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부터 39년 역술인생 죽평 이경묵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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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4-24   |  발행일 2015-04-24 제33면   |  수정 2015-04-24
“4대를 이어온 家業 역술인은 엉덩이가 천근만근은 되어야 이 바닥에서 이름을 얻을 수 있다”
20150424
39년 경력의 역술인 죽평 이경묵씨가 자사호에 이어 요즘은 은다구에 심취해 있다. 역술을 축으로 중국차·자사호·문인화와 서예, 수석·스킨스쿠버까지 섭렵하고 있지만 결국 역술 때문에 관심 영역이 부채살처럼 벌어졌다. 몇년 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자신이 만든 700여점의 자사호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까마득히 오랜 세월 전. 창세기도 생겨나기 훨씬 전, 자전과 공전도 생기기 전, 생명이란 것도 생기기 전. 그때도 과연 ‘운세’라는 게 있었을까?

나는 올해 54세의 역술인. 39년째 역술과 동고동락하고 있다. 사람이 태어난 때를 알면 그가 걸어갈 날의 청사진을 추론할 수 있는 조그마한 역량을 갖게 됐다.

역술인? 이것도 하나의 직업이 될 수 있을까? 난 직업이 안 되었으면 싶은데 세상은 역술을 ‘특수직군’에 올려놓았다. 타인의 운명을 봐준다는 것. 참으로 비애스럽고 한편으로는 처절한 일이다.

역술만 붙들고 종일 한 자리에 앉아 있는다는 게 얼마나 천형 같은가. 역술인은 제 엉덩이가 천근만근은 되어야 이 바닥에서 이름을 얻게 된다. 한두 해야 취미로 할지 모르겠지만 수십 년 한 길을 간다는 건 언감생심. 가끔 역술이 난감하고 무료해질 때가 있다.

역술이 덜 무료해지라고 차(茶)를 가까이 했다. 특히 보이차가 내 마음을 순하게 발효시켰다. 그게 인연이 되어 종로 거리에 차인과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찻집(죽평 다관)을 열게 됐다. 차를 알고 나니 다구(茶具)에 대해 알고 싶었다. 재료가 없어 국내에선 만들기 어려운 중국 다관의 대명사로 불리는 ‘자사호’를 직접 제작해 개인전까지 열었다.

역술 다음으로 나와 오래 동반자가 된 건 스킨스쿠버. 30년 이상 1만5천여 회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심심한 손 곁에 서예와 문인화를 얹어 주었다. ‘팔색조 역술인’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하나 신통한 게 없다. 고수에 견주면 볼품이 없다. 그래도 제일 잘하는 게 역술인 것 같다. 다른 건 다 접어도 역술은 절대 접을 수 없다. 역술은 증조부부터 4대를 이어온 ‘가업(家業)’이기 때문이다.

나를 찾는 사람이 없고 그냥 차나 마시며 물끄러미 종로 거리를 걷는 행인을 쳐다볼 때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본다.

‘태어난 사람은 언젠가는 죽겠지만 그게 언제인지, 살면서 엄청난 부귀공명은 아니라도 밥은 굶지 않고 부모와 형제, 처자가 무병장수하고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사람이라면 모두 궁금해 할 수밖에 없겠지. 그 궁금증 때문에 우리 역술인이 굶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평지돌출 역술인이 많지만 난 그렇지 않다. 역술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할아버지, 아버지를 거쳐 내게로 역술이 가업으로 이어졌다. 증조부 시절에는 남의 운세를 봐준다는 게 괜찮은 직업이 될 수 없었다. 전국 방방곡곡 세거지마다 그 동네의 대소사를 제사장처럼 살펴주는 어르신이 이런저런 운세를 봐주었다. 조부 때부터 역술이 전문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런데 조부는 남의 운세 봐주는 걸 그렇게 탐탁지 않게 여겼다. 역술 때문에 적잖은 돈이 들어오면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장학사업을 시작했다.

아버지 때 우리 가문의 역술이 가장 주목을 받았다. 비록 대구에 있었지만 한강 이남에선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역술인으로 존경을 받았다. 특히 유명 탤런트와 영화배우가 자주 들락거렸다. 김희갑, 문희, 엄앵란, 심지어 삼성그룹창업자 호암 이병철도 아버지와 말을 섞었다는 것을 훗날에야 알았다. 아버지는 효성과 샛별 장학회도 만든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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