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한 책, 백수에게 용기주는 책 등 ‘읽는 약’봉투로 포장…인생 최고의 놀이터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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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31   |  발행일 2019-05-31 제34면   |  수정 2019-05-31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경주 황리단길 ‘어서어서’ 양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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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적인 배열법으로 꽂혀 있는 서점 내부 전경.

회사에 필요한 용품을 사러 가던 중 한 철물점에 있는 중국집 배달부용 철가방에 필이 꽂힌다. 순간 ‘저걸 가방처럼 갖고 다니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학시절부터 남들의 시선을 은근히 즐겼다. 저 철가방이면 충분히 행인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철가방을 구입한 뒤 체 게바라 스티커를 능청스럽게 부착했다. 자연스럽게 내 닉네임도 덩달아 체 게바라. 물론 출근할 때는 철가방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승용차 안에는 늘 대기 중이다. 3단으로 된 그 철가방은 다용도다. 옷, 돗자리, 책, 선글라스 등 쓰임새가 특별했다. 내가 그걸 갖고 시장에 나타나면 짜장면 배달 나온 줄 안다.

철가방 들고 다니는 내 몸매를 생각해 뜬금없이 댄스학원에 들어간다. 재즈·방송댄스·에어로빅 등을 익힌다. 나만의 비범한 감각은 이 학원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2개월 정도 배울 즈음 관계자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까지 받는다. 경주 지역의 이런저런 행사장 댄스경연대회에 참가해 1등도 한다. 난 프로스러운 댄스라인을 거부한다. ‘막춤’이 내게 딱이다. 그 춤에는 소시민의 정서가 담겨 있다. 사람을 사로잡으려면 그런 춤이어야 된다. 잠시 댄스강사도 돼 봤다.

금고를 나와 울산과 경주시 외동 사이에 있는 현대자동차 1차 계열사에 들어간다. 인사총무부에서 3년 정도 머무른다. 그 시절부터 못말리는 삼성 라이온즈 야구팀의 막춤 응원스타로 등극하게 된다.

◆야구장의 스타 양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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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이 사용하는 스탬프, 그리고 금세기 최대 히트상품이 된 스마트폰을 동시에 들고 코믹한 포즈를 취해 보이는 양상규 대표. 그는 복고와 첨단의 공존 필요성을 강조했다.

지금도 라이온즈 관계자들에게 내 이름을 대면 다들 씩 웃음을 날릴 것이다. 그만큼 난 라이온즈 경기에는 어김없이 나타나 단숨에 카메라맨과 관중은 물론 치어리더까지도 내 편으로 만들어 버린다. 2013년부터 라이온즈는 내 짝사랑이었다. 철가방을 들고 스탠드에 나타난다. 피가 솟구친다. 경기 관람보다는 적절한 타임에 벌떡 일어나 내 전매특허물인 경광봉을 흔들며 막춤을 난사한다. 그게 너무 우스꽝스러워 카메라맨은 습관적으로 날 비춘다. 보통 유니폼 백넘버는 좋아하는 선수 걸 많이 사용한다. 난 그렇지 않다. 내 이름 상규를 겨냥 ‘39번’으로 정했다. 체 게바라도 함께 부착했다.

라이온즈 경기는 빠트리지 않는다. 얼추 80경기는 챙긴다. 중요 경기면 부산, 울산에 이어 서울까지도 간다. 치어리더도 춤빨이 안 받을 때가 있다. 그럼 단장이 은근히 내 막춤을 부추긴다. 내가 일어나 한 동작을 취하면 치어리더도 다시 탄력을 받게 된다. ‘응원판의 마중물’인 셈이다. 하지만 오버는 절대 금물! 치어리더는 프로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그들의 밥줄 앞에서 내가 당신보다 낫다고 우쭐거리는 건 상도의에 벗어난 처사다.

덕분에 ‘나는 남자다’ ‘스타킹’ ‘VJ 특공대’ 등 TV 프로그램에 ‘야구장의 체 게바라’로 자주 노출됐다. 어느 날 나름 유명해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까불고 인기에 영합하는 건 딱 질색이다. 경기가 끝나면 팬의 술 한잔 요청도 과감하게 뿌리치고 냉정하게 귀가한다. 그게 양상규 다운 인기관리 비법이다.

◆식당주인으로 변신

체 게바라로 변신한 양상규. 하지만 나는 혁명보다 제대로 돈을 벌고 싶었다. 나는 잘 사는 게 혁명이라 생각한다. 예전에는 돈에 대해 좀 겸손하고 설렁설렁 돈벌기를 했다. 하지만 돈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종목이었다. 돈은 제대로 벌기 어렵기 때문이다.

직장시절을 끝냈다. 2014년 성건동에 부산에 본사를 두고 있는 돈가스와 카레 전문점 ‘은하수식당’을 오픈한다. 요리를 제대로 배우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장사가 잘 되었다. 자격증이 있어야만 성공이 보장된다는 말이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린다는 사실을 이 일을 하면서 체득하게 된다. 역시 타고난 감각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홀 곳곳에 내가 좋아하는 만화, 피규어 등을 가득 진열했다. 손님이 좋아했다.


체 게바라 스티커 붙인 중국집 철가방
행인 이목 끌며 시선 즐기기 안성맞춤
빠지지 않고 가는 삼성 라이온즈 경기
막춤 난사 ‘야구장의 체 게바라’유명

황리단길에서 만난 문학전문 서점
샐러리맨·식당 거치며 핀 새 아이템
전국 신드롬 일으킨 신개념 독립책방
표지 색채별로 진열한 시·소설·에세이
작은 미술관 같은 공간…매출에도 영향
세상 속 나만의 문법 찾으며 즐기는 삶



식당을 하면서 나의 내면에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 생겨났다. 바로 문학전문 서점이었다. 그 무렵 예전 책방이 교보·영풍문고 등 초대형 서점 때문에 허물어졌다. 그 잿더미 속에서 피어난 꽃이 바로 서울의 스트로빌, 북 앤 필름, 대구의 더 뽈락, 통영의 남해의 봄날 등과 같은 신개념 독립책방이다. 요즘 전국 각처에서 신드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난 그 서점들을 순례했다. 서점을 위해선 일단 종잣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식당부터 차린 것이다.

황리단길을 만든 첫 단추는 경주의 첫 브런치 카페인 ‘노르딕’이다. 어느 날 이 길을 걷다 보니 그 가게 앞에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선 모습을 보게 됐다. 정말 신기했다. 이 죽은 길에 줄을 서다니! 하나둘, 가능성을 보고 가게가 오픈된다. 그래서 지금의 황리단길이 된 것이다. 이 길에서 빵집을 운영하는 형님이 빈 집이 났으니 뭔가를 해보길 원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이 거리에 나타난 것이다.

◆새로운 책 배열법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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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는 물론 첨성대 등 각종 문양을 찍을 수 있는 스탬프 세트. 단골들은 이 걸 잡으면서 유치한 자신과 조우하게 된다 (위). 워낙 많은 이들이 사용하는 바람에 스탬프 연습장이 너덜너덜하다.

당시만 해도 경주에서는 제대로 된 책을 살 수 없었다. 학습지, 자격증 관련 수험서 등을 파는 문방구점 같은 게 전부였다. 존재감 있는 책은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책만 전문적으로 파는 동네책방 같은 서점이 하나 정도는 필요할 것 같았다. 하지만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부딪혀 보는 수밖에.

일단 시, 소설, 에세이 등으로만 서가를 꾸몄다. 하지만 나는 책 진열에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일단 나는 내가 좋아하고 직접 읽어보고 감동하고 이 정도 책이면 먹힐 것 같다는 책만 깔기로 했다. 처음에는 내가 읽은 책 수백권을 중심으로 팔았다. 책이 더 필요해서 경기도 파주의 출판단지에 있는 ‘북센’의 온라인 판매망을 통해 필요한 서적을 확보했다.

나는 출판사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의 시집이 갖고 있는 고유컬러부터 분석했다. 보통 서점은 시리즈 순서대로 세워 도열시키듯 진열한다. 하지만 난 그 방식은 죽은 배열법이라 생각했다. 손님이 그 책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진열법이라 여겼다. 비슷한 색깔끼리 합쳐놓았다. 세워놓지 않고 펼쳐놓기도 했다. 그리고 주워온 장지문도 책 진열대로 활용했다. 일순간 여기가 서점이 아니라 조그마한 미술관 같았다. 책이 가진 하나의 색깔이 능히 미술작품으로 변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색도 배열하는 기분이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열할 때 같은 계열의 옅은색에서 짙은색으로 깐다.

색채 연구를 많이 했다. 결정적으로 도움을 받은 건 전세계 최대 컬러칩을 보유한 회사인 ‘팬톤 컬러’였다. 이 회사는 1963년부터 ‘올해의 색’을 내면서 지구촌에 색채 조견표의 기준을 제시했다. 나는 그 색의 스펙트럼을 보면서 표지 색채만 잘 모자이크해도 매출에 큰 영향을 줄 거라고 믿었다. 문학과지성사는 블루·브라운 계열의 컬러를 테두리 색으로 사용한다. 그 블루 속에 놓인 다양한 파랑, 흰색, 노랑 등을 나만의 방식으로 배열해놓는다. 예상은 적중했다. 기성세대의 고민보다 난 젊은세대, 특히 결혼을 포기하고 자기만의 삶의 이정표를 만들려는 열혈 청년의 가슴에 나침반 구실을 하는 책을 깔고 싶다. ‘아침달’이란 출판사는 젊은 시인의 시집을 시리즈로 낸다. 난 김소연, 유희경, 오은, 유진목, 김언, 서윤후, 육호수 등 젊은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 그들은 직접 출판할 여력이 못 돼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시집을 냈다. 그것도 내게 믿음을 주었다.

‘허밍버드’란 출판사가 시리즈로 내는 하드커버로 제작된 추억의 동화도 괜찮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즈의 마법사, 어린왕자, 빨강머리 앤, 안데르센과 그림 형제 동화집….

내가 요즘 강력하게 추천하는 작가는 기성 문단에서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이슬아씨. 그는 이 서점에서 꽤 인기있다. 그녀가 낸 수필집 ‘일간 이슬아’는 압권이다. 2018년 독립서점이 선정한 올해의 책이다. 또한 박준이 지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도 강추한다. 또한 세상 여러 브랜드의 모든 것을 파헤친 시리즈물 ‘매거진 B’, 캐주얼 라이프스타일의 매거진 ‘The kinfolk table’도 무척 아낀다.

나는 책을 누런 봉투에 넣어준다. 그 표지에 ‘읽는 약’이란 문구를 적어놓았다. ‘책이란 읽는 약’이 아닌가. 병원 다닐 때 약봉투를 보면서 기막힌 그 말을 생각해 냈다. 이 봉투와 함께 책갈피에 사용할 수 있는 명함 같은 쪽지도 함께 준다. 서점 한가운데 테이블 위에 날짜가 나오는 스탬프 보관함을 만들었다. 첨성대 등 여러 모양의 스탬프도 구비해놓아 골라 사용하면 된다. 시험 삼아 스탬프를 찍어볼 수 있게 철수와 영희란 그림이 인상적인 예전 국민학교 국어책 버전의 연습노트도 비치해놓았다. 특별한 의미는 없다. 그냥 여기와서 이런 장난질을 통해 좀 유치한 자신과 만나게 해주고 싶다. 주워온 책장 위에도 책을 놓았다. 풍금, 빈티지 여행가방, 자명종, 괘종시계, 아기자기한 포스트, 엽서 등도 여기저기에 깔았다. 그 중에서 가장 아끼는 건 당연히 내 분신인 체 게바라 철가방. 주말에는 화장실에 갈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 나도 놀랍다. 이렇게 핫한 거리에서 책이 각광 받으니.

예전에는 연결할 거리를 만들던, 제조업 지상주의시대였다. 이젠 만들어 놓은 재화와 용역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하는 세상이다. 예전에는 사무실 짓고 직원 구하느라 난리법석을 떨어야만 했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유튜브 하나만 잘 만들어도 평생이 보장되는 세상이다. 휴대폰 하나가 중소기업 하나 뺨 때릴 정도의 업무를 감당해낸다.

난 젊은이의 고독과 종일 논다. 그리고 가족이 여기서 노는 것에서 힘을 얻는다. 젊은이들, 기성세대들의 눈에는 그들이 위태위태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길. 새로운 세상에 맞는 자기만의 문법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여겨주기를 바란다. 누가 그런 노래를 불렀잖은가. Don’t worry be happy! 그래, 어서어서도 돈 워리 비 해피.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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