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대구지역에선 이미 3명이 총에 맞아 죽고 8명이 다쳐 도시는 혼란에 빠졌다’

  • 박진관
  • |
  • 입력 2015-10-02   |  발행일 2015-10-02 제35면   |  수정 2015-10-02
(1919년 일월 미상)
■ 헨리 먼로 브루엔 선교사의 일기·편지‘한국생활 40년’완역
20151002
김중순 계명대 한국문화정보학과 교수가 대구 신명고 교정에 있는 브루엔관을 가리키고 있다.
20151002
김중순 계명대 한국문화정보학과 교수가 완역한 ‘브루엔, 한국생활 40년’책.
20151002
계명대 동산의료원 내 동산언덕 은혜정원에 있는 브루엔의 첫 부인 마사 브루엔의 묘소. 그녀는 두 딸과 함께 대구에 묻혔다.

계명대 동산의료원 내 동산언덕 은혜정원에 있는 브루엔의 첫 부인 마사 브루엔의 묘소. 그녀는 두 딸과 함께 대구에 묻혔다.
브루엔 선교사는 1919년 3·8대구독립만세운동을 직접 경험한 뒤 미국 벨비데르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부친 J.D. 브루엔에게 편지를 써 한국에서 벌어진 3·1운동의 당위성과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전했다. 편지 속에는 일본이 비무장으로 저항하는 한국인에게 잔혹한 방법으로 진압을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브루엔은 일본의 검열을 피해 사인도 하지 않은 채 익명으로 써서 아담스 목사에게 편지를 전달함으로써 부친이 볼 수 있길 바랐다. 편지는 먹지를 사용한 복사본이 남아 있어 번역이 가능했는데 요약해 소개한다.

만세운동에는
모든 계층이 참여했다
외딴 섬마을이나 계곡까지
전국가적 항쟁으로 퍼졌다
우리병원은
다친 사람들로 가득찼다

대구지역의 시위자 재판엔
15세 된 두 소년과
나환자도 있었다

대구형무소에 5천명이 수감됐다
수감자 화이팅 박사가 증언하길
머리채 잡혀 끌려오는 여학생을
노인이 보호하려 손을 들었다가
가슴에 총을 맞았다고 했다


◆지금 한국 땅에서는(1919년 월일 미상)

“한국에서의 어지러운 상황에 대한 루머를 들었을 것입니다. 이는 일본이 군대를 잘 못 운영한 것에 대한 마땅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은 민족자결주의에 따른 이 운동이 파리평화회의에 전달돼 어떤 조치가 취해질 것이란 믿음에 근거했습니다. 민족자결주의는 이미 세계에 퍼졌고 한국인은 일본의 통치에 과거와 현재, 미래에도 만족하지 않을 겁니다. 한국에선 모든 도시마다 ‘만세’라고 외치며 독립선언을 했습니다. 교회도 참여했습니다. 기독교인은 이 사회에서 가장 계몽된 사람들이며 사상적 지도자입니다. 기독 학생은 모든 일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만 참여한 건 아닙니다. 모든 공립학교가 참여했고 비기독교 선비는 물론 합병시대에 일본인에게 영예를 얻었던 옛 양반까지 참여했습니다. 이는 모든 계층을 대표하는 것이며 외딴 섬마을이나 계곡까지 전 국가적인 항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기독교인은 비폭력으로 운동에 참여했고 독립선언도 폭력대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학교는 문을 닫았으며 학생들은 자유로워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중략)


이 일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우리도 놀랐고 일본은 선교사가 주모자인양 몰아붙였습니다. 지금 내가 쓰려고 하는 끔찍한 부분은 문명사회에 알려져야 합니다. 일본은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순수한 열망의 표현을 프로이센 군대식 체제로 무자비하게 대응했습니다. 군인들은 주먹으로 때리고 곤봉으로 내리치면서 첫날 이후부턴 비무장 상태로 저항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총검을 휘두르며 총을 쐈습니다. 살해된 사람의 수는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군중 속에 소방관(헌병대로 보임)을 풀었고 그들은 길고 구부러진 모양의 고리로 사람을 내리쳐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그 잔혹성을 목격했고 우리 병원은 다친 사람으로 가득했습니다. 나에겐 한 도시에서 죽은 사람의 사진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군사체제 결과입니다. 그들은 독일의 체제와 이상을 받아들여 한국인을 잔혹하게 진압했습니다. 그러나 이 난리통에 한국의 상황에 주의를 기울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고 일본을 비판할 나라도 별로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일본군은 한국 땅에서 방해가 되는 한국인을 제거하기 위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삶의 조건을 견딜 수 없도록 더 많은 이를 만주로 쫓아내고 경제적 압박으로 목을 졸라 수천 명만 없애버린다면 그들은 조만간 목적을 달성할 것입니다. 한국의 친구들이 이 사실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 ‘한국에 있는 선교사가 그랬다’고 하지 말고 그냥 ‘친구’라고 말해주기 바랍니다.”(하략)

◆잔혹한 만행(1919년 월일 미상)

“서울에서 이 사건(3·1운동)이 벌어지기 1주일 전 이갑성이라는 대구 출신 청년이 해리(브루엔)를 만나러 왔다.(이갑성은 민족대표 33인 중 1명으로 브루엔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대구선교기지에서 일을 하고 병원에서 일을 하다 서울 세브란스병원 약제실 총책임자가 됐다. 그는 우리와 따뜻한 우정을 지속했고 우리가 서울에 갈 때마다 만났다. 선교사가 있는 집(동산) 바로 밑에서 첫 번째 시위가 일어나 그 광경을 잘 볼 수 있었다. 그날은 장날이었다. 지도자가 상자 위에 올라가 선언서를 읽었다. 경찰이 “하지 마. 하지 마”라고 격렬하게 소리를 질렀으나 군중은 귀가 먹을 만큼 큰소리로 만세를 외치며 줄을 맞춰 시내로 향했다. 경찰은 말을 타거나 행군하면서 이들을 따라 갔다. 우리는 무슨 일이 났는지 보기 위해 집에서 뒷길로 내려 왔다. 여학교(신명여학교) 양호교사가 여학생이 어디 있는지 찾았다. 남문 교차로에 이르러 여학생이 코너에 나타나더니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으나 곧 군중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경찰은 대열을 무너뜨리고 학생들을 체포했다. 우리는 학생과 같이 가겠다고 했으나 저지하고 검문을 했다. 경찰은 거칠었으며 몇 명은 상처가 나 피를 흘렸다. 그러나 저항하지 않았다. 우리 집 요리사는 돼지처럼 던져져서 결박을 당했고 기마병은 “죽여라”고 소리쳤다.(중략)

대구에선 이미 3명이 총에 맞아 숨지고 8명이 다쳐서 도시는 혼란에 빠졌다. 자선병원(동산의료원으로 추정됨)에 6명이 실려왔는데 한 사람은 이미 숨졌으며 5명 가운데 2명은 위중했다. 4월15일 대구지역 사람의 재판이 시작됐다. 77명이 재판을 받았는데 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다. 그들 중에는 목사 2명, 장로 3명, 몇 명의 교사와 20여명의 학생이 있었다. 나는 오전 9시부터 밤 9시30분까지 법정에 앉아 있었다. 죄수들은 밧줄에 묶이고 몇몇은 쇠사슬로 묶었다. 15세 되는 두 소년도 있었다. 키가 너무 작아 판사가 이들의 정수리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대부분 징역 3년에서 6월을 선고받았다. 죄수에게 할 말이 있냐고 하자 절반 정도가 일어나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이 가운데는 1년형을 선고받은 나환자도 있었다. 윈이 이 사람의 형편을 편지로 써 제출했는데 5일 이내에 항소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먼저 항소했던 사람은 오히려 징역이 3년에서 4년으로 형량을 더 받았으니 항소를 못 하게 하려는 처사였다. 수감자는 일본의 방식대로 무릎을 꿇고 앉도록 강요당했으며 열쇠로 머리 내려치기, 손가락 사이에 열쇠를 넣어 비틀기, 복사뼈 내려치기 등의 형벌을 가했다. 감옥(대구형무소)에는 5천명의 수감자가 있었다. 재령에서 온 화이팅 박사도 이곳에 수감됐는데 그가 증언하길 여학생 하나가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오는 것을 본 노인이 다른 여학생을 보호하기 위해 손을 들어올렸다 가슴에 총을 맞았다고 했다.(중략)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은 우리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사실이었다. 일본 군인이 한 마을을 불 태우고 25~30명 되는 마을 사람을 교회 안으로 밀어넣은 다음 불을 질러 모두 학살했다고 한다. 40개의 가옥 가운데 다섯 채만 남았다고 한다.”(제암리 학살사건)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