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세 베트남 유학생, 전생에 만난 듯 북한 비료공장 여직원에게 빠져들다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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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2-19   |  발행일 2014-12-19 제34면   |  수정 2014-12-19
■ 越男北女 31년간의 러브레터
20141219
팜녹칸씨가 1971년 흥남비료공장에서 영희씨와 처음 만났던 순간의 느낌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20141219

“영희 동무 집에 놀러가도 됩니까”
베트남 청년 칸이 당차게 물었다
국경 초월한 사랑의 시작이었다
북한서 꿈같은 시간을 보낸 칸은
전쟁 중인 베트남으로 돌아갔다
편지를 조심스럽게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나갔다
5년간의 이별후 북서 짧은 만남
“당신을 끝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다시 기약없는 긴 이별
그 사이 칸의 편지는 쌓여만 갔다



“안녕하십니까.”

그는 그녀의 얼굴도 제대로 못 본 채 모기처럼 기어드는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본체만체하며 지나가버렸다.

그날 영희는 작업조장으로부터 “베트남 유학생이 우리 공장으로 실습을 왔으니 쓸데없는 잡담은 하지 말고 친절하게 대해주라”는 지침을 받았다. 하루는 분석실에서 일하던 동료가 “너랑 꼭 닮은 베트콩 1명이 우리 공장에 실습하러 왔던데 보았니?”라고 했지만 영희는 피식 웃기만 했다.

“여기가 분석실 맞습니까.”

칸은 동료의 눈을 피해 리영희의 동선을 살핀 다음 분석실로 무작정 문을 열었다. 마침 분석실엔 둘밖에 없었다.

“예, 그렇습네다. 그런데 누구심까. 이곳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

“혹시 리영희 조장 아닙니까. 전 베트남 유학생 팜녹 칸이라고 합니다. 궁금한 게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불쑥 찾아왔습니다.”

순간 영희는 ‘이 남자가 바로 나랑 닮았다는 그 유학생일 것’이란 직감이 들었다. 갑자기 심장이 멎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말을 더듬었다.

“아, 네네네. 무엇이 궁금합네까.”

“분석실에서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2층에 있는 비행기만 한 압축기는 북한에서 직접 만든 겁니까.”

“아, 분석실에선 비료의 원료인 시료를 채취해 화학성분을 분석하는 일을 하고 압축기는 화란산입네다.”

칸은 짐짓 업무에 관한 것만 질문했다. 칸은 묻고 영희는 대답했다. 5분간의 짧은 만남이었다. 칸은 더 이상 쓸데없는 주제로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영희에게 종이쪽지를 건넸다.

“영희 동무 집에 놀러가도 됩니까. 주소를 적어주십시오.”

영희는 무엇에 감전된 것처럼 종이에 주소를 적어주었다. 그날 밤 영희는 잘 생긴 베트남 유학생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사랑의 싹을 키우다

영희는 칸이 집을 찾아오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날은 마침 비번이었다. 영희는 당황하는 어머니와 동생에게 칸을 소개했다. 어머니는 의사였다. 영희의 아버지는 북한의 대학에서 토목을 전공한 엘리트였다. 아버지는 6·25전쟁 중 1·4후퇴 때 형제 3명과 흥남부두에서 퇴각하는 남한 군인을 따라 남으로 가는 군함을 탔다. 영희가 3세 때였다. 어머니는 당시 출산을 바로 앞둔 만삭이라 함께 갈 수 없었다. 전쟁이 혈육을 이렇게 평생을 갈라놓으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영희는 아버지가 월남한 줄 모르고 자랐다. 수재로 소문났던 영희가 출신성분 때문에 의대에 진학을 할 수 없다는 걸 안 시기는 대학입학을 앞두고서였다.

어머니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남편이 다시 찾아온 것처럼 살갑게 칸을 맞이했다. 여자 세 명만 살던 단칸집에 남자가 오니 집안에 생기가 돌았다. 영희는 칸을 위해 따뜻한 밥을 지었다. 칸은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면서 배식구 틈을 통해 영희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도 사랑스러웠다. 칸과 영희, 어머니와 동생은 아랫목에 앉아 식사를 하며 늦게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칸은 영희가 쉬는 날만 되면 영희의 집을 찾았다. 칸의 비료공장 수습기간은 그렇게 후딱 지나갔다. 칸은 다시 복학했다. 영희는 상사병에 걸려 밥맛을 잃었다.

“영희야, 이제 밥 먹어라. 칸한테 편지가 왔다.”

언니가 칸 때문에 입맛을 잃은 걸 눈치 챈 동생이 말했다. 헤어진 뒤 한달 만이었다.

‘친애하는 영희 동무’라고 시작한 편지 안에는 향수가 가득한 중국산 하얀 손수건이 들어있었다. 복학 이후에도 칸은 시계바늘처럼 정확하게 3주에 한번은 꼭 영희의 집을 찾았다. 함흥에서 3시간이나 걸려 버스를 타고 흥남으로 왔지만 칸은 피곤하지 않았다. 둘은 마전해수욕장을 비롯해 함흥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랑의 역사를 썼다. 그렇게 1년6개월간 함흥에서 꿈 같은 시절을 보내며 사랑의 꽃을 피웠다.

◆그리고 이별

헤어질 때가 점점 다가왔다. 칸은 전쟁 중인 베트남으로 가야했다. 칸이 귀국하기 전 마지막으로 영희의 집을 찾았다.

“영희 동무, 살아있으면 내가 반드시 데리러 올 테니 기다려주십시오.”

“칸 동무, 살아있으라요. 영희는 당신 말을 믿갔습네다.”

1972년 겨울 칸은 베트남으로 귀국했다. 영희는 칸에게 코바늘로 짠 둥근 식탁보를 선물했다. 칸이 귀국한 뒤 영희는 한 달간 식음을 전폐하고 몸져누웠다. 직장에도 나가지 못했다. 어머니가 죽을 쑤어주면서 울면서 말했다.

“네 아버지랑 나밖에는 그럴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어미 팔자를 닮은 너를 보니 눈물밖에 나지 않는구나. 사랑한다고 다 결혼하는 건 아니니 마음 다잡아라.”

한 달 뒤 베트남에서 편지가 왔다. 발신은 ‘옥경(玉景)’으로 돼 있었으며 수신인은 어머니였다. 편지에는 ‘영희를 보고 싶다’ ‘다시 만나자’와 같은 내용은 없었다. 베트남과 북한에서 국제편지를 검열할 것이란 추측에 그저 날씨나 신변잡기에 관한 건조한 이야기뿐이었다. 칸이 발신인을 ‘옥경이’로 해서 어머니 앞으로 보낸 건 당국으로부터 의심을 살 만한 꼬투리를 피하고 싶어서였다. 편지를 자주 보내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칸의 편지는 1년에 서너 번밖에 오지 않았으며, 답장은 두 번에 한번 꼴로 했다. 둘은 조심스레 편지로나마 사랑을 키워갔다.

칸은 베트남에 귀국해서 결혼을 하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외교관 출신으로 정부의 고위관료였다. 좋은 가문에 미남인데다 똑똑한 그를 따르는 여성이 많았으나 칸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영희도 마찬가지였다. 혼기가 찼으나 칸 같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날 수 없었다.

◆재회

1978년 1월, 칸은 3개월 일정으로 베트남정부농업담당 관료의 일원이 돼 다시 북한을 찾았다. 5년 만이었다. 칸은 입국 전 편지를 써 함흥국제호텔 앞에서 정오에 영희와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편지가 하루 뒤 영희의 집에 도착하는 바람에 칸은 하루 종일 호텔방에 서서 우두커니 창밖만 바라보며 영희를 기다렸다.

‘아, 그녀가 나를 버린 것인가.’

칸은 회한으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칸의 편지를 본 영희가 부리나케 호텔로 달려갔다. 그날따라 눈이 그렇게도 많이 왔다. 영희는 칼 같은 추위와 바람을 참으며 호텔 앞에서 무작정 칸을 기다렸다. 칸은 일을 마치고 호텔로 들어오다 차창 밖에서 영희와 눈길을 마주쳤다. 불꽃이 일었다. 칸은 동료를 보내고 호텔에 들어갔다 다시 나와 영희와 재회했다. 하지만 주위의 눈을 피해야 했다. 마치 스파이가 접선하는 것처럼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칸이 앞서가고 영희가 뒤따랐다. 그래도 좋았다. 그렇게 함흥 시내를 한 바퀴나 돌았다.

짧고도 긴 만남이었지만 둘의 사랑은 세상 어느 것보다 뜨거웠다.

“영희 동무, 사랑엔 국경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번에 김일성 위원장께 결혼할 수 있게 해 달라는 편지를 갖고 왔습니다. 아마 잘될 겁니다.”

“영희가 결혼을 못 하고 할머니가 돼도 혼자 살아야 함까. 서로의 상처가 너무 크잖슴까.”

“아니에요, 영희 동무. 당신이 할머니가 돼도 내 영혼입니다.”

“그래도 주석님께 그 편지는 전하지 마십시오. 영희가 당신을 끝까지 기다리겠슴다.”

둘은 함흥 시내 호젓한 곳에서 뜨겁게 포옹을 했다. 사랑의 열기로 쌓였던 눈이 녹았다.

◆또다시 10년간 이별

칸은 이틀 뒤 다시 베트남으로 갔다. 영희는 30세가 넘었다. 베트남과 북한은 같은 사회주의 국가라서 국제결혼이 엄격히 금지돼 있었다. 더욱이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전쟁으로 북한과 베트남의 외교관계는 악화됐다. 그해 12월에는 상호간 대사를 소환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칸의 편지는 눈송이처럼 차곡차곡 쌓여갔다. 하지만 그녀는 10년간 의도적으로 칸에게 답장을 하지 않았다. 칸의 편지도 뜸해지더니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1986년 베트남 공산당 비서의 딸이 소련에 유학을 가서 소련인과 결혼을 했다는 소식이 잠깐 전해졌다. 하지만 영희와 칸에겐 언감생심 남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영희와 칸의 편지를 큰 가방에 보관하고 있었다. 35세가 되던 해 하루는 어머니가 영희를 불렀다.

“영희야, 옥경이의 편지를 불에 태웠다. 너무 서러워하지 마라. 사랑엔 국경이 없다지만 어미로서 너를 이렇게 버려둘 순 없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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