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일보를 통해 본 현대사] ‘절필의 시간’ 통곡 9년만에 ‘바른 향토지’ 영남일보 복간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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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5-14   |  발행일 2015-05-14 제7면   |  수정 2015-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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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통폐합을 알리는 폐간호 1980년11월25일자 신문과 민주·통일·바른 향토지를 표방하며 복간된 1989년 4월19일 특집호.


1987년 6월29일. 집권 민정당 노태우 대표는 사실상 대국민 항복문서인 ‘6·29선언’을 발표했다. 8개항 중 5번째가 ‘언론기본법 개폐를 통한 언론자유의 창달’이었다. 말로나마 새로 언론사를 만들 수 있는 토양이 갖춰진 셈이었다

이어 1988년 11월에는 언론기본법이 폐지되고 정기간행물 등록에 관한 법률이 발효돼 언론은 신문 잡지의 발행에 전면적인 자유를 얻었다. 1960년 4·19 직후 제2공화국이 발행의 자유를 제한 없이 보장했던 이후 30년 가까이 만에 다시 찾은 언론의 자유였다. 강제로 통폐합된 영남일보의 복간은 그렇게 시작됐다.

80년 ‘1道1紙’ 원칙 하에 통폐합
해당 언론사 사주 보안사 끌고가
강제로 도장 찍고 각서 쓰게 해

11월25일자 1만1천499호로 종간
1면 5백만 도민과의 고별사 실어
검열당해 기사 곳곳 삭제 ‘비감’

그로부터 7년후 언론기본법 폐기
이재필 사장 구사옥·제호 출연
89년 4월19일 복간호 50만부 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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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선언으로 언론은 신문·잡지의 발행에 자유를 얻게 됐다. 강제로 통폐합된 영남일보의 복간도 이뤄졌다. <영남일보 DB>


◆자율의 탈을 쓴 강제 폐간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쓰러졌다. 대통령을 잃은 놀라움과 슬픔 뒤로, 민주·자유·인권의 새 봄이 시작될 것이란 기대도 싹트고 있었다. 그러나 봄은 멀어졌다. 신군부는 광주 민주항쟁을 총칼로 진압해 군사정권의 시대를 이어갔다. 군부의 언론장악 음모는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조치와 12월 언론기본법 제정으로 완결됐다.

언론통폐합으로 ‘신아일보’는 ‘경향신문’에, ‘서울경제’는 ‘한국일보’에, 지방지는 ‘1도1지(一道一紙)’ 원칙하에 흡수·통합되고, ‘합동통신’과 ‘동양통신’은 합병돼, ‘연합통신’으로 발족했으며, 동아·동양방송을 KBS에 통합, KBS와 MBC 두 방송국만 남았다. 또한 지방주재 특파원 제도를 폐지하여 신문이 발행되는 지역 밖의 뉴스는 정부 지배하의 통신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도록 제도화하는 한편, 공영방송 체계로 관영 KBS와 KBS가 주식의 70%를 소유한 준관영 MBC로 네트워크를 이원화함으로써 방송매체를 완전히 장악했다.

언론통폐합에 대한 결재가 나기 이전인 10월 중순께 대구 상공회의소 박윤갑 회장은 이재필 영남일보 사장에게 “개혁세력이 싫어하는 편집국장(이종명)을 사장이 구명운동을 하기 때문에 영남일보가 없어진다는 말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귀띔을 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1월12일 늦은 밤, 이재필 사장은 보안사로 호출을 당한다. 한국FM의 김영택 상무와 안동 MBC 김대진 사장, 포항 MBC 최창호 사장도 있었다.

“지금부터 언론사문제에 대해 낭독하겠다. 이것은 일종의 통고인 동시에 번복할 수 없는 결정사항이다. 그러므로 반대, 거부는 용납이 안된다. 이유는 없고 무조건 따라야 한다. 영남일보는 매일에 병합되며 한국FM은 KBS에 흡수되며 대구MBC는 서울 MBC에 주식을 양도한다.”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는 같은 날 임시총회를 열어 상업방송 체제를 공공방송으로 전환하고 지방주재 기자를 철수시키며 유일한 대형민간통신사를 신설한다는 내용 등을 담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러나 포장만 자율이었지, 통폐합 언론사 사주들을 보안사로 끌고 가 도장을 찍게 한 강제였다. 11월12일 오후 6시쯤 전두환 대통령이 결재한 ‘언론창달 보고서’에 따라 보안사가 언론사 사주들을 소환하여 이들로부터 통폐합에 이의가 없다는 각서를 받아냈던 것이다.

4시간여를 버틴 끝에 이 사장은 눈물을 삼키며 보안사 직원이 쓴 포기각서에 손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11월17일, 영남일보는 11월25일자 지령 1만1천499호로 종간되고 매일신문과 통합한다는 사고를 실었다.

11월25일. 서문로 영남일보 편집국 안은 처연함과 술렁거림에 휩싸여 있었다. 오전 10시5분 경북 계엄분소 검열팀은 폐간호에 마지막으로 칼질한 뒤 검열필 도장을 찍었다. 이날 폐간호 7면에는 김상태 사회부장이 쓴 ‘아침까치는 끝내 돌아오지 않을 것인가’라는 제하의 기사와 임정이 사진부 차장이 중앙공원의 은행나무에 높이 걸린 까치집을 찍은 사진이 사회면 머릿기사로 실렸으나 검열관에 의해 삭제되어 실리지 못했다. 암울한 내용이었으나 복간에의 희망을 간절히 품은 기사였다.

폐간호는 8면으로 제작되었다. 군데군데 검열관의 칼질 흔적이 남아있는 고별사는 장중하면서도 아쉬움과 착잡함에 가득 차 있었다. ‘5백만 경북도민 여러분과 고별합니다’라는 제하의 기사는 독자에게 국가·민족·사회와 정의·민주를 위해 최선의 봉사를 다했음을 알리는 마지막 인사였다. 그 마지막 인사도 ‘최선의 봉사를 다했음을 자부합니다’로 되어있었으나 그나마도 검열관에 의해 ‘자부합니다’라는 단어는 삭제된 채 ‘다했읍니다’만 달랑 남았다.

1면에 실린 ‘자유성’도 원고 뒷부분이 완전히 삭제되어 게재되었다.

“이제 절필의 시간이다. 비록 그 소리를 듣는 이가 없었고 시비가 분명치 않아 질책만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35년간 자유성은 끊임없이 울어왔다.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슬퍼하며 또 때로는 애정 어린 목소리로 울어왔다. (…) 그러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세 번 하고도 반 동안의 강산이 변한 것이다. 그것을 짧다고 하기엔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유한한 것이고 보면 그 누구도 감히 35년을 한순간에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폐간이 결정된 언론사 가운데 영남일보는 창간일이 가장 오래된 신문사였다. 6·25 당시에는 국내 유일의 신문으로 낙동강 전투의 승전보를 실의와 불안에 빠진 전 국민에게 알려 희망을 북돋웠다. 폐간 직전 당시 판매부수와 광고는 확대일로에 놓여있었고 동인동 2가의 경북대 의과대학 뒤편에 부지 3천300여㎡(1천평)을 마련, 지상 12층∼지하 3층의 신축빌딩을 12월 착공할 계획으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 비상의 순간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폐간 당시 영남일보 직원은 198명이었다. 78년 6억여원, 79년 10억여원, 80년 15억여원으로 매출도 급성장하고 있었다. 특정 종교단체나 기업의 소유도 아닌 지방 유지들이 민간자본으로 설립해 독립된 언론사로 발전을 거듭해왔으며 시민체육대회, 헌수녹화운동, 경북연감발행, 미스경북 선발대회, 대구 안동 간 역전경주대회, 영호남 친선고교야구대회, 화랑청백상 등 다양한 사업도 펼치고 있었다.



◆복간된 민주·통일·바른 향토지

그로부터 7년이 지난 87년. 한국정치는 다시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1987년의 6·29선언은 정치사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 놓는 동시에 언론의 모습을 엄청나게 변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6·29선언 제5항은 언론 자유의 창달을 위해 관련된 제도와 관행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며 언론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다고 했다. 11월11일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때 언론인들의 족쇄를 채워왔던 언론기본법이 폐지되고 신문이 일정 시설을 갖추고 등록만 하면 등록증을 교부하도록 하는 정기간행물의 등록에 관한 법률도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언론기본법의 폐기, 지방주재 기자의 부활, 프레스카드 폐지, 신문의 증면 자율화 등이 구체적인 변화였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961년 군사정변 이후 언론을 규제했던 여러 관행을 일거에 무너뜨린 것이다. 언론이 권위주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율경쟁 시대에 진입하게 되었다. 언론은 이전의 여러 가지 통제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과거에는 금기로 여겼던 영역을 보도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신문과 잡지가 급격히 늘어나고 자유경쟁 체제로 진입했다. 5공 언론 탄압으로 인한 피해자 구제와 과거 청산이라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절치부심, 복간에의 꿈을 간직하고 있던 이재필 사장은 선친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고 경기고, 연세대 동문이던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에게 영남일보 복간작업에 동참하자는 요청을 한다. 대우가 30억원의 자금을 출연하고 이재필 사장이 서문로 구사옥과 제호를 출연, 복간의 기치를 올린 영남일보는 1989년 4월19일 복간 특집호를 발행했다. 1면에는 ‘민주·통일·바른 향토지’라는 제하의 복간사를 실었다. 박용규 논설실장이 쓴 복간사에서는 “영남일보는 순수하고 올바른 향토신문으로서 향토공동체와 민주·통일·지방화를 위한 공기로서 당당하고 친근하며, 그래서 위대하고 순정한 영남일보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복간 특집호인 지령 1만1천500호는 32면으로 50만부가 발행되어 배포됐다. 군부에 의해 강압적으로 붓을 꺾고 졸지에 일자리를 잃고 쫓겨난 이들은 9년 만에 제 손으로 만든 신문을 받아들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자료조사= 조사팀 박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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