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수는 가짓수 형식보다 정성이 중요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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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9-21   |  발행일 2018-09-21 제35면   |  수정 2018-09-21
겨를 없다면 주과포 정도 올려도 무방”
■ 노부부와 추석한담
명절 지내는 제사 숭고한 가족축제
젊은층 반려견 의존, 가족해체 현상
“제수는 가짓수 형식보다 정성이 중요
갈수록 제사가 후손한테 짐으로 다가서고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는 노부부. 남편은 일직손씨, 아내는 풍산류씨인데 1995년부터 청도군 각북면 상평리에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와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 경계(헐티재)를 넘는다. 1995년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 방지못 바로 앞에 말년을 보낼 거처를 마련한 손세헌씨(81). 일직손씨인 그는 부인(풍산류씨)과 함께 살고 있다. 부인 류씨는 요즘 내방가사에 푹 빠져 있다. ‘예의범절이란 의미를 스마트폰시대일수록 더욱 되새겨봐야 된다’고 믿고 산다.

노부부는 몇번 고사하다가 어렵사리 ‘추석한담’이란 인터뷰에 응했다. “침묵하고 있는 현자를 생각하면 무슨 얘기를 꺼낸다는 게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고 했다. 백번 맞는 말이다. 그래서 추석을 앞두고 함께 명절차례, 인륜(人倫) 등에 대해 고민해 보자고 제안했다.

남편은 부인을 상석에 앉혔다. 허리가 좋지 않아 양반다리 자세조차 불편한 남편은 교정의자에 앉았다. 그는 2부 인생 주제를 달리했다. 그동안 궁금하기만 했던 보학(譜學)과 유학의 이치를 파고들었다. 각종 향사와 차례에 관여하면서 관혼상제 원칙을 객관적으로 궁구할 기회를 폭넓게 가질 수 있었다.

‘귀성(歸省)’이란 말로 운을 뗀다.

“귀성은 ‘귀향성친(歸鄕省親)’의 준말이죠. ‘고향 가서 부모를 뵙는다’는 뜻인데 부모를 여의었다면 무덤이 있는 선산을 찾는 게 예일 겁니다. 그런데 요즘 대다수 벌초만 묘소에서 하고 차례는 다들 장남댁에서 올리잖아요.”

그는 제사를 “혼(魂)과 백(魄)이 분리된 저승의 망자를 이승의 제단으로 불러들이는 숭고한 가족축제”라고 규정했다. 그 촉매는 바로 향과 술이라 했다.

“향은 하늘로 간 혼, 술은 땅으로 간 백을 부르는 힘인데 당연히 무덤 옆에서 제사를 올려야 가장 실감나지요. 강신(降神)에 이어 후손이 일제히 절하며 참신(參神)하는 것도 일상의 삶과 연관하면 어려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집안 어른이 방문하면 당연히 안방에 모시고 이어 수하가 절을 올리고 식사를 대접해야 합니다. 반주와 안주도 올리고 밥과 탕국, 마지막엔 숭늉과 디저트용 과일까지 내지 않습니까.”

그는 강신에서 시작해 음복·철상으로 마감되는 제사 순서가 현실적 삶의 예법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신위 바로 앞에 놓는 밥(메)과 국의 순서는 살아 있는 자와 반대로 놓아야 한다는 걸 적시했다.

“제사는 망자가 돌아가신 날에 봉행하는 ‘기제사’, 그리고 설과 추석 때 올리는 ‘차사(茶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명절차사 때는 무축단헌, 축문은 필요없고 그냥 술만 한잔 올리면 된다는 뜻이에요.”

“요즘 제사 문제로 갈등을 빚는 분들이 많은데 그럴 땐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라고 질문했다.

그는 격식보다 정성이 우선이라고 했다.

“공자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제수는 가짓수의 형식보다 정성이 더 중요하다고. 겨를이 없다면 주과포(酒果脯) 정도만 차려도 괜찮습니다. 주과포는 제사에서 가장 핵심입니다. 주는 술, 과는 과일, 포는 말린 제수죠. 과일이 문제입니다. 조율시이냐 조율이시냐를 놓고 갈등을 빚습니다. 김장생이 ‘가례집람’을 편찬할 때만해도 사과, 참외, 수박, 바나나, 귤 등은 없었는데 이젠 다르죠. 시대상을 반영하기 위해 올리잖아요. 대추, 밤, 감, 배 외에 국민과일로 정착한 사과 하나만 더 올려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포라고 하면 소고기육포, 북어 정도만 해도 괜찮습니다.”

그가 조율시이의 속뜻을 알려준다.

“무슨 근거가 있는 건 아닌데 후세 호사가들이 말을 만든 것 같습니다. 조율시이는 씨앗 개수를 기준으로 정해졌다고 해요. 대추는 씨가 하나라서 ‘임금’, 밤은 한 송이에 씨가 세 개 열리니 ‘삼정승’, 감은 씨가 여섯 정도이니 ‘육판서’, 배는 씨가 여덟개라서 ‘팔도 관찰사’를 의미한다는데….”

요즘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 해서 우열의 개념으로 보는데 이치는 그런 게 아니라고 정색한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는 의미가 절대 아닙니다. 그건 하나의 역할 논리예요. 하늘은 땅이 오곡백과와 뭇생명이 잘 자랄 수 있게 햇빛, 바람, 비 등을 적재적소에 배정하죠. 하늘은 배려하고 조건을 만들어주고 그 결실을 가져가는 건 땅입니다. 하늘은 늘 빈손이죠. 허허허. 하늘이 땅을 예속해야 되는 것으로 보는 건 왜곡된 남존여비 폐습입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반려견문화쪽으로 이어졌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데 갈수록 자기 직분을 자각하지 못한 젊은 층이 반려견에 의존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인간관계에 편입되지 못한 채 변방의 고독한 자신을 잊기 위해 품은 게 바로 반려견이라고 봐요. 가족해체의 한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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