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교육] 마음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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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10 07:57  |  수정 2018-12-10 07:57  |  발행일 2018-12-10 제17면

장자 ‘양생주’에는 공문헌(公文軒)과 우사(右師)가 나눈 짧은 대화가 있다. 공문헌이 우사의 한 발이 잘린 것을 보고 놀라 어찌 된 일인지 묻는다. 이에 우사는 이는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무슨 뜻이 있어 하늘이 자신을 외발로 만든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렇기에 우사는 비록 한 발을 잃었지만 하늘도 사람도 원망하지 않는다(不怨天 不尤人). 성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예수가 길을 가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먼 소경을 만났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묻는다.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제자들의 어리석은 질문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자기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한복음 9:1-3)

이것이 바로 깨달은 자의 관점이다. 실제로 이 소경은 예수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씻고 난 뒤 눈을 뜨게 된다. 이처럼 깨달은 자는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드러낼 씨앗으로 본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란 곧 궁극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다. 우리에게 닥친 불행을 ‘피부 밑 자아’를 버리고 ‘우주적 자아’를 깨닫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이런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을 누가 절망하게 할 수 있으며, 어느 누가 눈곱만큼의 상처라도 줄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자신에게 닥친 모든 불행을 이런 눈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세상은 정말 아름답고 놀라운 곳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어떤 불행이 닥쳤을 때 우리는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한다. 장자는 이를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에서 도피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여 ‘하늘을 피한 데 대한 벌(遁天之刑)’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둔천지형은 하늘의 벌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내린 벌이다. 어리석어 분별의 고통에 스스로 빠져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자는 또한 하늘을 원망하는 벌에서 벗어남을 ‘하늘의 묶임에서 풀려남(帝之縣解)’이라고 하였다.

하늘의 묶임에서 풀려난 사람들은 그 무엇도 원망하지 않기에 어떤 상황에 처해도 자득(自得)하게 된다. 자득이란 충만함과 평화로움으로 말미암아 가지게 되는 정신의 자기 만족감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득을 배울 수 있을까?

자득을 배우기 위해서는 스스로 듣고(自聞), 스스로 보고(自見), 스스로의 길을 가야 한다(自適). 자문이란 무엇인가? 자문이란 밖의 소리에 빼앗겨 남에게 얽매여 듣지 않고 스스로 자기 안에서 듣는 것이다. 자견은 외부의 색깔에 정신을 빼앗겨 남이 보는 대로 보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내부를 보는 것이다. 자적이란 남이 가는 길을 따라 가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자득을 배우는 방법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에게 얽매여 보고, 남에게 얽매여 듣는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남의 만족으로 흡족해하고 스스로에게는 참된 즐거움이 없게 된다.

장자는 스스로 보고 스스로 듣기 위해서는 정신을 고요히 하여 안에 간직해야 한다(抱神以靜)고 하였다. 정신을 고요히 하여 간직하면 보려는 것을 잊게 되고, 들으려는 것을 잊게 된다. 보려는 것을 잊으면 저절로 보이게 되고, 들으려는 것을 잊으면 저절로 들리게 된다(忘視而自見 忘聽而自聞). 결국 본다는 의식 없이 보는 것이 자견이고 듣는다는 의식 없이 듣는 것이 자문인 것이다.

(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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