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맹의 철학편지] 열정과 엄숙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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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6-07   |  발행일 2019-06-07 제39면   |  수정 2019-06-07
현재 상황·어려움 잘 살피고 과거·미래 관심가져야… ‘마음 씀’ 통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
[노태맹의 철학편지] 열정과 엄숙의 시대
[노태맹의 철학편지] 열정과 엄숙의 시대

“오늘이라고 말하는 사람만이 그때 일어날 것에 대해, 그리고 그 전에 이루어져야 했던 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시간 분석에서 나옴직한 이야기이지만 굳이 하이데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무척 의미있는 이야기인 것 같구나. 어쨌든 하이데거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오늘에 대해 ‘마음 씀’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과거와 미래 시간을 돌아보고 바라볼 수 있을 거야.

그래서 오늘은 우선 과거 이야기, ‘그 전에’ 이루어져야 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한다.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속칭 ‘꼰대’들이 하는 짓이 아닌가 해서 가능하면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이야기를 좀 가볍게 풀어가기 위해 나의 지난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구나.

내가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암울한 군사독재의 시대였지. 학교에 정보과 형사들이 상주하고 있었지. 사회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학생들은 ‘지하 서클’에 가입해서 이곳저곳의 자취방을 전전하며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했단다. 지금 돌이켜보면 읽어볼 만한 책도 별로 없었어. 그러다보니 철학적인 깊이나 사회과학적 폭도 넓지 않았던 것 같아. 나는 그 서클의 언저리를 겨우 기웃거리는 학생이었어.

지식은 얕았지만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해방에 대한 열망은 깊어서 차라리 당시의 시대는 사회과학의 시대라기보다는 인문학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거야. 해서 당시의 사람들이 모든 일들을 ‘목숨 걸고’ 했다는 표현은 지나친 것만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해. 사실 유인물 몇 장 뿌리면 1년6개월의 ‘표준가격’으로 고문이 필수 옵션인 감옥에 가야 했어. 학교를 마치면 ‘공장’이라는 민중의 현장으로 가야할지를 고민하던 시절이었으니 우리는 늘 엄숙하고 치열했던 것 같아. 시 쓰는 것조차 나는 목숨을 걸고 썼어. 지금 생각하면 뭔 말인가 하겠지만 그만큼 모든 일에 치열했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던 것 같아.

요즘 한 야당이 현 정부의 독재 타도를 외치고 있는 모양이더라. 그걸 보면서 저들도 과연 과거 군사독재 시절 혹은 지금 현재 독재 타도를 목숨 걸고 외친 적이 있었을까 생각하니 쓴 웃음만 나오더구나. 더 놀라운 것은 1980년대 공안검사 출신의 모 당 대표가 내민 말들이 맘에 걸려. 정의의 횃불을 듭시다, 독재 촛불에 맞서 활활 타오르는 불빛으로 투쟁합시다, 활활 타오르는 분노로 투쟁합시다…. 분명 80년대 유인물과 집회 구호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표현인데, 솔직히 난 ‘헐’ 했단다.

그러나 내가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아니야. 그 전에 이루어져야 했던 열정과 엄숙의 시대의 정리에 대한 것이지. 분명 80년대는 최루탄과 화염병, 그리고 짱돌 속에서 민주주의 이념을 굳건하게 한 시대였단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지. 87년의 민주주의 투쟁과 노동자 대투쟁은 그 정점이었어.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해방의 정념을 넘어서지 못했고,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그 정념마저 서서히 꺼져버렸다는 데 있어.

학교를 오래 다니다보니 나는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이 뭘 공부했는지를 경험할 수 있었지. 몇 권의 책과 수많은 팸플릿 등이 그들을 학습시켰지. 물론 정념이 지식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에 반대할 생각은 없어. 그러나 지식이 없는 정념은 쉽게 식어버리지. 그 다음엔 굳어버린 몇 개의 신념과 찬란한 추억만이 남을 뿐이지. 나는 지금 그 시대를 싸잡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야. 내가 그럴 자격이 된다고도 생각하지 않아. 다만 지금은 기득 권력층이 된 그때의 일부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대표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단다. 반민주 친자본에 대한 반대를 입 안의 혀처럼 굴리지만 차라리 반대하는 그들과 적대적 공생을 하고 있는 건 아닌 지 모르겠구나. 80~90년대의 긍정적인 면마저 그들이 소모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태형아, 사실 이것도 오늘 너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의 본론은 아니야.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글머리에 이야기한 것처럼 오늘에 대한 ‘마음 씀’이지. 그것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처럼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이겠지. 일상적으로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마음 쓴다는 것은 그의 상황과 어려움에 대해 잘 살피고 그 상황과 어려움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다는 뜻일 거야. 마음 씀을 통해서만 우리는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

보수든 진보든, 누군가를 비난하고 욕하는 것만이 전부인 집단은 가짜들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누군가에 대해 마음 씀이 없는 어떤 주장도 진실을 담고 있지 않을 테니 말이야. 그러나 다시 한번, 마음 쓴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해 우리가 끊임없이 관찰하고 공부해야 하는 일임을 강조하고 싶구나. 물론 마음 씀이 ‘마음 공부’로 바뀌지는 말았으면 해. 마음은 공부하는 게 아니라 쓰는 것이니까 말이야.

시인·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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