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자연지리 보고서 대구GEO] 대구읍성의 재발견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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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22   |  발행일 2014-08-22 제33면   |  수정 2014-08-22
그 많던 대구읍성의 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20140822
담일까 성벽일까. 옛 대구읍성의 성돌로 추정되는 석재가 서문시장 남쪽과 계성고 서북쪽 담장에 길이 70m, 높이 4m로 규칙적으로 쌓여 있다. 권상구 위클리포유 대구지오 자문위원은 “성돌의 상태가 양호하고 다른 석재와 섞이지 않았다”며 “옹벽 위 시멘트담장을 제외한 돌담은 1908년 계성고 아담스관을 지은 다음 1920년대 천왕당지를 매립하고 서문시장을 옮길 때 쌓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대구시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유럽과 일본의 도심에 위치한 고성(古城)을 보면서 ‘대구에는 왜 저런 고색창연한 성이 없을까’ 하는 부러운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108년 전만 해도 대구는 그것보다 더 멋진 성(城)을 가졌다.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진 중인 순천의 낙안읍성보다 규모가 훨씬 크고 아름다웠던 대구읍성의 모습은 어땠을까.

‘나는 성벽 위에서 읍성의 순시로(巡視路)를 따라 성을 한 번에 조망할 기회를 가졌다. 그 길은 베이징성(자금성)의 축소판과도 같은 인상을 주었다. 성벽은 도시를 둘러싸고 평행사변형으로 이어졌다. 그 각 벽면의 중앙에 똑같은 규모의 요새화된 성문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그 위로 우아한 누각이 세워져 있었다. 누각의 내부는 과거의 사건들을 환기하는 글귀와 그림들로 장식돼 있었다. 거기서 가을 황금빛 들판을 구불구불 흘러가는 금호강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중략)

발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리자 대도시의 온갖 거리들과 광장, 기념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일반 백성이 사는 구역에는 짚으로 엮은 지붕들이 빼곡했으나 귀족들이 거주하는 도시의 중심구역에는 용마루에서 처마 끝까지 직선과 곡선이 기막히게 조화를 이룬 기와지붕이 우아한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이 글은 프랑스의 탐험가이자 지리학자인 ‘샤를 바라’가 1888년경 대구읍성을 보고 쓴 ‘조선기행’ 중 일부 기록이다. 조선시대 영조 이후 170년간 대구를 대표했던 건축물인 읍성은 1906년 10월~1907년 4월, 대구군수이자 경상북도관찰사 서리였던 친일파 박중양과 일본거류민회 등에 의해 무단으로 무참히 파괴됐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의 비호 아래 박중양은 성벽을 해체하고 1909년 대구의 중심을 관통하는 십자도로를 냈다. 이어 옛 성곽을 따라 동성정(町·작은 마을 단위의 행정구역), 서성정, 남성정 등으로 나누는 한편, 일본식으로 도시를 구획하고 신작로를 냈다.

광복 후 대구시는 일본식 행정구역을 버리고 옛 성곽 길을 따라 동성로(東城路), 서성로(西城路), 남성로(南城路), 북성로(北城路) 등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대구가 6대 광역시는 물론 다른 대도시와 달리 옛 읍성 길의 명칭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도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권상구 위클리포유 대구지오(GEO) 자문위원은 “대구시민은 동성로, 서성로 등 성곽 길의 명칭을 정하기 전 통상 이 길을 ‘성 뜯은 길’로 불렀다”고 했다.

대구 중구청은 2009년부터 도심재생사업을 통해 옛 성곽 길을 따라 동성로에 폭 1.5m의 장대석을 깔기 시작하면서 읍성을 상징화하기 시작했다. 또 영남제일관터와 공북문터, 진동문터, 달서문터를 고증해 표지석을 세웠다.

그러나 동성로는 고층신축건물이 들어선 데다 한전배전반 지중화사업 등으로 이미 읍성 하부의 원형이 교란돼 읍성 기저부의 발굴이 불가능했다. 남성로는 2003년 한방테마거리조성사업을 하면서 일부지역에서 성돌을 발굴하기도 했으나 당시만 해도 그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인도 주변이 옛 성곽 길인 서성로는 도심의 간선도로인 점이 발굴의 장애가 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2012년 8~10월, 중구청과 중구도시만들기지원센터는 읍성 성돌 현지조사에 본격적으로 나서 지난해 대구읍성 성돌 실태조사서를 발간했다.

이번 호 위클리포유는 대구지역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성돌을 자세히 소개하는 한편, 현재 진행 중인 성돌 발굴현황을 보도한다. 또 대구읍성의 역사와 해체과정, 대구읍성 복원의 의미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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