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의 향나무는 무성하고…신사 기둥은 롤러로 굴러다닌다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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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11-29   |  발행일 2013-11-29 제34면   |  수정 2013-11-29
불편한 역사의 동거…대구 속의 일제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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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공원 입구 정면으로 보이는 일본산 가이즈카 향나무 두 그루.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쓴 ‘대구물어’에 대구신사(달성토성 내)에 들른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과 함께 심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일부에선 왼쪽이 이토가 심은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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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공원 테니스장의 롤러로 사용되고 있는 신사 도리의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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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장 동편 입구에는 도리받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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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서씨 유허비 뒤에는 신사 건물의 잔해로 보이는 석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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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이었던 북성로 카페 삼덕상회. 입소문을 타고 많은 고객이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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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중구 서문로에 있는 일본군강제위안부역사관. 이 건물 또한 적산가옥이었다.

■ 달성공원의 흔적들

◇달성공원
일제가 심은 향나무 “식민지 개척 상징” 일부선 청산 목소리
테니스장 롤러가 된 신사 기둥을 놓고는 “통쾌해” “전시해야”

대구의 모태인 달성토성. 달성토성은 2천년의 역사를 지닌 대구의 랜드마크다. 하지만 1894년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 약 50년간 일본에 의해 무참히 훼손됐다.

1894년 일제는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달성토성 북편자락에 주둔시켰다. 이후 이곳에 1906년 일왕에게 절을 하는 요배전이 건립되고, 8년 뒤에는 대구신사가 조성된다. 달성에 신사를 건축함으로써 대구의 정체성을 없애기 위한 목적이었다.

◆가이즈카 향나무군락과 이토 히로부미 향나무

1909년 1월 이토 히로부미는 악질 친일파인 대구군수 박중양의 간계로 순종황제와 대구를 방문하게 된다.

당시 대구 거류민이었던 일본인 가와이 아사오가 쓴 ‘대구물어’에는 대구신사에 들른 이토가 순종과 함께 일본산 가이즈카 향나무를 심었다고 나와 있다. 가이즈카 향나무는 일본이 원산으로 정원을 꾸밀 때 심는 조경수다. 우리나라에선 자생하지 않는 나무다.

2006년 이정웅 전 영남일보 위클리포유자문위원은 두 나무의 수령을 계산해 얻은 결과라며 달성공원 입구에서 바라볼 때 중앙에 있는 두 그루의 향나무 중 왼쪽은 이토가, 오른쪽은 순종이 심은 향나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확인한 사실은 아니다.

달성공원 문화유산해설사 박지구씨는 “입구 정면에 있는 두 그루의 향나무 외에도 바로 뒤편에 비슷한 수령의 가이즈카 향나무가 있고 조금 떨어져 왼편에도 동종의 향나무가 있다”며 “누가 어떤 것을 심었는지는 증명할 길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공원 입구 오른편과 왼편에 100여 그루가 넘는 가이즈카 향나무 군락이 있는 것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관풍루 앞 동학교주 수운 최제우의 동상을 가이즈카 향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싼 것은 눈에 거슬린다. 일제는 달성을 신사가 있는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향나무를 비롯해 많은 나무를 심었다. 하지만 달성공원을 안내하는 리플릿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다. 향토역사관과 관풍루, 동물원이 전부다.

권상구 대구시 중구 도시만들기 지원센터 사무국장은 “가이즈카 향나무는 일제식민지 개척시대를 상징하는 나무다. 친일잔재 청산에 나무도 포함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사 도리 받침대와 기둥

달성토성에 있던 일본의 신사 입구 도리 2개는 1946년 8월에 철거됐다. 그로부터 20년 뒤 대구시는 단군사당으로 사용하던 신사의 주요 건물을 해체했다. 같은 해 5월 대명동에 있던 충령탑도 철거했다. 당시 달성공원 신사에 있던 도리의 기둥은 현재 테니스장 평탄작업을 위한 롤러로 활용하고 있다. 또 도리받침대로 추정되는 기초석이 테니스장 동편 입구에 있다. 받침대에는 오카야마현 ‘원립사’라는 직책을 가진 우메오 다케오(海野武男)라는 일본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것 말고도 달성 서씨 유허비 뒤 쉼터에는 도리의 기둥과 받침대와 같은 종류의 재질로 보이는 석재가 방치돼 있다. 이에 대해 한 시민은 “일제가 남긴 도리 기둥이 테니스장 롤러로 사용되는 것을 보니 통쾌하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다른 한 시민은 “아무리 그래도 신도는 일본인의 국교나 다름없는데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박물관 등에 전시해 역사교육의 산 교재로 활용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 미쓰사키 린타로와 수성못

◇수성못
확장한 일본인 묘와 민족시인 시비 마주해

아사카와 다쿠미. 서울 망우리공동묘지에 있는 1만여기의 묘소 가운데 일본인으로 유일하게 잠들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산림과에서 일하며 조선의 산림녹화에 전념했고 조선의 민예(民藝)를 사랑했다. ‘조선의 소반’ ‘조선의 도자명고’라는 책을 남긴 그는 조선말을 하고 조선옷을 입었으며 죽어서까지 조선에 묻히고자 했다.

대구에도 아사카와 다쿠미 같은 한 일본인이 수성못 뒷산 법이산자락에 영면하고 있다. 바로 미쓰사키 린타로라는 농업인이다.

미쓰사키 린타로는 지금의 20% 규모였던 수성못을 현재의 규모로 증축, 확장했던 일제강점기 인물이다. 개척농민으로 1915년경 대구에 정착한 그는 수성들이 잦은 홍수로 피해를 입자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수성못을 확장해야 한다고 청했다. 처음엔 거절했지만 끈질긴 설득으로 총독부예산과 1만2천엔(현재 약 10억엔)을 지원받아 25년 수성못을 완공했다. 39년 임종 때까지 수성지의 관리인을 하다 “수성못이 보이는 데 조선식으로 무덤을 만들어 달라”는 유언을 했다. 이후 수성못 완공으로 홍수 피해가 줄어들면서 수성들의 식량생산이 크게 늘었다,

미쓰사키의 묘소를 정비하고 관리하는 사람은 서창교 한일친선교류회장(81)이다. 그는 매년 봄 미쓰사키의 기일에 맞춰 추도식을 열고 있다.

“큰 형님이 돌아가시기 전 아버님의 유언이었다며 미쓰사키의 무덤을 잘 돌보라고 했습니다. 미쓰사키와 아버님은 20살의 나이차에도 우정이 두터웠다고 합니다. 미쓰사키가 수성못을 확장할 때 조선 사람한테 돌을 맞아 다리를 절었다고 하더군요.”

수성못 확장이 10년 만에 이루어진 걸로 미뤄 봐 당시 저수지로 편입되는 농토를 가지고 있던 조선인 지주들의 반대와 저항이 심했던 걸로 짐작된다. 수성못 완공 1년 후 이상화는 ‘개벽’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싣기도 했다. 현재 미쓰사키 린타로의 무덤 맞은편 수성못 북쪽에 이상화 시인의 시비가 있다.

지난 15일 미쓰사키의 묘소를 찾은 일본관광단은 마중 나온 서 회장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했다. 서 회장은 미쓰사키의 무덤을 잘 관리해 일본정부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다. 그런 연유로 지인과 학교 동기로부터 매국노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둘째 형님(서상교)은 일제강점기 대구상업학교에 재학 중 태극단사건을 주동한 인물로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아 석방된 독립운동가다. 6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독립장까지 받았다. 현재 89세로 서울에서 살고 있다.

서창교씨의 고언이다.

“얼마 전 형님으로부터 추운데 옷 따시게 입으라는 안부전화가 왔습니다. 한·일 간 문제는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 대구의 적산가옥

◇적산가옥
대구에 1천 채 남아 재개발-리모델링 맞서

대구도심에는 적산가옥이 많다. 특히 중구 북성로 일대 근대골목에는 1930~40년대 일본의 적산가옥이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대개 낡았거나 허름하다. 일부 적산가옥은 무너지기 일보직전이다. 마치 흑백사진으로 된 과거의 풍경을 보는 듯하다.

권상구 대구시 중구 도시만들기 지원센터 사무국장은 대구에 남아있는 적산가옥과 상점, 빌딩의 수를 합해 약 1천채 된다고 했다. 이 중 경북대병원 본관은 일제강점기 대구에 남아있는 건물로 가장 크다. 이 밖에 북성로 삼덕상회 건물, 태평로 마루보시 운수회사 건물, 진골목 옛 서병국 저택(화교협회 건물), 삼덕동 관음사 요사채 등을 통해 과거의 건축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적산가옥을 두고 두 개의 시선이 존재한다.

하나는 일제의 잔재이고 낡아 도심의 경관을 해치기 때문에 재개발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목소리는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해 관광자원이나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남겨둬야 한다는 입장이다.

삼덕초교 인근에 있는 빛살미술관은 일제강점기 삼덕초교 관사였는데 대구 YMCA가 미술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중구청이 대구시교육청으로부터 매입해 문화재로 등록을 할 예정이다. 북성로 카페 삼덕상회는 일제강점기 때 미곡창고로 사용됐던 건물로 카페 겸 문화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지난 8월 종로초교 옆에 오픈한 게스트하우스 ‘판’ 역시 창고였던 일제강점기 건물을 리노베이션해 레스토랑으로 바꿨다. 중구 서문로에 있는 강제위안부역사관 건물도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이다.

중구 근대골목을 되살려 아시아경관대상을 수상한 윤순영 대구중구청장은 “적산가옥 역시 건축문화와 주거문화의 한 단면으로 우리네 삶의 터전이었다. 개인이 소유한 적산가옥을 이래라 저래라 할 순 없지만 공공기관이 소유한 건물을 함부로 없애선 안 된다”며 “지속적으로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쉬는 중구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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