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대가 지나고 중년이 되어서야 하노이에서 마침내 결혼식을 올리다

  • 박진관
  • |
  • 입력 2014-12-19   |  발행일 2014-12-19 제35면   |  수정 2014-12-19
20141219
인터뷰를 마친 팜녹 칸씨가 아내를 오토바이에 태워 귀가하고 있다. 하노이의 어두운 밤길을 헤쳐나가는 부부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딸을 끌어안았다. 영희도 결혼이란 걸 단념한 상태였다. 하지만 북한에서 노처녀로 살기란 너무 힘이 들었다. 가끔 맘에 드는 혼처가 있긴 했지만 아이가 딸린 홀아비이거나 출신성분이 그녀와 달랐다.

그날 밤 영희의 꿈속에 칸이 나타났다. 서로 손을 잡고 꽃밭을 거닐다 나비가 나타났다. 영희가 나비를 잡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나비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다시 나비가 나타나자 나비를 잡으러 숲속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나비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같이 놀던 칸마저 보이지 않았다. 영희가 칸을 부르면서 벌떡 일어났다. 땀으로 옷이 흠뻑 젖었다. 영희는 잠을 자고 있는 어머니와 동생 몰래 그리움에 사무쳐 눈이 퉁퉁 붓도록 흐느꼈다.

칸은 영희와의 만남을 지속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화학공장에서 일을 하다 정부산하 체육국으로 직장을 옮겨 사이클 관련 업무를 맡았다. 칸이 전공을 살려 이전 직장에 계속 다녔다면 고위직에 올랐을 것이다. 회사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그는 오로지 영희를 다시 만나기 위해 전공과는 상관없는 체육국을 선택했다. 체육국에 있으면 외국과의 교류를 위해 북한에 갈 수 있는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는 베트남·북한친선교류회를 만들어 북한과 교류를 활성화하고자 했다. 칸의 어머니는 칸이 외국여성에 빠져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을 몹시 걱정했다. 아버지 역시 처음엔 한때의 불장난이려니 생각했지만 칸의 집념을 꺾을 수 없었다. 칸은 연애 말고는 한번도 부모를 실망시킨 적이 없는 착한 아이였다.

둘의 30대는 속절없이 지나가버렸다.

능력 인정받은 직장도 옮기며
칸은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세월은 흘러 둘은 50대가 됐다
2002년 5월
베트남 주석 방북 소식을 듣고
칸은 마지막 기회로 생각하며
외교부장관에게 청원서를 냈다
그리고 꿈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팜녹 칸 54세, 리영희 55세였다

◆고난과 시련

영희의 마음속에 칸이 다시 등장한 건 1992년이 밝아오던 때였다. TV에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낸 전 세계의 축전과 선물을 소개하던 도중 칸이 베트남산 범뼈(호랑이연고)를 김 주석에게 보낸 것이 화제가 돼 칸이 북한TV에 등장한 것이다. 영희는 칸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직감을 받았다. 칸의 편지가 다시 왔다. 편지엔 ‘정식으로 베트남 외교부를 통해 북한 정부에 결혼을 허가해 달라는 요청을 할테니 기다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당국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더욱이 그해는 베트남과 한국이 수교하던 때여서 북한은 베트남과 관련한 모든 정보를 통제했다. 둘은 94년까지 편지로 내왕했다. 그러나 재회의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영희는 50줄에 들어섰다. 다시 편지가 끊겼다. 김 주석이 사망하고 북한은 김정일 위원장 체제가 들어섰다. ‘고난의 행군’도 이즈음 시작됐다. 경제적 궁핍으로 아사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영희의 집도 끼니를 때우는 게 가장 급선무였다. 그러던 차에 어머니가 병을 얻어 먼저 세상을 떴다. 어머니는 평생을 수절한 채 남편과 딸의 연인을 기다리며 통일의 그날을 꿈꾸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 영희는 어머니가 저승길에 입고 갈 수의도 마련할 형편이 안 됐다. 설상가상으로 동생마저 시름시름 앓아누웠다. 동생은 영희보다 키가 한 뼘이나 큰 건강한 몸을 타고났는데 중병에 걸려 결국 사망했다.

영희는 천애고아가 됐다. 세상의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불면의 밤이 계속됐다. 가족도 사랑도 잃어버린 가운데 한 조각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떠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는 것도 사치였다. 영희는 더 이상 지금의 집에서 살 수 없어 이사를 했다. 칸의 소식도 이제 받을 수 없었다.

1997년 칸은 북한을 방문하는 베트남 외교부 장관에게 영희의 소식을 알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 북한에 같이 유학을 간 친구가 외교부의 고위간부였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들은 소식은 영희가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해 잘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칸은 실의에 빠졌다. 하지만 결코 그럴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이후 칸은 베트남주재 북한의 태권도 코치 통역을 하며 영희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칸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그는 출세를 포기했지만 사랑은 끝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편지도 오지 않았다.

2001년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북한을 방문했던 지인이 영희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10년 전에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칸은 죽고 싶었다. 음식도 먹을 수 없었고, 헛것이 보였다. 하지만 칸은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10년 전이라면 편지를 왕래하던 때였는데 어찌 사망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지인은 영희의 동생이 죽은 것을 영희가 사망했다고 잘못 전달한 것이었다.

◆하늘도 감동한 사랑의 결실

2002년은 칸에게 잊을 수 없는 해다. 그해 5월, 쩐득르엉 베트남 국가주석이 북한과의 우호협력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쩐득르엉 주석은 칸의 형 친구이기도 했으며 같이 방북하는 외교부 장관 역시 아버지와 막역한 사이였다.

칸은 이번이 영희와 해후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 외교부 장관께 청원서를 냈다. 그해 6월, 칸은 베트남 국가대표를 이끌고 한국의 고양시에 사이클 전지훈련을 갔다. 한국에 도착한 칸은 이튿날 밤, 잠을 자다 지난해 사망한 어머니가 꿈에 나타났다. 어머니는 “어서 베트남으로 가보라”고 하면서 칸의 등을 떠밀었다. 칸은 오전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그 다음날 베트남으로 혼자 출국했다. 베트남에 가니 외교부 장관 명의의 편지가 왔다.

‘두 사람과의 관계는 인도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북한의 외무성 장관과 만나 두 사람간 사랑의 결실이 맺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귀하의 요청이 북한의 외무성에 잘 전달돼 결혼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칸은 뛸 듯이 기뻤다.

한편 비슷한 시기, 영희는 평양에 있는 당 상임위원회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영희 동무를 기다리고 있는 베트남 사람이 있다. 그는 지금까지 조국과 베트남의 우호관계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이다. 동무는 조국에 사는 것보다 그와 함께 행복하게 베트남에 사는 것이 조국에 보탬이 되겠다’는 내용의 전갈이었다.

영희의 뺨엔 닭똥 같은 눈물만 주르륵 주르륵 흘러내렸다.

칸은 그해 10월1일 평양에 가서 영희와 재회했다. 처음 만난 뒤 31년 만에 국경과 체제를 뛰어넘어 사랑의 결실을 본 것이다.

2002년 12월31일, 칸과 영희는 베트남에 있는 국립하노이체육관에서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영희는 55세, 칸은 54세였다. 결혼식엔 북한의 외교부 직원이 참석했다. 남한에서 살던 영희씨의 사촌형제자매도 왔다. 하객은 둘의 결혼식을 진정으로 축하했다.

그날 웨딩드레스 대신 비로드한복을 입은 영희와 중후한 중년신사가 된 칸은 손을 맞잡았다. 둘은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고 굳은 약속을 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