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25] 권정호 작가와 전수천 작가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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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2-24   |  발행일 2015-02-24 제23면   |  수정 2015-03-25
“우리는 파이오니아” 유학생활 의기투합 美서 개척하듯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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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수성아트피아 앞마당에서 포즈를 취한 30년지기 권정호 작가(왼쪽)와 전수천 작가. 수성아트피아는 4년전 이들이 강익중 작가와 함께 3인전을 열었던 곳이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1980년대 초만 해도 해외 유학이란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여러 가지 여건상 유학을 떠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어렵사리 유학을 떠나 도착한 이국땅에서 생면부지의 사람과 함께 공부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녹록지 않은 여정이었다.

대구를 중심으로 전국적 활동을 보이는 권정호 작가(70·전 대구대 미술대학 교수)는 1983년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대구대 교수였던 그는 미술에 대한 좀 더 깊이있는 공부를 하기 위해 세계적인 미술대학인 프랫 인스티튜트 대학원에 입학한 것이다. 당시 뉴욕은 새로운 실험적 시도를 끊임없이 보여줌으로써 세계 미술의 흐름을 주도하던 도시였다. 이런 도시에서 미술 공부를 하고 싶다는 열정만으로 떠난 유학생활은 떠날 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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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배려-인간미에 매료
美서 인연 30년간 이어와
    
귀국후 활동무대 다르지만
대구-전북 전시 기회 제공
   

그 당시만 해도 한국 유학생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에 학교 생활은 물론 일상 생활에서도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당시 그 대학원에 10명 정도의 한국 학생이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한국에서 작품활동을 해오던 작가였지요. 모두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한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 이도 있어 이름은 들어본 이도 있었지요. 전수천 작가도 이름만 듣고 있다가 미국에서 처음 만난 작가였습니다.”

전수천 작가(67·전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역시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한 뒤 한국에서 창작활동을 하다가 미국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사실 저는 미국에 공부를 위해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뉴욕의 한 갤러리에서 초대전을 부탁해왔는데 뉴욕에서 전시를 하고 보니 계속 그곳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지요. 뉴욕에 머물러 작품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학교에 다니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프랫 인스티튜트 대학원에 입학을 했는데 거기서 권 작가를 만났습니다.”

먼 이국땅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나서 느끼는 기쁨이나 정은 대충 짐작이 갔다. 3년이라는 나이 차이는 있지만 이들은 금세 친해졌다. 전 작가는 권 작가와 좋은 친구 사이로 발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권 작가의 친절, 배려심을 들었다. 당시 전 작가는 뉴욕을 중심으로 작품활동을 활발히 했는데 전시 등을 할 때 자신이 하는 일을 권 작가가 진심어린 마음으로 도와줬다는 것이다.

“권 작가는 유학길에 부인이 동행했기 때문에 사모님 덕을 많이 봤지요. 당시 같이 어울려다니는 친구가 꽤 있었는데 권 작가처럼 아내가 따라온 경우는 별로 없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염치없게 신세를 참 많이졌습니다.”

권 작가는 전 작가의 이 말에 손사래를 치면서 전 작가가 세계 미술의 중심도시인 뉴욕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뉴욕미술계의 주목을 받는 것이 같은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러웠다는 말을 했다. 이 말 끝에 권 작가는 전 작가와 특히 친해지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1984년쯤입니다. 전 작가가 뉴욕의 한 공원에서 퍼포먼스를 하는데 제가 도와준 기억이 납니다. 그 전에도 알기는 했지만 이때 전 작가를 도와주면서 그의 작가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보고 인간성이 좋은 친구라는 생각을 넘어서 같은 작가로서 깊은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 감정은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존경으로까지 번져갔지요.”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전 작가를 바라보는 권 작가는 애정이 넘쳐났다. 그만큼 전 작가의 작가로서의 면모가 뛰어나다는 설명이다.

인터뷰 중간중간 권 작가는 “전 작가를 나와 같은 작가하고 비교하면 안된다”며 나이는 자신보다 적지만 작품으로는 세계적인 작가라 할 만큼 좋은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전 작가를 좋아한다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지만 전 작가를 이렇게 높이 평가하는 데서 권 작가의 친구에 대한 애정이나 존경이 얼마나 큰지를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실제 전 작가의 경우 1990년대 한국을 세계 미술시장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95년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전 작가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우수상에 해당되는 특별상을 받았다. 이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세계 미술시장에 알리는 것은 물론 비엔날레에 거의 무지하다시피 했던 한국 미술계를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다. 그는 2005년 미국 동부에서 서부까지 기차로 횡단하는 프로젝트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는 전 작가가 13년에 걸쳐 구상한 야심작으로, 흰 천으로 감싼 열차를 타고 장장 5천500㎞를 7박8일간 달리는 거대한 기획이었다.

전 작가는 이런 자신의 작업에 대해 스스로 ‘집요하다’고 말하는데, 권 작가는 이런 전 작가의 집요하리만큼 작품활동을 열정적으로 하는 모습에 매료됐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은 순간에 머물지 않고 30여년간 이어져왔다.

물론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두 사람만이 단짝처럼 지낸 것은 아니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백남준이 이미 유명작가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백남준을 비롯해 변종곤 김차섭 김구림 등 한국을 대표하는 많은 작가와 어울리며 그룹전 등도 했다. 이런 활동 속에서 두 사람의 친분은 점점 두터워졌다.

3년이라는 기간 동안 두 사람은 미국에서 많은 활동을 펼쳤고 이를 통해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서로 창작활동의 도움도 주고받았다.

전 작가는 당시의 사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 두 사람은 40대 초중반이었습니다. 작품에 대한 열정이 넘칠 때였지요. 이런 때 이국땅에서 작품에 대해 밤새도록 토론하면서 같이 어울려다니고 작업하는 것은 저는 물론 권 작가에게도 잊을 수 없는 좋은 추억이었을 것입니다. 경제적, 환경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이처럼 작가로서 가장 혈기 왕성하다고 할 좋은 시기를 같이 보냈다는 것 자체가 큰 인연이지요.”

1986년 권 작가가 귀국함으로써 이들의 만남은 다소 소원해졌다. 서로 활동하는 지역이 달라졌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두 사람은 기회만 되면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귀국할 때 전 작가의 소개로 일본에서 개인전을 열고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친구가 귀국하는 것에 대한 축하의 의미였겠지요.”

2004년에는 권 작가의 소개로 전 작가가 대구 갤러리M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대구에서 연 그의 첫 개인전이었다. 이에 앞서 전 작가가 귀국한 95년에는 권 작가가 주축이 돼 결성한 아뜨 신테(Art Synthe)의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대구에 뿌리를 둔 미술모임에 전 작가가 참여한 것도 모두 권 작가와의 친분 때문이었다.

2011년에도 역시 권 작가가 연결고리가 돼 대구 수성아트피아에서 열린 3인전에 참여했다. 권 작가와 전 작가에다 같은 프랫 인스티튜트를 졸업하고 현재 세계 무대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 강익중 작가가 참여한 대형전시였다.

오는 7월 권 작가는 전북 완주 오스갤러리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 예정인데, 이 전시는 전 작가가 연결시켜줬다. 전북은 전 작가의 고향이다. 전북을 대표하는 대형갤러리에 자신의 절친한 친구를 소개시켜준 것이다. 이것 역시 단순히 친하다는 의미를 넘어서 권 작가의 작품이 그런 좋은 갤러리에 초대받을 만하다는 신뢰와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권 작가와의 인연 때문에 지방 중에는 대구를 제일 자주 찾습니다. 대구에 오면 늘 반기는 사람이 있으니 오고 싶은 게 당연하겠지요.”

전 작가는 대구에 대해 활력이 넘치고 좋은 작가가 많은 도시라는 말도 했다. 권 작가와 같은 뛰어난 역량의 작가가 많은 데다 인간성이 좋은 작가가 넘쳐서 재미있고 매력적인 도시라는 것이다.

인터뷰 말미에 두 사람은 이처럼 오랜 기간 인연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우리가 개척자이기 때문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이런 측면에서 스스로를 ‘파이오니아’라고 했는데, 이런 개척정신이 두 사람 사이를 더욱 끈끈하게 해줬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이들은 또 다른 공통점을 느끼며 역시 비켜갈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다는 말도 했다.

“한때는 진짜 열심히 작업하고 대외적인 활동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은둔자처럼 살려고 합니다. 드러나지 않고 작업에만 충실하려는 것입니다. 이젠 후배들에게 우리의 자리를 넘겨줘야겠지요. 이게 시대의 흐름이니까요.”

이 ‘인연’ 시리즈의 인터뷰를 제안했을 때 두 사람 모두 “젊고 왕성히 활동하는 작가가 많은데 이런 늙은이들 취재해서 뭐하려고. 우리는 은둔자처럼 살고 있는데”라며 몇 차례 거절했던 마음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됐다. 그들은 떠날 때와 머물 자리를 아는 멋진 은둔자였다.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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