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4-구미] 낙동강 물길따라<10> 구미의 나루터

  • 손동욱
  • |
  • 입력 2014-08-25   |  발행일 2014-08-25 제11면   |  수정 2021-06-15 17:50
영남대로 이어주던 주요 길목 ‘낙동나루’…
왕건과 견훤 일리천 설화 품은 ‘여진나루’…
20140825
낙동나루가 있었던 낙단교 일대. 낙동나루는 낙동강 뱃길을 이용해 들어오는 배들과 구미를 통과하는 영남대로의 주요 길목이었다. 1967년 나루에서 20리쯤 아래에 일선교가 놓이고, 86년 낙단교가 놓이면서 나루에 대한 기억조차 희미해졌다.

 

#1. 낙동나루

“배 들어온다!”

관수루 아래 넓은 모래밭에 임시 휘장이 쳐지자 사람들이 휘장 주변에 하나둘 모이더니 어느새 시장판이 된다. 각 지역에서 온 보부상이 많다. 방물장수도 있다. 그중 한 사람이 하류 쪽에서 올라오는 배를 보고 소리를 친 것이다. 사람들은 배가 정박할 곳으로 몰려간다. 소금배가 먼저 오고, 뒤이어 일본 상선이 뒤따른다.

강변의 주막과 객줏집에서도 사람들이 정박하는 배를 구경하느라 밖으로 얼굴을 내민다. 소금배는 김해에서 올라온 것이다. 객주의 장정들이 먼저 배에 올라 미리 예약이라도 한듯 소금 포대를 나르기 시작한다. 이어서 보부상들이 소금 거래를 트기 위해 몰려든다. 인삼과 녹용 등 한약재도 소금과 함께 부려진다. 한편 일본 상선도 재빨리 하역작업을 해 배가 오기 전에 미리 쳐둔 천막에다 진기한 물건을 펴 보인다. 거울과 빗 등 여성의 화장용기도 있고, 나무 인형도 보인다. 비단도 있다. 방물장수들이 그런 물건에 먼저 호기심을 보인다. 바로 흥정이 이루어지고 물건을 먼저 차지하려는 사람들로 왁자지껄해진다.

나룻배는 부지런히 사람들을 실어나른다.

강 건너 상주 쪽에서는 사람들이 연신 배를 독촉한다. 소금배와 일본 상선이 왔으니 함께 싣고 온 물건들이 궁금한 데다 행여 늦어서 그 물건들을 놓칠까봐 객주와 보부상들이 마음 졸이며 빨리 이쪽으로 건너오려고 안달을 한다. 이쪽에서는 느긋하게 사람들이 배가 출발하기를 기다린다. 이미 물건들을 산 보부상들과 방물장수들이 강을 건너기 위해 배에 짐부터 올려놓았고,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지, 젊은 양반들이 종과 함께 강가에서 서성이며, 배와 사람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한다.

 

 

선산 10景에 꼽힌 강정나루 등 지리적 특성상 나루터가 많아
큰 마을과 큰 마을 이어주며 자연스레 물산 모이고 市場 발달

 


또 배가 들어온다. 이번 배는 강 건너편에 정박한다. 세곡을 싣고 온 관의 배다. 배 댈 곳에는 벌써 소달구지들이 몰려 있다. 강 하류에 있는 각 지역의 조세창고에서 한양으로 세곡을 실어나르는 것인데, 이곳이 기점이 되어 일단 하역을 한 다음 육로를 통해 문경으로 해서 조령을 넘어 충주로 실려가, 다시 배를 타고 한강으로 하여 서울로 운송된다. 하역 작업이 이루어지기 전에 나루터에 상주하는 관리들이 먼저 승선하여 하역할 물건을 파악한다. 한동안 배 안이 부산하더니 이윽고 하역하라는 명이 떨어진다. 하역한 물건은 우마차들에 바리바리 실리고, 수십 대의 우마차들이 길에 도열한다. 배의 관리들은 나루터 관리들과 함께 이미 주막에 들러 한 잔을 하는 모양이다.

낙동나루는 상주시 낙동면 낙동리에 있었다.

부산에서 밀양과 청도, 대구, 칠곡을 지나 구미지역으로 통한 영남대로는 구미를 통과하여 낙동나루를 건너 비로소 상주로 접어들어, 문경을 지나 충주로 해서 서울로 향했다. 그러니 낙동나루는 서울로 가는 주요 길목이었다. 과거보러 가는 이들이 꼭 이 나루를 이용했고, 이따금 일본의 사신들도 이곳까지 배를 타고 와서 다시 육로로 해서 서울로 향하기도 했다. 영남대로의 주요 기점이었기에 이곳에서는 5척의 배가 상주했다. 아울러 도선군(導船軍) 등 16명의 군인과 장교가 배치됐다. 정부에서는 특별히 이 나루를 관리하는 도승(渡丞)까지 배치할 정도였다.

6·25전쟁 직후까지만 해도 낙동나루는 뗏목이나 동력선으로 버스를 실어나르는 등 나루터의 명맥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67년 나루에서 20리쯤 아래인 도개면 신림동에 일선교가 놓이자 그 명맥이 끊겼다. 86년 낙단교가 놓이면서 나루에 대한 기억조차 희미해지고 말았다.


#2. 여진나루와 강정나루

여진나루는 여차진(餘次津), 여차니진(餘次尼津), 여진(麗津) 등으로 기록에 나타난다.

이 나루는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전투와 관련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이른바 ‘일리천 전투’인데, 고려군과 후백제군은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접전을 벌렸다.

왕건은 냉산의 숭신산성에 진을 치고 낙동강 건너편에 진을 친 견훤 군대와 대치, 수차례 공격을 했으나 쉽지 않았다. 때로 견훤이 활을 맞았을 때에도 강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다시 원기가 왕성해져서 다시 대항해오니 당할 길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때 이곳을 지나가던 한 기인이 왕건에게 말했다.

“견훤은 지렁이의 화신이라 물속에서 기운에 펄펄 나는 것입니다. 물속에 소금을 풀어놓으면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왕건은 이 말을 듣고 밤에 수백 가마의 소금을 강물에 풀어 짜게 만들었다. 견훤이 그것도 모르고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온몸이 오그라들자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왕건이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대승이었다. 승리 후 왕건은 강물을 건너면서 “이 나루는 나의 나루!’라고 소리쳤다 하여 여진(余津)으로 기록했다는 설화가 전한다. 어쨌든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 후백제군은 도주를 거듭하다가 자중지란이 일어 후백제는 최후를 맞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일리천이 실제 어느 강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낙동강일 거라는 추측이 구미지역에서 많이 나온다. 낙동강 여진나루를 중심으로 남아있는 왕건 관련 지명을 통해 그렇게 추측하는 것이다.

강정나루는 여진나루의 하류에 위치한다. 조선시대에 보천탄(寶泉灘)이라 불리기도 했다. 해평면 해평리에 있었다. 지금의 청소년 야영장 앞의 솔숲 근처로 추정된다. 점필재 김종직은 이 나루를 선산의 10경 중 하나로 꼽아 시를 읊기도 했다.



보천탄 가에 상선이 모이니
수많은 집의 사람들 식사에 소금이 있네
기름진 음식을 꾀함에 적절히 세금을 부과할 이 누구랴
예로부터 장리(長吏)가 능히 청렴하기 드물었네



보천탄은 조선조 말에 비로소 강정진(江亭津) 또는 강정나루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김종직의 시에서도 보이듯, 이곳 역시 소금배를 비롯하여 많은 물산이 집산됐다. 소금과 곡식, 생필품의 거래가 나루 주변에서 이루어지면서 상하류를 왕래하는 배가 정박할 때마다 시끌벅적해졌다. 과거보러 가는 이들의 왕래도 잦았다. 소금배는 일제강점기까지도 올라왔다고 한다.

광복 이후에도 강정나루는 강 건너 해평으로 가는 주요 통로였다. 해평 들에 농사를 짓거나 해평장에 물건을 사고 팔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나루였다. 해평 장날에는 장꾼들과 주민들의 장보기 행렬이 끊이지 않아 그 광경이 볼만했다. 1970년까지도 나룻배가 이용될 정도였다. 소를 내다 팔기 위해 배로 꽤 많은 소를 싣고 강을 건너는 진풍경이 장날이면 펼쳐졌다. 덩달아 이 나루의 양안에는 몇 개의 주막들이 잔존, 강을 오가는 농민과 장사꾼과 낚시꾼을 상대로 술을 팔았다.

나룻배는 80년 초까지 있었으나 그후 사라져 사람들은 양안의 주민들이 퍽 불편을 겪기도 했다. 그러다가 97년 숭선대교가 세워지면서 나루를 대신해 고아읍과 해평면을 이어주고 있다.


#3. 비산나루와 강창나루

강창나루는 금오서원이 있는 구미시 선산읍 원리 낮으막한 남산 아래 있었던 나루다.

강창나루 역시 부산에서 올라오는 소금배가 머물던 곳으로 이곳에서 물건을 하역하거나 쉬었다가 상주 쪽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이곳에 하역된 물건은 보부상들에 의해 김천과 상주, 안동으로 팔려나갔다. 소금배들은 일제강점기 때는 물론, 1950년대까지도 이 나루에 정박했다. 나루에 소금배가 닿으면, 김천에서 온 객주들이 우선적으로 소금을 흥정하여 상당한 양이 큰 시장이 있었던 김천으로 실려가곤 했다. 남은 소금은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가 상주와 안동에서 주로 팔렸다.

강창나루가 번성할 때에는 덩달아 마을도 번창했다. 지금은 마을이 없지만, 당시에는 남산마을보다도 더 컸을 정도였다. 그러나 70년대 구미~선산 간 국도가 뚫리면서 나루의 이용객이 크게 감소,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 다른 곳으로 이주해버렸다.

구미시 비산동, 현 구미국가산업단지 1단지 서북쪽 끝인 산호대교 인근에 있던 비산나루는 남쪽 부산지역에서 올라오는 소금배와 청어배, 경북 북부지역에서 농산물을 싣고 내려오는 배가 정박하던 물류 수송의 중심지였다고 전해진다. 또 갈뫼시장이 있어 소금배가 들어오는 날이면 성황을 이뤘고, 주변에 낙서정(洛西亭)과 비산향교가 있어 상업과 교통,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1934년 7월 중순에는 홍수가 발생해 옛 비산나루는 사라지고 700m 남쪽에 새 비산나루가 생겼으며 85년 배 운행이 중단될 때까지 공단종사자와 학생, 주민의 주요 교통수단으로 활용됐다. 그러다가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생기면서 85년부터 배 운행이 중단됐다. 구미시는 비산나루가 간직했던 강변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비산나루터 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4. 나루 중심으로 시장이 서기도

나루는 강을 건너다니는 곳이다. 옛날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 강을 만나면 배로 건너야 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목이 있기 마련이고, 거기가 나루터가 되기 마련이다.

구미 지역은 낙동강이란 큰 강을 끼고 발달한 지형이라, 나루터가 많았다. 그중 강정나루, 강창나루, 비산나루를 구미의 3대 나루터로 꼽는다. 강의 좀 더 위쪽으로 상주 쪽에 나 있는 낙동나루도 구미지역 사람이 상시 이용하던 나루로 중시됐다. 특히 구미지역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영남대로의 길목이라 큰 나루로 꼽혔다. 이 밖에 구미 도개면 월림1리 월목 마을 앞의 월곡진나루터도 꽤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낙동강은 민족의 대동맥이자 영남의 젖줄로 꼽혀온 만큼 영남지역 사람들의 생명줄이나 다름 없었다. 당연히 수많은 나루들이 있었다. 나루는 큰 마을과 큰 마을을 잇는 만큼 나루를 중심으로 고을이 발전하고, 물량이 집산됐다. 나루를 중심으로 시장이 섰다. 구미지역 역시 많은 나루를 통해 마을이 번창했고, 시장이 열렸으며, 남쪽인 부산지역과 북쪽인 안동지역에서 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배들이 정박, 공물이 하역되고 다시 공물을 육로로 실어나르기 위한 주요 기점이 되기도 했다.

글=이하석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 : 구미시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