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파타고니아(2) - 엘 찰텐의 피츠로이

  •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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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26   |  발행일 2019-04-26 제37면   |  수정 2019-04-26
상어 이빨같이 삐죽 솟아오른 봉우리…단풍 두른 호수 액자 속 신비로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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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로이 봉우리가 담긴 카프리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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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로이 트레일의 단풍이 든 렝가나무와 라스 부엘타스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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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일로 쓰러진 고사목. 통행할 수 있도록 최소한만 잘라 길을 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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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레 호수 트레일 위에서 바라본 엘 찰텐.

감동과 슬픔이 뒤섞인 페리토모레노 빙하 트레킹을 마치고 다시 엘 칼라파테로 돌아온 시간은 저녁 무렵이었다. 저녁 식사 후 일행과 한참 동안 파타고니아의 신비와 미래의 운명에 대해서 설전을 주고받았다. 룸으로 돌아온 후에도 알지 못할 흥분 때문에 쉬 잠들지 못했다. 결국 말벡 포도주 한 병을 비우고서야 내일의 엘 찰텐(El Chalten) 일정을 위하여 억지로 침대에 누웠다.

트레커들의 성지가 된 작은 마을‘엘 찰텐’
왕복 6시간 코스‘토레 호수’트레킹도 유명

유네스코 세계 5대 미봉 3405m ‘피츠로이’
허연 등줄기 드러내고 쓰러진 고사목 산길
가장 가까이 봉우리 볼 수 있는 카프리 호수
설산·파란하늘·푸른 물빛 아름다운 조화
도도한 모습 쉽게 보이지 않으려 감춘 자태
두개의 호수가 떠받들며 날카로움 다독여


엘 칼라파테에서 북쪽으로 230㎞ 지점에 있는 엘 찰텐은 아르헨티나 빙하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파타고니아의 작은 마을이다. 엘 칼라파테에서 이곳까지는 북쪽으로 네 시간가량 버스를 타야 한다. 엘 칼라파테가 페리토모레노 빙하를 위한 도시라면 엘 찰텐은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 5대 미봉 피츠로이(Fitz Roy) 트레킹을 위한 마을이다. 상어 이빨처럼 삐죽 솟은 3천405m의 피츠로이 봉우리는 엘 찰텐을 트레커들의 성지로 만들었다. 이곳의 원주민 테우엘체 족은 정상이 늘 구름에 덮여 있어 ‘연기를 내뿜는 산’이란 의미의 ‘세로 찰텐(Cerro Chalten)’으로 불렀다. 그만큼 쉽게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고 오르기도 어려운 봉우리다. 피츠로이는 1834년에 다윈이 탔던 비글호의 영국 함장 피츠로이를 기념해 정복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빙하 투어나 트레킹은 반드시 여행사의 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해야 하지만 엘 찰텐에서의 트레킹은 자신의 체력과 기호에 따라 개인적으로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도시의 규모도 엘 칼라파테에 비길 바가 아니며, 여행사도 드물다. 그래서 이 마을의 건물 대부분은 트레커들을 위한 숙소나 레스토랑이다. 피츠로이 트레킹 다음으로 유명한 코스가 3천128m의 토레 봉우리를 바라보며 걷는 토레 호수 트레킹이다. 나는 이틀 밤을 이곳에 머물며 이 두 곳을 모두 가보기로 했다.

도착 첫날 여장을 풀자마자 비교적 짧은 코스의 토레 호수 트레킹을 나섰다. 짧다고 해도 왕복 6시간 코스이니 서둘러야 했다. 마을에서 올라가는 길은 두 갈래이지만 한 곳에서 만난다.

완만한 구릉을 올라서니 얕은 능선을 따라서 아기자기한 트레일이 이어져 있었다. 단풍이 물든 붉은 숲을 지나기도 하고, 키 작은 관목들이 뒤덮인 벌판을 통과하기도 했다. 계곡이 깊어지면서 크고 작은 작은 폭포도 보였지만 토레 봉우리는 잿빛 구름 속에 숨어서 좀처럼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한 시간 남짓 걸었나 보다. 일순간 구름의 흐름이 빨라지더니 몸을 휘청이게 하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 듬성듬성 빗방울이 박히기 시작했다. 먹빛의 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이곳 날씨의 악명이야 익히 들었던 바,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렇게 나의 첫 트레킹은 아쉬움 속에서 끝이 났다.

숙소에 돌아온 후에는 비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내일의 트레킹을 생각하며 걱정스럽게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녘에 눈이 떠졌다. 여전히 비바람 소리가 거세다. 아침 햇살에 물든 피츠로이 봉우리는 못 보겠다 낙담하며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얼마나 지났을까. 분주한 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거짓말처럼 햇살이 들었다. 모두들 들떠서 산행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렇게 길을 나선 시간이 오전 11시 가까웠다. 피츠로이 트레킹은 피츠로이 봉우리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로스 트레스 호수 까지의 왕복 20㎞ 넘는 8시간 코스이다. 여유를 부릴 수 없는 시간이었다. 입구에는 피츠로이 경로라는 의미의 ‘Sendero al Fitz Roy’라는 나무 아치 입간판이 트레일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날씨 안내판에는 ‘Moderato’에 화살표가 있었다. 어제의 궂은 날씨를 보상이라도 하듯이 너무 맑은 하늘이었다.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급히 산길로 접어들었다. 동네 뒷산 같은 편안한 길이었다. 가혹한 환경을 버텨낸 파타고니아의 식물들은 야무진 데가 있었다. 이들이 차가운 돌산을 기어올라 만들어낸 길이었다. 이끼류의 푸른 풀들이 선봉대처럼 앞서 바위 위를 올랐고,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렝가나무들이 줄지어 따라 오르고 있었다. 그 모양이 너무나 선연하여 함께 걷고 있는 듯 했다. 오르다 쓰러진 고사목들도 곳곳에 허연 등줄기를 드러내놓고 엎어져 있다. 일부는 트레일 쪽으로 길게 엎드려 있다. 이 나무들도 사람들을 위하여 들어내는 법이 없었다. 그저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 최소한의 정도만 잘라서 길을 터놓았다. 그래서 쓰러진 나무의 형체는 고스란하다. 잔 개울을 건너게 해주는 다리와도 다르지 않은 나무 등걸이다. ‘only one’이라는 소박한 안내판이 아니더라도 둘이 동시에 올라서지는 못할 것 같다. 그것은 이곳 파타고니아에서 일생을 버틴 나무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이곳의 나무들은 쓰러진 후에도 자꾸 눈에 밟히며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리고 이곳의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 나무들을 구경하다보니 하늘 한번 올려다보지 않았다. 가파르게 버틴 비탈길과 맞닥뜨리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첫 경험이 힘든 법, 잠시 심호흡을 하고 지긋이 나무들을 따라 올랐다. 힘든 만큼 보상도 컸다. 비탈길 아래로 스멀거리며 흐르는 라스 부엘타스(Las Vueltas) 강줄기가 시원하게 뻗어있었다. 내가 떠나왔던 엘 찰텐도 장난감처럼 한눈에 잡혔다. 달라진 풍경에 점점 속도가 붙었다.

그렇게 3㎞ 정도를 걸으니 피츠로이 전망대와 카프리 호수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나는 주저 없이 카프리 호수로 방향을 잡았다. 피츠로이 트레킹을 꿈꾸게 만든 것이 피츠로이 봉우리가 담긴 카프리 호수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1㎞ 정도를 걸으니 군데군데 야영을 하는 작은 텐트들이 보였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광경은 내 꿈을 실현시킨 순간이었다. 사진이 만든 풍경은 실경의 일할도 되지 못한 것이었다. 마침 바람조차 숨을 죽였다. 카프리 호수는 피츠로이 봉우리를 고스란히 담아놓고 있었다. 하늘과 호수를 배경으로 한 피츠로이의 데칼코마니였다. 호숫가로는 액자인양 붉은 단풍이 둘러 있었다. 하늘에 서 있는 것보다 물에 담긴 것이 더 아름다웠다. 신비로웠다. 눈 덮인 흰 봉우리와 파란 하늘, 푸른 호수, 그리고 그 색깔을 감싼 붉은 단풍의 절묘한 조화는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다. 배낭을 내렸다. 그리고 그냥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말소리라도 높아지면 봉우리가 일그러질까 숨을 죽였다.

요기를 하고나니 퍼뜩 절반밖에 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행 중 몇몇은 이곳에 더 있다가 그냥 하산하겠다며 아예 드러누웠다. 나도 갈등이 생겼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한껏 눈에 담고 또 가슴에까지 눌러 담은 후에야 다시 로스 트레스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나무는 줄어들고 키 작은 풀들의 군락지가 자주 펼쳐졌다. 사이사이로 흐르는 올망졸망한 개울들이 재잘거리며 산기슭 허리춤을 간지럽혔다. 절로 미소가 지어지며 자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게 만든다. 덩달아 한눈을 파는 카메라 렌즈 때문에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았다.

4㎞ 가까이 그렇게 왔나보다. 피츠로이는 쉽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마지막 1㎞ 정도를 남겨두고 가파른 오르막이 막아섰다. 나무도 오르지 못한 고갯길에는 거친 자갈과 바위투성이어서 걸음을 옮기기도 쉽지 않았다. 이정표처럼 앞서가던 피츠로이의 모습도 쑥 사라져버렸다. 아무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 가파르고 험한 길을 간신히 올랐다. 그리고 첫 번째 고개가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더 가파른 두 번째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려고 이렇게 꽁꽁 감추고 있을까 오기가 생겼다. 시큰거리는 왼쪽 발목을 끌면서 가까스로 마지막 고개를 넘었다.

아, 이런! 파타고니아는 자주 이렇게 말문을 막는다. 모레노 빙하를 처음 만났을 때의 감격이 오버랩 되었다. 백두산을 마주했을 때의 감동도 떠올랐다. 이곳에 이런 호수라니, 그리고 저 생뚱맞은 피츠로이 봉우리는 뭐지? 어떻게 이곳에 이런 조합으로 있는 거지?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로스 트레스 호수는 피츠로이를 떠받들듯이 다소곳했고, 그 옆의 수시아 빙하 호수도 옥색의 물 빛깔로 피츠로이의 날카로움을 다독이고 있었다. 늘 압도적이고 도도했던 피츠로이는 아랫도리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여전히 군림하는 듯이 두 호수 위에서 꼿꼿했지만 나는 발가벗겨진 모습을 보고야 만 것 같았다. 그렇게 구름으로 덮고 힘든 오르막을 만들며 자신을 숨기려 했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장엄하고 웅장하지만 카프리에 담긴 신비로움이나 조화로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이 햇살이 주황색으로 바뀌면서 점차 날카로움은 무뎌지고 편안해져 갔다. 노을빛에 물들어가는 피츠로이의 모습은 떼 쓰던 아이가 엄마 품에서 잠든 것처럼 순해 보였다.

내려가는 길이 멀었다. 산속의 어둠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마음이 급해지면서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지만 어느새 랜턴이 없으면 안 될 정도로 어둠이 깔렸다. 그 시간에도 간혹 오르는 사람이 보였다. 등에 짊어진 배낭의 크기로 보아 피츠로이 일출을 보려는 야영족일 게다. 아침 햇살에 붉게 타오르는 피츠로이 봉우리가 압권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나도 언제 저 거칠고 은밀한 곳에서 불타는 피츠로이와 함께 잠을 깰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둠은 더욱 무겁게 내려앉았고, 어둠의 무게만큼 하늘에는 별이 총총해져갔다. 땅을 보아야 하는데 자꾸 고개가 하늘을 향한다. 밤이 되어서야 알았다. 피츠로이로 가는 길은 땅만큼 아름다운 밤하늘도 가지고 있었다.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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