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콘서트는 피아노 치면서 이빨을 까는 것”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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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4-20   |  발행일 2018-04-20 제33면   |  수정 2018-04-20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방랑 피아니스트 윤효간
20180420
방랑 피아니스트 겸 역사디자인 전문 기획사 대표이기도 한 윤효간.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릿결이 인상적이다. 10년 단위로 변하는 자기 영혼의 나이테를 새로 세팅하려고 할 때 곧잘 안동시 풍천면 서애 류성룡의 선비정신이 숨어 있는 병산서원 만대루 근처를 서성거린다. 이즈음 낙동강변 절벽은 아코디언이 된다.

초봄의 햇살. 그걸 닮은 새싹과 꽃이 몽롱한 기세로 나를 바라본다. 어질어질한 환춘(幻春)의 바람은 ‘피아니스트’. 눈 감은 내 얼굴을 하나의 건반으로 보고 연주를 시작한다. 삶이 깊이를 유지하기 시작하면 너였던 시간이 나의 시간으로 귀환한다. 욕심뿐이다면 그 귀환은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한 50년간 줄기차게 피아노를 쳤다. 암흑의 피아노와 영광의 피아노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 2005년부터 연속 1천회 피아노 공연을 했다. 이 공연을 둘러싸고 미국 11개주 투어, 호주 투어, 70일간의 중국 오지 투어, 그리고 1천회 공연 기념 국내 70개 도시 순회공연을 쳐냈다. 생사를 분간할 수 없는 미국 데스밸리, 천길 낭떠러지를 지나갔던 중국 오지 투어버스, 때론 전투비행장 격납고 앞에서, 또 때론 울산 간절곶 바닷가를 배경으로 연주를 했다. 공연이라기보다 ‘음악수행’이었다.

“50년간 줄기차게 친 피아노
2005년부터 연속 1천회 공연
美 11개주·호주·中오지 투어
일상이 무대로 보이기 시작
연주 옆에 이야기 포개
타이틀은 ‘피아노와 이빨’

월드나눔 공연하면서
역사·정신문화 소중함 절감
‘역사&포스터’디자인팀 꾸려
세종대왕 진가 제대로 조명
뉴욕·런던 등 플래시몹 계획”



이젠 피아노를 벗어나 인간을 연주하고 싶다. 사람을 인간의 반열로 격상시켜주는 건 ‘역사’. 난 역사를 연주하고 싶다. 한국사를 제대로 연주하고 싶은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악기만 연주했는데 그건 한계가 있었다. 연주가 끝나면 관객은 자신의 시간 속으로 가버렸다. 연주 옆에 이야기를 포갰다. 그래서 내 콘서트 타이틀은 ‘피아노와 이빨’이다.

그래 연주하면서 인문학적으로 이빨을 까는 것이다. 지극한 연주, 그건 귀와 눈을 건드리지 않는다. 영혼을 건드린다. 하지만 지난 시절 난 ‘감각’뿐이었다. 그 감각 끝에 늘 흥분과 격정이 달려 있었다. 삭힘이 아니라 ‘뱉어냄’이었다. ‘뽐냄’이었다. 연주로 날 분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상이 무대로 보이기 시작한 건 쉰 고개를 넘어오면서부터다. 지금 내 정신혁명의 사령부는 서울시 강서구 화곡동에 있는 ‘윤효간 디자인그룹’. 나 포함해 모두 7명이 독립군처럼 모여 산다. 5~17년 이상 한솥밥을 먹고 있다. 정예림, 김정연, 최진식, 황진호, 윤소원, 김유미…. 이들 대다수는 대학과 인연이 멀다. 국졸이거나 검정고시로 고교를 졸업했다. 하지만 그들은 놀라운 창조력을 갖고 있다. 기존 관습과 고정관념을 일시에 파괴시키는 풍운아다. 모두 지방에서 올라왔다. 다들 맥 작업을 자유자재로 하는 디자이너. 내가 전국 및 장기 해외투어에 나서면 일순간 짐꾼 스태프로 돌변한다. 우린 도반일 뿐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다. 내가 형식상 대표이지만 누굴 명령하지 않는다. 월급이란 개념도 없다. 갑을 관계도 없다. 오후 1시에 일을 시작하고 자정 무렵 피 튀기는 회의를 한다. 그동안 금호타이어, 광동제약, 인천시 133년, 광주시 70년, 호주 애들레이드 186년, 뉴욕 200년 등 우리 디자인팀이 창조해낸 역사를 품은 광고 포스터가 무려 3천장이 넘는다.

지금 내 화두는 ‘세종대왕’. 세종대왕을 종횡으로 조명할 수 있는 포스터 600장을 만들고 있다. 이 일은 ‘세종즉위 600년 국민위원회’의 핵심 사업 중 하나다. 세종 관련 역사학자와 손을 잡고 각 지역 역사 리더를 통해 전국 순회 공연을 가진 뒤 미국 뉴욕 맨해튼으로 건너갈 것이다. 우린 그동안 세종대왕의 진가를 제대로 조명해주지 못했다. 난 그 위업을 600개의 서로 다른 장면으로 시각화할 것이다. 인종과 피부색을 초월한 600명의 도우미가 평화의 사절단이 되어 타임스퀘어에서 인간샌드위치 포스터를 플래시몹 스타일로 선보일 것이다. 뉴욕은 물론 런던, 파리, 베를린 등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퍼포먼스를 벌일 것이다.

난 지금 새로운 일을 개척해나가고 있다. 음악과 토크쇼, 미술전시와 문화복지, 평생교육, 시민예술운동 등이 맞물려 돌아가는 ‘복합정신혁명’을 전개하고 있다. 새로운 문화독립운동이다. 그 핵심은 ‘역사디자인’. 역사 & 포스터. 그 둘을 연결해주는 게 바로 피아노다. 일부 포스터가 현재 대구 달성군 논공읍 본리리 남평문씨 세거지 근처 임종 작가가 꾸려가는 ‘작가와 커피’ 별실 벽면을 한가득 채우고 있다.

김광석도 통기타 하나로 1천회 소극장 공연을 돌파했다. 나도 쉰 고개를 넘어오면서 1천회 피아노 전국투어를 완성했다. 난 갇힌 무대를 거부한다. 산하가 무대이기 때문이다. 누가 “1천회 다음에는 뭘 하겠냐”고 물었다. 난 “1회부터 다시 공연을 시작하겠다”고 대답했다.

하여, 난 이 무술년 초봄. 안동시 풍천면 병산서원으로 간다. 고매하면서도 소박한 서원의 자태, 서애 류성룡의 인품을 친견하기 위해서다. 절정의 누각미학을 보여주는 만대루(晩對樓), 거기에 앉으면 모든 걸 다 내려놓게 된다. 푸짐하지 않고 고졸하게 피어나는 매화. 난 거기에 앉아 눈을 감는다.

내 뒤로는 서원, 앞에는 절벽. 그 사이를 낙동강이 흐른다. 잘 보시라. 바람이 그 절벽을 핥고 지나가면서 고원(高遠)한 울림을 피워낸다. 절벽이 아니라 ‘아코디언’이다. 병산서원으로 이어지는 2㎞ 남짓한 비포장길. 압권이다. 여느 길은 운치가 없다. 햇살처럼 쨍쨍거리기만 한다. 이 길은 아직 달빛의 은은한 기세를 엿볼 수 있다. 길바닥이 ‘건반’ 같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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