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추원 의관이자 미곡상의 막내로 태어나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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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0-24 07:26  |  수정 2016-10-24 07:26  |  발행일 2016-10-24 제3면
땅 800만평 상속받아 사비로 고서화 수집
■ 간송 전형필의 애국
중추원 의관이자 미곡상의 막내로 태어나
수집품을 살피고 있는 간송 전형필.

간송미술관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이 미술관을 건립한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해야 한다.

간송은 중추원 의관이자 미곡상이었던 전영기의 2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휘문고보와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했으며, 24세에 800만 평(4만 마지기)의 유산을 상속받았다. 매년 200만 석을 수확할 정도로 부자였는데 당시 조선에서 매년 100만 석 이상을 수확하는 부자는 40명 정도였다고 한다.

1940년부터 한남서림을 경영했으며 장서 약 1만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우리 문화사 연구에 큰 역할을 했다. 같은 해 동성학원도 설립해 한국 최초의 민족사학인 보성학교(현 보성중·고)를 운영했다.

이런 측면에서 간송은 식민지 시대에 한국의 혼과 얼과 미를 지켜낸 대(大) 수장가이자 일제강점기 민족문화와 정신 말살정책에 맞선 문화유산 수호자였다. 또 훈민정음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 근대까지 전 시대에 걸쳐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고서화 등을 사비로 수집하고 연구함으로써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간송은 한학 대가이자 민족미술의 대계를 정리한 위창 오세창의 제자였다. 오세창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며 간송은 간송미술관의 고서화 명품 상당수를 오세창의 감정과 평가 후 수집했다고 한다. 오세창은 역대 서화가의 사적을 토대로 삼국시대부터 근대 서화가 관련 기록을 총정리한 사서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펴냈으며 전형필에게 간송이라는 호를 지어줬다.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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