을 귓전으로 들으며 나는 광장 입구에 서서 세계 각처에서 온 많은 인종의 행색과 표정을 보느라 딴청을 하고 있었다. 그때 성당 입구 계단에 뚱뚱한 중년의 아랍여자 두엇이 스카프로 얼굴을 감싸고 앉아있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 그중 한 여자가 손 내밀며 구걸했다. 나는 경계심이 발동해 그 앞을 빨리 지나쳤다.

해 바뀌어도 떠오르는 他國의 두 사람
관광객 북적댈 때면 성당 광장으로 뚜벅
중앙에 픽 쓰러지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성당 한 바퀴 돌고오니 보이지 않던 그녀
이른 새벽 빵집 창밖 간절한 눈빛의 노인
허기 달래주고자 건넨 나의 동전 몇 닢
커피 한잔에 환해진 모습 보며 내내 흡족


가이드의 깃발을 확인하고 일행들 가까이 다가섰을 때였다. 손 내밀던 여자가 햇볕이 내리쬐는 광장으로 내려섰다. 자리를 옮기려나보다 했더니 갑자기 광장 중앙에 픽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광장 주변에 줄지어 늘어선 상점이 있고 많은 관광객이 왕래하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다. 나는 계속 그녀를 지켜보았다. ‘어쩌나 쓰러졌는데 왜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는 거지, 못 먹어서 영양실조인가’ 하며 근심되었다. 옆 사람에게 여자를 가리키니 신경 쓰지 말란다.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연기하고 있는 거란다. 여자는 기절한 듯 누워있다. 발가락이 고물거리니 슬리퍼가 바닥으로 떨어져 뒹군다. 나는 그 자리를 뜰 때까지도 마음이 쓰였지만 그녀 가까이 가지 못했다. 성당을 한 바퀴 돌아오니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또 한 사람은 룩셈부르크에서였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아침 산책이나 하려고 나섰다. 식사하고 바로 다음 행선지로 출발하면 이 나라를 못 보아 아쉬울 거 같았다. 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룩셈부르크 역은 특이하게도 오는 사람보다 떠나는 사람으로 붐볐다. 인근 다른 나라 도시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인가보다. 어디선가 빵 냄새가 났다. 사람들은 기차 타기 전에 빵과 음료를 사기 위해 줄 서 있었다. 나는 빵 냄새에 이끌려 그냥 지나 갈 수 없었다. 카푸치노 한 잔과 빵을 주문해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갓 구운 따스한 빵과 커피를 앞에 두고 있으니 마음이 그렇게 푸근할 수가 없었다. “진짜 카푸치노는 이 맛이구나.” 커피의 향과 맛은 매혹적이었다.

그때 창밖을 보니 한 노인이 이 빵집을 바라보고 서 있다. 내가 커피를 아껴가며 마실 동안 그 자리에 있다. 어린아이가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꼼짝 않고 달라붙어 있는 모습과 흡사했다. 노인이 이른 아침에 무언가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다. 노인은 노숙인 같았다. 배낭인지 침낭인지 달랑 하나를 메고 머리는 자다 깼는지 한쪽이 삐죽 솟아올랐다. 간절히 서 있는 노인의 허기를 달래주고 싶었다. 나는 동전 몇 개를 챙겨 노인의 손에 쥐어 주었다. 노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당연히 노인이 빵과 차를 주문할 줄 알았는데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나가면서 고맙다고 나에게 뭐라 뭐라 인사를 하며 간다. 아마 ‘신의 가호가 너와 함께하길 바란다’ 그런 의미 아닐까 짐작해 본다. 아, 저 사람에게는 아메리카노 한 잔이 아침 해장이구나. 커피를 즐기는 나에게 커피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왔다. 내가 누군가에게 몇 푼 안 되는 돈을 적선하고 상대가 그렇게 흡족해 가는 걸 보니 나도 덩달아 그날 내내 마음이 환했다.

영화 ‘타임아웃 오브 마인드(Time out of mind)’ 촬영 중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한 프랑스 여인이 뉴욕에 여행을 왔다가 식당에서 막 식사를 끝내고 나오는 길이었다. 그녀는 한 노숙인이 맨해튼 센트럴 파크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을 보고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음식 봉투를 그에게 건네며 “피자가 식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노숙인은 “복 받을 것이다”며 고마워했다. 사실은 리처드 기어가 노숙인으로 분장해 촬영 중이었다. 제작진들은 자연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멀리서 촬영했다. 현장에 있던 스태프와 감독은 그녀의 선행에 감동해 촬영을 방해한 그녀를 막지 않았고 리처드 기어도 그녀가 당황할까봐 노숙인인 척 연기를 했다. 리처드 기어는 사람들이 노숙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차갑고 혐오스럽게 느낀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이 영화 촬영 후 노숙인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가 전해준 피자의 온정도 한몫 거들었던 것 같다.

반년이 지났지만 먼 이국땅에서 매일 죽었다 살아나는 여자와 커피를 간절히 바라며 창 밖에 서 있을 그 노인이 떠올랐다. 그녀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북적대는 관광객들 틈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죽었다 살아날까? 노인은 여전히 매일 아침 어느 카페에서 해장 커피 한 잔이 그리워 창밖에 서 있을까?

인천공항에 새벽에 도착했다. 대구행 비행기를 기다려야 했다. 앉을 자리가 없었다. 얼굴을 가리고 네댓 명의 노숙인들이 좌석 한 줄씩을 차지하고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트에는 그들의 소지품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여행으로 누적된 피로에 지쳐 가물거리던 눈이 놀라 크게 떠졌다. 신이 사람을 세상에 내보낼 때는 뜻과 계획을 가지고 내보낸다 했는데 저들의 뜻과 계획은 무어고 내일의 희망은 있는 것일까. 가슴이 답답했다. “누군가의 삶을 내가 가져간 게 아닌가”라고 말한 어느 영화감독의 말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시인

#박지영은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했으며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2년 시 전문지 ‘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서랍 속의 여자’ ‘귀갑문 유리컵’ 등이 있다. 대구문학상, 금복문화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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