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서 찾은 인생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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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15   |  발행일 2018-06-15 제33면   |  수정 2018-06-15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뱅꼬레’ 하형태 회장
20180615
와인이 식문화의 정수이자 인생의 결정판이라고 생각하는 뱅꼬레 하형태 회장. 1977년 한국 첫 와인으로 평가받는 마주앙 경산공장의 조주 전문가로 출발한 그는 국내 첫 아이스와인 시대를 열었고 그래서 한국와인의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아직 한국와인시대가 꽃피지 못했다는 판단을 하고 ‘오디와인’을 한국토종와인의 상징으로 만들기 위해 매일 와인을 거울처럼 들여다본다.

일어나면 하늘의 표정부터 살핀다. 자연이 내 삶의 ‘등대’인 때문이다. 그렇다고 은둔의 일상을 보내는 ‘자연인’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 사이에서 치열하게 부대끼며 살아간다. 매일 자연에서 일어나 사회에서 싸우고 저녁에는 자연으로 돌아온다. 다들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궁금할 것이다.

영천시 금호읍 원기리 최무선박물관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주>뱅꼬레(한국와인). 난 그 와이너리를 책임지고 있는 하형태(64). 남들은 ‘회장’이라고 하는데, 그냥 와인 만드는 머슴 정도로 봐주면 고맙겠다. 내 포도원은 분명 프랑스식 대저택인 ‘샤토(Chateau)’가 돌탑처럼 박혀 있는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와이너리와 비교하면 옹색하기 이를 데 없다. 유럽와인이 골리앗이라면 우리의 와인은 다윗에 불과하달까.


전국에 별별와인…와이너리 1천여곳 산재
첫 국산 와인 ‘마주앙’, 내 분신인 ‘뱅꼬레’
30년 넘는 세월 시행착오 겪으며 동고동락
꿈을 가지고 시작 했지만 시장은 만만찮아


한국의 와인? 이제 겨우 이름만 가졌을 뿐이다. 영천, 영동, 청도, 의성, 문경, 봉화, 김천, 파주, 대부도…. 전국에 별별 와인이 솟구친다. 다들 소규모 농가형 와이너리다. 특히 ‘과일특구’로 불리는 경북은 단연 한국형 와인의 전진기지랄 수 있다. 얼추 1천군데의 와이너리가 전국에 산재해 있다. 경기도 광명시 ‘광명동굴’에 가면 전국 대다수 토종와인 리스트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선 함부로 와인이란 말을 떠벌릴 순 없다. 와인도 술이라지만 고만고만한 술이 아니다. 와인의 ‘인’ 자는 ‘인생’이 아닐까. 그래서 와인은 ‘삶의 축소판’이다. 욕망을 가진 조주사는 꿈을 가진 조주사를 넘어설 수 없다. 하지만 그 꿈도 시장에서 쉬 좌절된다. 나 역시 그랬다.

내가 갈 길은 지나온 길보다 더 아득하고 멀기만 하다. 난 한국에서 와인이란 말이 처음 등장할 무렵 와인에 입문했고 30년이 넘는 지난 세월, 한국의 와인이 시행착오 를 거치는 과정을 현장에서 계속 지켜봐 왔다. 1977년 첫 국산와인으로 평가받는 ‘마주앙’에서 현재 내 분신인 ‘뱅꼬레’까지. 그 세월을 회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내가 영천에 정착한 건 영천 특유의 기후 때문이다. 영천은 국내에서 습기가 가장 적은 고장이다. 그래서 1967년 국내 첫 화약탄약창이 설립된다. 비가 덜 오니 농부는 저수지를 많이 만들 수밖에 없다. 영천은 전국에서 저수지가 가장 많은 고장이다. 포도가 자라기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난 포항에서 영천으로 연결되는 이 벨트가 국내에서 가장 좋은 포도벨트라 생각한다. 국내 포도재배사를 보면 1906년 서울 뚝섬에 원예모범장이 설립된다. 이때 심긴 포도는 캠벨얼리란 미국산 포도. 1918년 포항 청하 근처에 동양 최대 규모의 미쓰와(三輪) 농장에서 직접 와인을 만들기도 했다.

내 얘기를 하기 전에 한국 와인사부터 정리하는 게 수순인 것 같다. 1285년 중국 원나라 세조가 사위인 고려 충렬왕에게 포도주를 하사했다. 표류하다가 한국에 도착한 하멜은 지방관에게 네덜란드산 적포도주를 선사했고 조선 인조 때 호조판서 김도령은 대마도주와 포도주로 파티를 열었다. 1866년 독일인 상인 오펠트는 레드와인을 조선에 반입하기도 했다. 이후 국내 기업에서 만든 첫 와인이란 명칭이 들어간 주류는 ‘애플와인 파라다이스’였다. 당시는 포도주스와 주정을 섞어서 만든 값싼 과실주 수준이었다. 이 술을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마시는 풍조가 번지기 시작한다. 아직 유럽형 와인은 언감생심. 그 무렵 정부는 주류사업을 통제하고 있었다. 주류문화가 경직된다. 술문화는 거의 주먹구구식이었다. 와인으로 절대 건너갈 수 없었다. 쌀이 너무 부족해 분식을 장려하고 쌀먹걸리 대신 밀가루막걸리를 권장했다. 다행히 과일로 만든 술은 장려했다. 이 흐름을 잘 이용한 기업이 바로 해태였다. 1974년 애플와인과 비교할 수 없는 ‘노블와인’을 생산한다. 부족한 면도 있지만 형식적으로는 국내 첫 와인으로 불린다. 아직 수입와인시대 이전이라서 노블와인은 여론선도층으로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는다. 1975년 8월15일 국회의사당이 오픈 되기 전 의사당 앞 해태상 밑에 타임캡슐을 파묻었는데 노블와인이 거기에 들어간다.

지난 5월24일. 뽕나무밭으로 나가봤다. 몇몇 오디가 검청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잠시 눈을 돌리면 잘 익은 오디는 동백꽃처럼 금세 땅바닥에 후두둑 떨어져버린다. 수확! 그건 혼자 감당할 수 없다. 아내와 딸, 그리고 아들까지 호출해야만 한다. 오디 따기는 이달말까지 지속될 것이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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