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의 寶庫 김천을 이야기 하다 .20] 옛 김천장의 명맥을 이은 황금시장

  • 임훈 박현주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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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9-18   |  발행일 2014-09-18 제11면   |  수정 2014-11-21
일본인 횡포 극심했던 시대…토박이 상인의 새 터전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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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황금동 황금시장에서는 조선 5대 장시로 불렸던 김천장의 영화로운 시절을 엿볼 수 있다. 대형유통업체의 등장으로 손님이 줄긴 했지만, 장날마다 사람이 붐비는 탄탄한 전통시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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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의 김천시 감호동과 용두동 일대의 전경. 당시 김천에 정착한 일본인들이 지은 일본식 가옥이 눈에 띈다. 일본인들은 이곳을 ‘본정(혼마치)’이라 부르며 조선인을 상대로 상행위를 이어갔다. <김천시 제공>


평양·개성·강경·대구와 더불어 조선 5대 장시였던 김천장은 화려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880년경부터 1930년대까지 최대의 전성기를 누렸다. 우시장과 어물 등으로 유명세를 치렀다. 하지만 광복 후 도로교통의 발전과 더불어 쇠락의 길을 걸었고, 새롭게 생겨난 김천의 전통시장들에 주축 시장의 지위를 내주었다. 풍요로웠던 김천장의 왁자지껄한 풍경은 퇴색했지만 김천시 황금동 황금시장에서 옛 김천장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스토리의 寶庫 김천을 이야기하다’ 20편은 번성했던 김천장의 전통을 잇고 있는 황금시장에 관한 이야기다.

청과·채소 팔던 난전에서 시작
해방후 공설시장으로 만들어
고추·마늘 유통 중심지로 부상
소 국밥·메주·건어물도 유명

◆영화롭지만은 않았던 과거

1905년 경부선철도가 놓이면서 김천장은 큰 변화를 겪는다. 경부선철도 건설과정에서 수많은 일본인이 김천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특히 경부선 건설현장 사무소 중 한 곳이 김천에 있어 유입된 일본인이 더 많았다. 일본인들의 김천행이 이어지자 1910년 경술국치 이전에 이미 일본인촌이 김천에 들어설 정도였다.

김천은 일본인들에게 황금의 땅 ‘엘도라도’였다. 충청·전라·경상도를 잇는 사통팔달의 교통요지였던 김천장은 일본인들도 포기할 수 없는 터전이었다. 정착초기 일본인들을 상대로 공산품을 판매하던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상대로 물건을 팔기 시작하면서 점차 상권을 확대해나간다. 일본인은 공산품을 값싸게 수입해 비싸게 되팔아 큰 이익을 남겼다.

1922년 감천에 제방이 축조되기 전까지 시장의 대부분은 백사장이었다. 당시만 해도 상인들은 직지천과 감천의 합류지점부터 형성된 백사장 위에 차양을 치고 좌판을 벌였다. 이처럼 감천변을 중심으로 장이 형성되어 있었고, 더 큰 이익을 노린 일본인은 김천장의 중심이었던 김천시 감호동과 용두동 일대의 땅을 구입하기 시작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비만 오면 감호동 주변은 물에 잠기는 곳이었기에, 일본인은 헐값에 땅을 구입할 수 있었다. 이후 일본인은 김천장의 노른자위를 차지하고 나서 감호동 일대를 ‘본정(혼마치)’이라 부르며 상행위를 이어갔다.

일본인들이 감호동 일대에 번듯한 상가를 짓고 영업에 나서자 상권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번듯한 점포를 가진 일본인 점주들은 난전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복 후에도 김천장을 드나들던 노점상인들은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김천의 토박이 상인들은 주변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곧 황금시장에 새 터전을 꾸린다. 김천시 황금동 도로변에서 난전을 펼친 상인들이 청과·채소 등을 팔기 시작했고, 시장의 규모는 점점 커진다.

황금동 주변에 노점상이 무질서하게 들어서자 김천시는 공설시장인 황금시장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1953년 개설했던 모암동의 중앙도매시장을 59년 6월 폐쇄하고 그 주요시설을 지금의 황금동으로 이전해 왔다.

황금시장 초창기에는 마늘, 고추, 양파 등 농산물이 주로 거래되었지만, 점차 상거래가 활성화되면서 김천을 대표하는 시장으로 발전한다. 원래 김천장의 중심이었던 감호시장도 성업했지만 6·25전쟁 때 시장 건물 상당수가 불타고 말았다. 감호시장 상인들은 점포를 재구축해 영업을 이어갔지만 건물이 낡아 고객들이 다른 시장으로 분산됐다. 현재의 감호시장은 약간의 의류 점포와 더불어 5일마다 열리는 장날에만 상거래가 활성화되는 편으로, 평일에는 한산하다.


◆조선 5대 장시의 전통을 잇다

황금시장이 김천장의 명맥을 이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조선 5대 장시였지만, 중심지였던 감호시장의 규모가 축소되면서 대부분의 상권이 황금시장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현재 황금시장의 점포 수는 160여개로 옛 김천장의 위세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장날인 5·10일마다 펼쳐지는 활기찬 시장의 풍경이 이를 증명한다.

황금시장에서 평생 동안 농산물유통업을 이어온 손권만씨(58)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원래 감호시장이 소금배가 들어오던 곳이지만, 황금시장이 김천장의 명맥을 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인들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황금시장 뒤편의 경부선 굴다리까지 김천장의 난전이 들어섰고, 국밥도 많이 팔았지요.”

손씨가 기억하는 황금시장의 전성기는 1960~70년대다. 일제강점기 당시 김천장에서 모암동이나 평화동으로 밀려났던 상인들이 다시 황금시장으로 몰려들어 시장은 장날마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분주했다. 특히 황금시장은 고추와 마늘의 유통으로 명성을 떨쳤다. 현재도 고추와 마늘로 유명하지만 전성기 때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한다.

김천시 평화동의 평화시장도 규모가 있지만 김천장의 전통과는 거리가 있다. 평화시장은 광복 직후 각처에서 모여든 귀향 동포와 월남 동포들이 김천역 일대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시장이기 때문이다.

40여 년 전의 황금시장은 전국에서 고추와 마늘을 구입하기 위해 모인 상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김천의 고추·마늘의 생산량은 많지 않았지만 전국의 고추와 마늘이 황금시장으로 집결했기에 문제될 것이 없었다. 전국각지에서 쏟아지는 주문량을 메꾸기 위해 황금시장 상인들은 전라·충청·경상도 지역을 고루 다니며 고추를 사들였다. 이는 60~70년대의 열악한 교통망에 기인한다. 당시만 해도 차량의 수가 적고 도로사정이 원활하지 않아 산지에서 소비처로 농산물을 공급하는 일이 적었다. 황금시장의 도매상들이 전국 각지의 고추를 사들인 뒤 다시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덕분에 황금시장에 오면 전국 각지의 고추를 종류별로 구입할 수 있었다. 냉동창고 시설은 없었지만 고추의 경우 1년 정도는 보관이 가능했다. 덕분에 출하량 조절이 가능했고 상인들도 고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장날이 되면 서울·부산·대구 등지에서 고추를 구입하러 온 트럭 행렬이 이어졌다. 상회 한 곳에서 8t 트럭 3대분의 고추를 한꺼번에 파는 일쯤은 다반사였다. 전후 황금시장은 농산물 유통의 중심으로 거듭났고, 김천장의 명성을 다시 한 번 재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황금시장에는 김천우시장의 명성을 추억하듯 지금도 국밥집이 많다. 소의 내장과 껍질을 정성껏 장만해 파는 식당이 골목골목에 자리 잡고 있다. 76년 김천으로 시집온 김은희씨(62)는 “한때는 황금시장의 국밥집만 15군데에 이르렀지만 지금은 그 수가 10곳 미만으로 줄었다”며 아쉬워했다.

황금시장은 메주도로 꽤 유명하다. 수십년 전부터 김천 농소면 일대의 농민들이 겨울철 부업 격으로 메주를 만들어 팔았다. 아직도 장 담그는 철이 되면 메주를 구입할 수 있다. 몇 남지는 않았지만 황금시장의 건어물 상회 역시 감천을 거슬러 올라왔던 어물전 상인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글=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김천=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사진=손동욱 기자 dingdong@yeongnam.com
도움말=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참고문헌=김천시사
공동기획: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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