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의 寶庫 김천을 이야기하다 .25 ] 배흥립 삼대삼강정려각

  • 임훈 박현주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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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0-23   |  발행일 2014-10-23 제11면   |  수정 2014-11-21
이순신 장군 휘하서 종횡무진… ‘불멸의 신화’ 를 함께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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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조마면 신안3리에 위치한 배흥립 삼대삼강정려각은 한 가문의 3대가 받은 정려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2대가 정려를 받아 정려각을 세우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3대가 정려를 받는 것은 매우 희귀한 사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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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조마면 대항산에는 3대에 걸쳐 정려가 내린 삼강세가(三綱世家)의 중심인물인 배흥립의 묘소가 있다. 매년 후손들이 이곳을 찾아 묘사를 지내고 있다. <김천문화원 제공>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통치이념에 따라 충(忠)·효(孝)·열(烈)을 유난히 강조한 시기였다. 조정에서는 충신·효자·열녀가 살던 마을에 정려문(旌閭門)을 세우고 현판을 하사해 표창했다. 정려는 해당 가문의 영광으로, 지역사회에서는 본받아야 할 사례로 기억됐다.

그런데 한 명이 아닌 3대 3명이 정려를 받은 사례가 있다. 김천시 조마면 신안3리에는 성산배씨 가문 3대가 받은 정려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배흥립 삼대삼강정려각’이 있다. 2대에 걸쳐 정려를 받는 일은 종종 있어왔지만, 3대가 정려를 받은 것은 매우 희귀한 사례다. 남편을 따라 죽음을 택한 열녀 경주김씨, 임진왜란에서 전공을 세운 경주김씨의 아들 배흥립, 병자호란 때 끝까지 적과 맞서 싸운 배흥립의 손자 배명순이 그 주인공이다. ‘스토리의 寶庫 김천을 이야기하다’ 25편은 3대의 충·효·열이 깃든 배흥립 삼대삼강정려각에 관한 이야기다.

충무공 명령으로 판옥선 건조
왜 수군 격파 혁혁한 공 세워
영흥부사 재직 중 병사하자
선조 ‘효숙’이란 시호 하사

충·효·열이 남달랐던 가문
母·孫子… 3代에 정려 내려져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던 무장

임진왜란은 왜적의 칼날에 맞서 조선의 강토를 지켜낸 전란이다. 이순신, 권율 등 불세출의 영웅이 등장해 풍전등화에 처한 조선의 운명을 되돌렸다. 하지만 일개 사졸을 포함, 장수를 보좌하는 무관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영웅들의 빛나는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김천시 조마면 출신의 배흥립(裵興立, 1546~1608) 또한 임진왜란에 참전해 승리에 힘을 보탰다. 전군을 좌지우지할 높은 벼슬은 아니었지만 임진왜란의 주요 전투에 참가해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흥양현감 재임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명령으로 판옥선을 건조하는 등 조선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기반을 마련했다.

배흥립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영민하여 마을 사람들조차 그에게 거는 기대가 남달랐다. 배흥립이 태어난 날 그의 할머니 한양조씨는 범상치 않은 꿈을 꾸었다. 마당에 병영에서나 볼 수 있는 대장기가 펄럭이고 있는 꿈을 꾸었던 것. 조씨는 “훗날 무관으로 이름을 알리게 될 아이임이 분명하다”며 어린 손자에게 남다른 사랑과 관심을 주었다.

할머니의 꿈처럼 배흥립은 어려서부터 문무에 소질을 보였다. 배흥립은 외조부인 북일 김익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7~8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경서(經書)와 병서(兵書)를 두루 섭렵해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배흥립은 “장부가 세상에 나서 어찌 문무를 따지겠느냐”고 말하며 몸과 마음의 수련에 주력했고, 결국 1572년 무과별시에 급제해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어머니의 병환소식이 배흥립에게 전해진 것이다. 배흥립은 그 길로 어머니를 찾아가 극진한 간병에 나섰다. 매일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어머니와 함께 잠을 자며 병간호에 힘쓴 끝에 어머니를 낫게 할 수 있었다.

이후 배흥립은 북방의 변경으로 떠났고,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1583년 여진족 니탕개가 침입했을때 전투에 참여해 적을 제압하는 데 한몫했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무관으로서 배흥립의 능력을 보여준 전란이었다. 주장을 도와 적을 물리치는 조방장으로 참전한 배흥립은 권율,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여러전투에 참여했다. 행주·당포·옥포·견내량·김산·진도·칠천량전투에서 늘 최전선에 나서는 용맹함을 보였다. 특히 해전에서는 왜군이 쏜 조총탄에 투구가 깨지는 상황 속에서도 분전하여 조선수군에 힘을 보탰다. 지위를 막론하고 늘 최선을 다하는 무장이었기에 이순신의 신임도 얻었다. 1607년 영흥부사로 재직 중 병을 얻은 배흥립이 1608년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효숙(孝肅)’이란 시호를 그에게 내렸다.

배흥립의 손자 배명순(裵命純, 1597~1637) 또한 충효가 남달랐던 가문의 내력 덕분인지 전형적인 무인의 기질을 지녔다. 1624년 무과에 급제한 배명순은 정묘호란 때 어가를 호위했다. 병자호란 때에는 청나라 군대와 끝까지 전투를 벌였으나, 무리하게 전투를 지휘한 주장의 명을 수행하다 안타깝게도 전사하고 말았다. 훗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미망인 세상을 버리다

조선시대의 명문가 여성에게 평생토록 지아비를 섬겨야하는 ‘일부종사(一夫從事)’는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이었다. 현재의 기준으로 바라본다면 몰인정하며 반인권적인 사례로 비치겠지만, 지아비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부인이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떠나는 일은 가문의 영광으로 간주됐다.

차마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부분의 경우는 대를 이을 어린 자녀의 양육 때문이었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란 의미로, 남편을 따라 죽지 않은 과부를 지칭하는 ‘미망인(未亡人)’이라는 단어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남성우위의 전통사회에서는 여성에 대한 무언의 압력이 늘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삼종지의(三從之義)’가 있다. 어릴때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을 가면 지아비를 따르고,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을 따르는 것이 여인의 운명이었다.

황주목사 김익의 딸인 배흥립의 어머니 경주김씨 역시 명문가 출신이었기에 늘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 경주김씨는 늘 자녀들에게 “여자는 남편 따르기가 으뜸이고, 남자는 임금 따르기가 으뜸”이라고 가르치던 엄한 어머니이자 아내였다.

“너희는 충의롭게 살거라….”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3년상을 치른 뒤 배흥립의 어머니 경주김씨는 갑작스레 곡기를 끊었다. 남편을 따라 죽기로 작정한 것이다. 아들 배흥립과 가족이 한사코 어머니를 말렸지만, 이미 경주김씨는 마음을 굳힌 뒤였다. 결국 경주김씨는 1617년 세상을 떠나고 만다.

효성이 지극했던 배흥립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지극정성으로 효를 실천하려 했지만 어머니의 뜻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배흥립은 “나는 녹봉이면 충분하다”며 자신이 물려받은 재산 전부를 아우에게 주었다고 전해진다.

후손에 따르면 현재의 배흥립 삼대삼강정려각은 효종대에 정려를 받아 철종 때 세운 것이다. 6·25전쟁 때 정려각을 마을 뒤편으로 잠시 옮겼다가, 1980년대에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정려각의 일부는 보수를 했지만 상당부분이 철종대의 것 그대로 구성되어 있다. 흔치 않은 3대 정려각임에도 외관은 일반 정려각과 다르지 않다. 정려각 곳곳에는 세월의 때가 묻은 데다 주변에는 잡초까지 무성하지만, 정려각 내부에 걸린 3개의 현판은 열부·충신을 여럿 배출한 가문의 내력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배흥립의 후손들은 배흥립 삼대삼강정려각이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것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배흥립의 후손인 김천시 조마면 신안3리 이장 배기화씨(70)는 “몇 년 전 문화재 관련 조사가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문화재로 지정받지는 못했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배씨는 “돌계단을 조성해 옛 모습을 잃었다는 이유로 (정려각이) 문화재에 등재되지 못했지만, 문중에서 열심히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김천=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도움말=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배기화 김천시 조마면 신안3리 이장(배흥립 후손)
 ▨참고문헌=김천시사, 송기동 저‘김천의 마을과 전설’
공동기획: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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