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트럭에 인생을 싣고 달린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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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21   |  발행일 2017-07-21 제33면   |  수정 2017-07-21
[소설기법의 인물스토리 人生劇場] 다큐영화 ‘바람커피로드’ 여행자 이담씨
애마 ‘풍만’에 트럭카페 차려 5년째 길 위의 나날들
‘달곰쌉쌀’ 커피 한 잔으로 수많은 삶과 새로운 인연
이달 초엔 대구서 출연 다큐 감상 겸한 커피특강파티
20170721
커피여행가 이담씨. 5년째 전국을 돌고 있는 그가 폭염기를 피해 잠시 서울에 들렀다가 한 후배 커피숍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서울을 등지고 제주도로 건너올 때였다.

난 도시에서의 삶을 제대로 인내하지 못해 구겨진 내 이름, ‘이종진’을 남해의 파도에 수장시켜 버렸다. 대신 새로 만든 닉네임 ‘이담’을 품었다.

엄격하게 말해 난 ‘떠돌이’다. 가족도 없고 집도 없다. 인연이 되는 집에서 하룻밤 신세 진다. 공짜로 대접받는 건 아니다. 세상사 공짜는 없는 법, 난 그 고마움을 커피 내려주기로 대신한다. 그런 인연도 안 보이고 남은 돈도 없을 때 난 내 애마인 커피트럭 ‘풍만(風滿)’에서 쪽잠을 잔다. 난 속세를 떠난 구도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가출해 방랑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냥 ‘커피여행자’다. 누가 보면 ‘커피 때문에 개털이 된 삶’이라고 나무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세상을 떠돈다는 것. 어떤 정착지를 찾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고 ‘한 곳에서 오래 정착하지 않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오늘은 여기서 이런 커피, 내일은 저기서 저런 커피를 내린다. 내게는 그 자체가 성찰이고 보람이고 희열이다. 내가 14년 전쯤 제주도로 망명하던 날, 그때부터 전국 곳곳에서 ‘한국형 커피족’이 출몰하기 시작한 것 같다. 일견 집시족 같은 이 종족. 이들은 커피 한잔으로 안분지족의 평화로움을 느낀다. 많이 가져 행복하기가 아니다. ‘알맞게 갖고 더 행복해지기’란 믿음을 공유한다. 사는 형편과 처지가 서로 달라도 커피로 능히 한맘이 된다. 그래, 커피족이 ‘커피교’의 교도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들이 전국에 포진해 있어 지금 수월하게 여행할 수 있다. 20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의 커피여행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SNS로 연결돼 있는 커피족은 구한말의 동학교도처럼 서로를 챙겨준다. 그 덕분에 ‘길 위의 나날’이 가능해진 것이다.

커피를 매개로 해보라. 그럼 그 여행은 훨씬 재밌고 풍요로워진다. 난 커피를 갖고 각기 다른 삶의 스토리를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난 커피숍에 묶여 있는 바리스타가 아니다. 그렇다고 커피장사꾼도 아니다. 그냥 커피 팔아 내가 운신할 수 있을 정도의 이익을 남기면 족하다. 너무 많이 팔면 반드시 탈이 난다. 과도한 이익은 영혼을 소외시킨다. 난 저축 못지않게 나눔의 파급력을 믿는다. 서로 가진 걸 나누면 한 개만 갖고서도 나머지를 공유할 수 있다. 혼자 호의호식하려고 하면 소비적인 삶으로 추락한다. 적어도 나누면 모두 풍족해질 수 있다. 커피족은 혼자만 잘 사는 걸 경계하고 경멸한다.

대구의 장우석 독립영화감독한테서 연락이 왔다. 그래서 7일 수성경찰서 옆 골목 지하에 있는 물레책방에서 영화감상을 겸한 커피특강파티를 했다. 지난해 현진식 감독이 내 삶을 소재로 해서 만든 다큐멘터리영화 ‘바람커피로드’를 제8회 DMZ국제다큐영화제에 출품했는데 첫날에 매진 사태가 벌어졌다. 요즘 월 10회 정도 그런 행사를 갖는다.

난 내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에만 지갑을 연다. 그러니 과도한 돈이 필요치 않다. 허기를 위해 밥을 먹고, 비와 추위를 피할 정도의 잠자리, 그리고 커피 물품을 살 수 있으면 족하다. 미당 서정주 시인은 자신을 만든 게 8할은 바람이라고 했는데 난 그 바람이 9할 이상은 될 것 같다. 내가 전국을 돌 때 나를 이동시켜주는 애마는 풍만. 도로 위의 돛배 같은 커피트럭이다. 난 지난 5년 동안 풍만 덕분에 전국을 누비면서 조선팔도의 바람을 익힐 수 있었다. 사람의 시선과 표정, 그리고 말까지도 바람이다. 나도 나만의 바람근육이 있다. 각기 다른 근육질 때문에 때론 서로 부딪쳐 갈등의 바람이 된다. 하지만 그 갈등은 고마운 것. 삶을 더욱 원만하고 재밌게 반죽해준다. 동질의 바람뿐이라면 굳이 전국을 떠돌 필요도 없다.

한국에서 가장 바람이 푸짐한 제주도. 제2의 내 삶이 바람섬에서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거기서 풍만을 잉태했고 바람 품은 커피족으로 지금 그대 곁으로 달려가고 있다. 역사상 처음 커피를 발견한 목동 칼디가 살았던 에티오피아, 어쩜 거기가 전생의 내 고향일 것 같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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